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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화 서고 대공자-67화 (67/460)

67화. 후공은 분명 좋아한대

그때였다.

숲에서 세 개의 신형이 솟구쳐올랐다.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이내 뜨락의 끝자락에 내려선 이들은 얼굴이 똑같이 생긴 천잠의 세 쌍둥이었다.

“태미! 넌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

“당장 이리 오지 못해!”

형들의 호통에 태미가 화들짝 놀라 바로 달려갔다.

“듕듕!”

세 쌍둥이가 태미를 둘러싸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책망을 쏟아냈다.

“걱정했지 않느냐!”

“대체 혼자 여길 오면 어쩌겠다는 거야!”

“듕듕…….”

[그게 아니고…….]

“그게 아니라니?”

태미가 듕듕대면서 손짓을 해가며 천공단쪽을 몇 번인가 가리켰다. 상황 설명이 이어지면서 삼둥이의 눈은 의아함으로 물들어갔다.

그리고 결국,

“그랬어?”

“듕듕듕듕듕!”

어느샌가 형들의 표정이 호기심으로 변한 걸 본 태미는, 이제 신을 내며 미친 듯이 듕듕거리기 시작했다.

***

그 시각,

태대는 마음 정리를 끝냈다.

하루를 꼬박 틀어박혀 좌정한 결과였다.

어제 물러난 건 천화서고 서생 때문이었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불현듯 후공이 떠올랐기 때문.

- 명심해라. 결코 다쳐서도, 너희 중 하나라도 잃어서도 안 된다.

마치 후공의 염려가 천화서고 대공자를 통해 흘러나온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서생의 독설은 도발로 느껴지지 않았고,

그저 염려가 지나쳐 화를 내는 모습처럼 보였다.

그렇게라도 해서 설득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정녕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분명 처음 대면하였고, 접점도 없는 자가 아닌가.

왜 마음에 울림이 전해진 것인가.

또 그가 그리 격렬해야 할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새파랗게 젊은 놈이 무슨 이유로 자신들을 걱정하는가.

그래서 생각이 많아졌다.

그리고 지금, 하루를 꼬박 틀어박혀 좌정한 결과 결론에 도달했다.

‘영악하고 건방진 놈.’

애초에 의미를 부여할 일도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그 정도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놈이 뭘 알겠는가.

당사자가 아니면 어린 날 자신들이 느꼈던 그 절절한 감정의 깊이는 가늠할 수 없다.

만약 놈이 진심을 품고 있었다면, 최소한 후공에게 예는 취하고 나서 충고했어야 했다. 병풍까지 가져다놨거늘.

천재라더니 영악하기 짝이 없는 놈이다. 상황을 모면하고 귀찮음을 덜고자 몇 마디 말로 사람을 흔들어놓은 것이 아닌가.

‘속아 넘어가는 건 한 번이면 족하다. 두 번은 없다.’

천잠은 자비가 없거늘, 크게 베풀고 말았다.

“태야.”

밖에 있던 태야가 들어와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대형, 부르셨습니까.”

“오늘 밤, 서생과 천공단을 끝낸다.”

“네.”

태야의 입가에 옅게 미소가 번졌다.

태야로서는 대형이 종일 식음을 전폐하고 아무 말이 없어 염려하던 차였다. 괜한 근심이었다.

“아우들은?”

“지금 바로 불러오겠습니다.”

“설마 별채로 간 것은 아니겠지?”

“그렇진 않을 겁니다.”

일다경 후.

그렇진 않을 겁니다, 라고 말했는데…… 그랬다.

태야는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살피고 묻고 돌고 돌아 결국 아우들을 발견한 건 별채.

한데 문제는 분위기였다.

별채 뜨락에서 아우들이 천공단과 함께 깔깔대고 있었다. 어째서 저러고 있는지 바라보면서도 이해할 수가 없는 상황.

이곳 별채에 와 있다면 칼부림이 나고 있어야 정상이었다.

자신이 아는 아우들은 그래야 했다.

굉장히 사나운 녀석들이다.

후공과 관련되면 난폭해지며, 그중에서도 막내 태미는 말이 통하지 않는 막무가내인데…….

어우러진 모습이 정겹기까지 하다.

오늘 밤이 결전이건만,

곧 칼부림을 해야 하는데…….

‘약을 했나?’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천화서고 대공자 놈이 현혹하는 약을 먹인 것이라면 이 상황은 이해가 된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순 없었다.

그렇게 반쯤 넋을 놓고 있을 때였다.

