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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화 서고 대공자-68화 (68/460)

68화. 두 천재의 격돌

번쩍.

분화십창(分化十槍)은 침상에서 눈을 뜨자마자 손을 뻗어 자신의 애병인 창을 거머쥐었다.

잠을 청하더라도 한줄기 감각은 열어둔다.

그것은 강호를 살아가는 이들에겐 선택이 아닌 필수.

난화서원 묵 공자의 호위인 그도 다를 바 없었다.

창가 쪽에 기척.

둘이다.

그는 소리없이 밖으로 나와 주변을 탐지했다.

처소 주변을 휘돌고 지붕 위를 살피고 시선을 멀리 던졌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수상한 그림자는 찾을 수 없었다.

그가 미간을 좁혔다.

‘지체하지 않았거늘 종적이 없다? 분명 기척은 확실했는데…….’

지난 밤을 설친 탓일까.

어제 밤에 이어 이 밤도 피리 소리가 약왕문을 휘돌고 있었다. 어제의 음률은 마음을 진동해 이런 저런 옛 생각을 떠올리다 보니 어느샌가 뜬눈으로 새벽을 맞고 말았다.

그리고 오늘 다시 피리 소리.

곡조는 어제와 달랐으나 여전히 애절하다.

약왕문이 꽤 운치를 부린다 싶지만 그보다는,

번뜩 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창가 쪽.’

혹시나 싶은 마음에 그의 신형이 기척을 느꼈던 창가 바깥쪽을 향했고,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창가 밑에 접힌 서신이 놓여있었다.

‘서신이라…….’

그는 주변을 빠르게 둘러본 후 서신을 취하여 안으로 들어갔다. 정황만 보자면 상대는 의도적으로 기척을 냈다고 봐야 했다. 중요한 건 서신의 내용.

서둘러 서신을 펼쳐 확인했다.

- 난화서원에 전함.

약왕문은 이중의뢰.

초대된 것은 난화서원만이 아님.

사흘 전, 천화서고 대공자가 약왕문 별채에 도착.

서신의 필체에는 다급함이 묻어났다.

분화십창이 미간을 좁혔다.

“왜 굳이…….”

의문은 뒤로했다.

그는 곧바로 난화서원의 묵 공자를 찾아 보고했다.

묵영은 서신을 한참을 바라보다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흠…….”

평소 웃음기라곤 없는 묵 공자였다. 그 냉막한 얼굴에 미소가 점점 짙어졌기에 분화십창은 불안해졌다.

묵영이 나른히 입을 열었다.

“약왕문은 일을 재밌게 하는군요.”

“서신을 남긴 자는 찾지 못했습니다. 혹여 공자께선 짐작 가시는 바가 있으신지요?”

묵영이 분화십창을 바라봤다.

“그야 뻔하지 않습니까.”

“뻔하다니요?”

“약왕문의 분란을 원하는 자.”

분화십창이 놀라 눈이 커졌다.

“설마 약왕문 내 세력 다툼이…….”

“그렇지 않고서야 숨겨야 할 일을 드러낼 이유가 없겠지요. 그리고 현재 약왕문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닙니다.”

“그걸 어찌…….”

묵 공자의 말이 단정적이었기에 분화십창은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약왕문에 온 지도 열흘이 훌쩍 넘었다.

그사이 묵 공자가 만난 약왕문 인사는 첫날 각주와 부문주뿐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칩거하듯 문서 해독에 돌입했다.

자신도 약왕문의 내부 정보를 캐내는 활동은 생각지도 않았다. 그런 지시도, 그럴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묵 공자는 마치 약왕문의 사정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고 있으니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공자께선 문서 해독을 끝내셨는지요?”

묵영이 말없이 바라봤다.

그러곤,

“쉬십시오. 저도 쉬어야겠습니다. 내일은 천화서고 대공자를 만나야 하니까요.”

“…….”

‘천화서고 대공자를 왜 갑자기 만난다는 거지?’

하지만 공자가 피곤한 듯 보이기도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해 분화십창은 여러 의문이 떠올랐지만 다시 물을 순 없었다.

분화십창은 예를 취하고 물러났다.

혼자 남은 묵영은 물끄러미 서신을 내려다봤다.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하긴 천룡대전보다는 이곳이 낫긴 하지.’

서신 속 문자의 크기는 다 같은데, 유독 ‘천화서고 대공자’라는 글자가 크게 보인다.

왜인가.

호승심인가?

그럴지도.

묵영은 속히 만나고 싶었다. 아침이 당장 왔으면 싶었다.

사람들은 말하곤 했다.

삼대서고가 놀랍다 하나 그중 천화서고가 최고라고.

그리고 천화서고 대공자야말로 독보적이라고.

천화서고의 명성이 실재인지 확인하고자 했을 때 천화서고에 비극이 찾아왔다. 이후 천화서고 대공자는 폐인이 되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그렇게 기회는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최근 들려온 안휘북부의 이야기는 의외였고 놀라움이었다. 다시 기대는 커졌고 운명처럼 이곳에서 조우하게 된 것이다.

그는 환하게 웃음지었다.

‘약왕문주에게 고마워해야겠군.’

덕분이다.

약왕문주가 죽었는지 살아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남긴 암호 문서 덕분에 천화서고 대공자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약왕문의 보물을 둘러싼 내부 갈등 따윈 관심 없다.

그저,

‘누가 최고인지 알려주마.’

이것만이 중요했다.

***

다음 날 오전,

용화청은 이날도 인사를 핑계삼아 별채로 향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별채는 어제와 달리 한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다들 어디 가신 겁니까?”

어찌된 게 천공단이 한 명도 보이질 않았고, 대공자만 뜨락을 산책 중이었다.

“다들 멧돼지 잡으러 갔습니다.”

“네?”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기에 용화청은 멍청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물음이 천공단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면 농담하냐며 웃었을 것이다.

그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다시 물었다.

“멧돼지를 말입니까? 그걸 왜 잡는단 말입니까?”

“크흠……. 기르려고 잡는 건 아니겠지요.”

“…….”

그렇긴 하다만.

용화청은 다시 멍해져 대공자를 바라봤다.

고기가 필요하면 자신에게 말을 하면 될 것이지, 굳이 잡으러 갈 일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그걸 대공자가 문제될 게 있냐는 식으로 나오니 할 말이 없었다.

어쩔 때 보면 천공단만 괴상한 것이 아니라 대공자도 좀 엉뚱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용화청이 머리에서 멧돼지를 떨쳐내고 입을 열었다.

“대공자, 어찌 진전이 있으십니까? 그제 밤에는 꼬박 날을 지새웠다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뵙고 싶었던 참이었습니다.”

“설마, 해내신 겁니까?”

“죄송합니다만 아직입니다.”

용화청이 기대가 빠져나가듯 작게 한숨을 토해내며 용건을 물었다.

“그럼 보고자 하셨다는 건…….”

“다름이 아니라 최근 서책을 가까이하지 않은 탓인지 머리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듯합니다. 이럴 땐 책을 읽다 보면 생각지도 않게 영감이 떠오를 때가 많지요. 그리고 암호 해독에도 영감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고요.”

용화청이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이 와중에 책을 읽겠다고?’

이번 의뢰를 대하는 자세에 절실함이 보이지 않으니 아쉬움이 피어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다.

또 영감이라는 측면을 고려할 때 거절하기도 탓하기도 어려웠다.

“서책을 가져다드리면 되겠습니까?”

“그보단 서각이나 큰 서재에서 다양한 책을 봤으면 싶습니다. 물론 난화서원의 묵 공자에게 제가 알려지는 일이 없도록 각주께서 신경을 써 주셔야 할 테고, 저도 주의하는 걸 잊지 않겠습니다.”

용화청이 잠시 고심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흠, 서재는 한계가 있으니 서각이 낫겠군요. 본문의 장서각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이용 가능한 구역은 일 층으로 제한됩니다. 그 이유는 따로 설명드리지 않아도 이해하실 테지요?”

장서각은 총 4층.

일 층은 일반 서책과 잡서들이 보관되어 있으나, 이 층부터는 약왕문의 절예들이라 할 수 있는 약학서들로 채워져 있다.

후공도 물론 바로 이해했다.