“야, 너도 왔냐?”

“멍청하게 거기 서서 뭐해! 이쪽으로 와서 과일 먹어라.”

항마삼협이 손짓하며 불렀다.

덩달아 삼둥이와 태미도 따라 손짓하고 있었다.

태야는 현실감 없는 광경에 내심 중얼거렸다.

‘분명 약이겠지……. 그렇겠지?’

잠시 후,

결국 태미와 삼둥이는 질질 끌려가 주눅든 모습으로 태대의 앞에 섰다.

이미 태야의 설명을 들은 태대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왜 그런 거냐?”

태대의 시선이 태미를 향했다.

태미가 시작인 탓이었다.

[…….]

“정신이 나간 거냐?”

“듕듕.”

[미안.]

태미가 손짓했다.

“미안하다는 것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그 녀석 말이야.]

“그래, 그 녀석.”

누구인지는 굳이 거론하지 않아도 서로 알 수 있었다.

[수화를 했어. 아주 잘해.]

“…….”

[그리고 어제 일은 미안하대.]

“그게 전부냐?”

[…….]

태대의 미간이 좁혀졌다.

“넌 상대가 누구든 수화만 되면 상관없는 것이냐?”

머리를 떨구고 있던 태미가 고개를 들었다.

울먹이느라 입매가 떨렸다.

[나 바보 아니야.]

“그럼?”

[녀석이 괜찮다고 했어.]

“괜찮다니?”

[이 정도도 충분히 대단하대. 후공은 분명 좋아한대. 우리가 잘 컸다고 생각한대. 그런 생각이 든대. 아무도 다치지 않고 하나도 잃지 않아서 좋다고 했어.]

“…….”

태미가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손을 놀렸다.

[그리고 앞으로도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대.]

“……왜?”

[나야 모르지. 근데 그냥 그 말을 듣는데 좋았어. 위로가 됐어. 후공이 아닌데 꼭 후공이 말해주는 것 같아서 좋았어.]

“…….”

[그 녀석……. 날 바라볼 때…… 눈빛이 따뜻해. 날 좋아한다는 것이 느껴져.]

“…….”

[그리고…… 천공단은 재밌어…….]

“…….”

[큰형…… 미안.]

태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앞으로도?’

앞으로도……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태미의 수화가 그 부분을 손짓하는 순간부터 기분이 다시 엉망이 되고 말았다. 겨우 생각을 정리했는데, 태대는 다시 복잡해졌다.

영악한 데다 건방진 놈을 어떻게 해버리겠다고 마음을 정했거늘, 이건 또 다른 문제였다. 그 모든 소통을 수화로 했다는 것도 솔직히 전혀 예상치 못한 부분.

“대형, 놈의 세 치 혀가 간교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오늘 밤 놈들을…….”

태야가 분통을 터뜨리다 말을 멈췄다.

대형이 어째서인지 멍해져서는,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나는…… 생각을 좀 해봐야겠다.”

“대형, 대형…….”

방문이 닫히자, 태야가 차마 문은 못 열고 안타까운 목소리를 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대는 머리가 너무 복잡했다.

천화서고 대공자는 영악한 것도 건방진 것도 아니다.

도리어…….

꽤 괜찮은 놈이 아닌가.

그리고 역시나,

후공을 떠올리게 하는 건 뭐란 말인가.

***

그 밤, 후공은 부지런히 붓을 놀렸다.

천잠은 됐고.

이 정도면 칠부능선은 넘었다.

이제는 약왕문 차례였다.

붓이 지날 때마다 화선지에는 여러 도형과 수식, 그리고 문자가 기록되어 갔다.

이는 진식인 쇄금현침진(鎖禁賢針陣)의 도해.

범항의 기억 속 수많은 진법 중 하나이기도 했다.

약왕문주를 위함이었다.

정신착란에 쇄금현침진만 한 건 없다.

흩어지고 산란해가는 정신을 붙들어주며 마음을 정화시킨다.

이 진식은 범항과도 연관이 있었는데, 원래 천화서고에서는 범항의 처소에 설치해 마음을 치유하고자 했던 터. 하지만 얼마 못가 철회되었다.

범항이 알아차린 후 도리어 진식을 변용해, 정신을 갉아먹는 용도로 바꿔놓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두목형아, 어제 밤부터 뭘 그렇게 열심이야.”

소천개가 들어오며 말을 걸었다.

앞쪽에 털썩 앉아서는 턱을 괴고 바라봤다.

두목은 지난 밤을 꼬박새고 이 밤까지 열심인 것이다.

밖에서는 천공단이 내일 아침 뭘 먹을지를 놓고 맹렬히 토론 중. 여러 요리를 두고 언쟁이 높아져 당장 싸움이 날 것 같았기에, 생선구이를 주장하던 소천개는 진저리를 치며 나름 피신해 온 것이었다.

“진법.”

“무슨 진법?”

“약왕문주를 감금시킬 생각이다.”

“와우, 굉장하네.”

소천개가 놀라기는커녕 엄지를 추켜세우며 기대된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후공은 피식 웃었다.

“그래, 굉장하지.”

이 녀석은 적응이 끝나, 이젠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해도 다 생각이 있겠거니 하는 상태까지 이른 것이다.

“형아, 그럼 약왕문을 우리 천공단이 접수하는 거야?”

“그렇지. 이제부터 뒤집어놓는다.”

“어떻게, 어떻게 할 건데? 막 보물 탈취하고 영약 다 빼돌리고 그러는 거겠지?”

“물론. 그 전에 난화서원을 쫓아내야겠지.”

“유후우~~.”

소천개가 신난다는 듯 휘파람을 불었다.

후공은 붓을 내려놓고 검토에 들어갔다.

오류나 오기가 있는지 꼼꼼히 살폈다.

독양충의 대가치고는 과한 면이 있지만, 과거의 인연을 생각해보면 약왕문주에게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었다.

강호를 종횡하는 중에 녀석의 도움은 적지 않았다.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제갈혜의 부친이자 자신의 의형제인 제갈청의 목숨을 두 번이나 구했다. 독양충의 가치와는 별개로 약왕문주는 마음에 드는 녀석이었다.

보물을 찾아줄 것이고, 약왕문의 그늘도 벗겨낸다.

현재의 약왕문은 천화서고와 닮아 있다.

천화서고는 범항이 죽음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운 탓에 시름시름 앓아 여기저기 곪으면서 어둠에 잠식당했다. 약왕문이 당장이야 천화서고보다는 낫다지만, 시간이 흐르면 암울함은 깊어질 것이다.

후공은 그렇게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약왕문을 정상화한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걸리적거리는 난화서원을 치우는 일.

난화서원의 묵 공자 묵영이 여태 암호를 풀지 못했다면, 더 기다려주는 건 시간 낭비. 만약 암호를 푼다면 그건 그것대로 귀찮은 일이 될 터.

쇄금현침진의 검토 완료.

오류는 없다.

“소천개, 천공단을 불러와라.”

이내 천공단이 시끌벅적하게 들어섰다.

“형님, 내일은 멧돼지를 잡아먹기로 결정 봤습니다. 아침은 간단히 먹고, 점심때부터는 푸짐하게 고기를 썰면 됩니다.”

“그것 참 기대되는군요.”

후공은 건성으로 답했다.

솔직히 돼지든 오리든 약왕문에 이야기하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었다. 천공단이 이러는 건 그저 유희일 뿐.

모두가 자리하자 다시 입을 열었다.

“멧돼지는 멧돼지이고, 이제부터 천공단은 일을 해야겠습니다.”

“농사라도 지으려고?”

금적자가 실없는 농담을 던졌다가 주변의 천공단이 추워하며 싸늘히 바라보자 딴청을 피웠다.

“약왕문을 접수합니다.”

“어? 접수해버린다고?”

금적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른 이들도 무슨 말인가하고 갸웃하며 바라봤다.

후공이 미소지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난화서원 축출을 시작으로, 약왕문의 보물을 탈취하고, 약왕문주를 감금할 생각입니다.”

극과 극은 통하는 법.

노골적인 패악에는 패악이 없으니 도리어 천공단이 감을 잡았다.

“오호! 멋지군.”

“이런 것이 강호지!”

“하하, 그럼 이제 천공단은 마도를 걷는 거네.”

“두목, 귀 열고 있으니까 어서 마저 이야기를 해봐!”

은앙개가 몸을 당겨앉으며 재촉했다.

곧바로 향후 계획에 대한 논의가 반시진 가량 이어졌다.

대부분은 후공의 지시였으나, 의논하고 참고하여 몇 가지는 수정되었다.

자정 무렵,

금적자의 피리가 다시 울려퍼졌다.

그리고 개방의 은신은 어둠과 음률을 타고 다시금 약왕문 본전을 향해 흐릿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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