또한 만족스러운 답변이기도 했다.

정작 필요한 층은 장서각의 1층인 것이다.

“이해하고말고요.”

“오늘이든 내일이든 서로의 여건과 상황을 고려해 시간을 정하시지요.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돌아가며 용화청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멧돼지는 뭐고, 책은 또 뭔가.’

어찌된 게 별채 쪽만 오면 정신 사납고 붕 뜨는 기분이 된다. 정녕 우울해질 틈이 없었다. 분명 이곳도 약왕문일진대, 대공자와 천공단을 맞이한 후로는 마치 별채만 딴 세상이 된 듯했다.

그렇게 용화청이 집무실로 터벅터벅 들어가려 할 때였다.

생각지도 못한 희소식이 찾아왔다.

“각주님, 난화서원 묵 공자가 뵙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묵 공자가?”

용화청의 눈이 희열로 물들었다.

‘해냈구나!’

확실했다.

의뢰 직후 묵 공자의 요청 사항은 단 하나.

일체의 방해도 없이 집중하고 싶다면서, 중도에 면담이나 인사치레가 없었으면 한다고 말했었다. 그런 묵 공자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으니, 이는 답을 찾았다고 봐도 무방한 것이다.

용화청은 한달음에 달려가 묵영과 마주했다.

“역시 난화서원이십니다. 해내실 줄 알았습니다.”

“허허…….”

묵영이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괜히 오해하시게 했나 봅니다.”

“네?”

“뵙고자 한 건 다른 용건 때문입니다.”

거의 확신했던 터라 용화청의 실망은 말로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살아온 날이 적지 않은 그는 곧바로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앞서갔습니다. 편히 말씀하십시오.”

“약왕문에 천화서고 대공자가 와 있다고요?”

“네? 그, 그걸 어찌…….”

용화청은 너무 놀란 나머지 표정관리고 뭐고 다 날아가버렸다. 시치미를 떼야 한다는 것도 잊고서 눈을 부릅뜨고 더듬거리고 말았다.

“어쩌다 보니 알게 되었습니다.”

“묵 공자, 그게 사실은…….”

“아, 탓하고자 꺼낸 이야기는 아닙니다. 약왕문 입장에서 보자면 현명한 대처입니다. 다양한 방편을 준비하고 대응하시는 것은 당연하고 또 옳은 일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상황이 묘하게 꼬였습니다. 본래 본문이 의도했던 바는 아닙니다.”

용화청이 다급히 이중의뢰가 된 경위를 설명했다.

식은땀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 갔다.

“……전서구에 문제만 생기지 않았어도 천화서고 대공자를 부를 일은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해명이 다가 아니다.

이쪽도 의문은 짚고 넘어가야 했다. 용화청은 가늠하듯 묵 공자를 바라봤다.

“그런데…… 묵 공자께선 어떤 경로로 천화서고에 대해 알게 되신 겁니까?”

묵영이 대답 대신 옆에 시립한 분화십창을 슬쩍 바라봤다.

‘아…….’

용화청으로서는 대답을 들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분화십창의 능력이 생각보다 출중한 것인가. 그동안 은밀히 정보를 수집한 모양이구나.’

말이 새지 않도록 철저히 단속을 시켰다곤 해도, 밤 말을 듣는 쥐는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어찌 쥐새끼 같은 짓을 했냐고 탓하는 건 현명한 처사가 아니었다.

그때 묵영이 입을 열었다.

“각주를 뵙고자 한 것은 천화서고 대공자와의 독대자리를 주선해 주십사 부탁드리고자 함입니다.”

“네? 굳이 그러실 필요가…….”

“혹시 압니까. 대화가 잘 통해 본 서원과 천화서고가 머리를 맞대고 해결을 위해 협력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용화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황에서 되도록 묵 공자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어차피 천화서고 측은 이미 난화서원의 존재를 알고 있으니, 처음부터 설명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없었다.

“묵 공자, 지금 당장은 어렵습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물론입니다. 천화서고는 제 존재를 까마득히 모르고 있을 터이니, 그쪽에도 얽힌 상황을 이해시킬 만한 시간 정도는 필요하시겠지요.”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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