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반시진 걸렸습니다
묵영은 머리가 얼얼했다.
분화십창이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는데, 몸가짐이 매우 조심스럽고 거기에 살갑게 짓는 눈웃음을 동반한 표정은 묵영으로서는 여태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우리? 아직 못 들었냐? 천공단의 장로 됐잖아.”
“네? 천공단이란 게 설마…… 단주가 누구란 말입니까?”
“누구겠어. 천화서고 대공자이자 우리의 형님이지.”
눈이 휘둥그레졌던 분화십창이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선배님들도 참. 어찌 그런 말도 안 되는 농담을 하십…….”
“웃어?”
“…….”
“막 놀라고 감탄을 못할망정 웃어버린다고?”
“…….”
“십창 너 이 새끼, 당장 감탄 안 하냐? 분위기 이렇게 십창 낼 거야?”
“죄, 죄송합니다. 너무 대……대단한 일이어서 그만…….”
지켜보던 묵영의 안색은 이제 창백해졌다.
믿고 있던 분화십창이 처 맞기 직전이었다. 이쯤 되면 안색같은 건 그냥 창백해져버린다.
‘어떻게 이런 자들이…….’
천공단이란 이들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대강 짐작이 갔다.
분화십창이 사람 취급 못받을 정도면 결코 작은 격차가 아닐 터. 항마삼난이라는 자들이 저 정도라면 각주가 깍듯하게 어르신이라 칭한 인물은 짐작이 힘들 지경.
거기에 멧돼지 살을 발라내는 이들도 솜씨가 눈이 부실 정도였다. 거기다 젊고 어린 거지들과 통통한 처자까지.
‘……천화서고 대공자의 수하로 있단 말인가.’
아니 그보다,
묵영은 용화청을 쪽을 바라봤다.
‘사람 말을 믿었어야 했다.’
때마침 용화청의 시선도 묵영 쪽을 바라본 탓에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내가 뭐라고 했냐.’
‘이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소…….’
말이 없어도 눈빛으로 대화가 오갔다.
둘은 그렇게 바라봤다가 서로 급히 시선을 돌렸다.
“묵 공자님?”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묵영이 바라보니 시녀복 차림의 귀여운 여인이었다.
“저희 공자님께서 안으로 모시라 하십니다.”
“안으로?”
묵영은 다시금 불쾌한 감정이 치밀어 미간을 좁혔다.
시녀의 태도야 공손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자신이 직접 이곳까지 찾아왔거늘 천화서고 대공자는 나와서 맞이할 생각조차 없는 것이다.
‘천화서고는 어찌 이리도 예의가 없을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이 보통 손님인가.
천화서고와 더불어 삼대서고 중 한 곳인 난화서원의 후계자다.
이건 기본 예의 문제였다.
‘모든 게 엉망이군.’
천공단이란 자들은 온통 멧돼지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아는 척도 안 하고, 그 주인이란 자는 얼굴도 비추지 않고 사람을 오라가라다. 원래 처음 만나면 두루 인사도 하고 덕담도 나누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지 않던가.
가교 역할을 해야 마땅한 약왕문 각주는 노인의 비위를 맞추느라 급급하고, 분화십창은 자신이 어떤 신분이고 여길 왜 왔는지 진즉에 잊어버린 모습.
“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빙긋 웃으며 앞장섰다.
묵영이 할 수 있는 건 다시 미간을 찡그린 것뿐.
별채 안으로 들자, 반가운 인사가 들려왔다.
“어서 오십시오. 밖이 번잡한 탓에, 무례인 것을 알면서도 안에서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해합니다. 인사를 나눌 만한 분위기는 아니더군요. 난화서원의 묵영입니다.”
“천화서고 범항입니다. 이쪽으로.”
서로 예를 갖춘 후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송화가 차를 내왔다.
“큰 영광입니다. 난화서원의 명성 자자한 묵 공자를 약왕문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명성이야 천화서고만 하겠습니까. 한데 수하들이 하나같이 출중한 분들인가 봅니다.”
“응? 출중의 뜻이 그새 바뀐 모양이군요.”
“…….”
“보셔서 아시겠지만 전혀 출중하지 않습니다. 하나같이 엉망진창이지요. 그래도 가끔 멀쩡할 때가 있어 내치지 않고 지켜보고 있는 중입니다.”
묵영은 피식하고 말았다.
그러는 한편 은근 감탄하는 마음도 일었다.
‘이자의 대응이 놀랍구나.’
무례한 자라 여겼거늘, 짧게 몇마디 주고 받았을 뿐인데 어느샌가 자신의 마음 속 불쾌한 감정이 사그러들고 있었다. 수하들에 대해서도 말 속에 뼈를 담아 던졌는데 그저 소탈하게 인정해버리니 더는 할 말이 없었다.
또 격식은 갖추면서도 딱딱하지 않고 가벼우면서도 품격을 잃지 않는 여유로움이 자연스럽게 태도에서 배어나니, 이런 자가 어찌 폐인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돌았는지 기이할 노릇이었다.
묵영이 입을 열었다.
“뻔한 이야기는 생략하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눴으면 싶은데, 대공자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물론입니다.”
“어릴 때부터 천화서고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인지 언젠가는 천화서고와 재주를 견주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죠. 그런데 뜻하지 않게 기회가 찾아왔군요.”
후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짐작하고 있던 바요, 의도한 바이기도 했다.
만나고자 한 것이 협력의 제안일 리가.
난화서원은 이번 약왕문 문서 해독으로 누가 더 뛰어난지 판가름을 내고자 함인 것이다.
‘요 나이 때는 당연한 게지.’
후공 입장에서야 치기어린 말이었지만 이해와 상식의 범주.
그런데 묵영의 태도에서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다.
‘이 녀석, 설마 문석해독을 마친 것인가. 그럴 리가 없는데…….’
자신감에 차 있는 모습이 의문을 부추겼다.
만약 해독을 마친 것이라면 그건 후공으로서도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묵영의 말이 이어졌다.
“물론 서로를 평가할 기준은 공정해야겠지요. 제가 이곳에 와서 문서 해독에 매달린 지 13일입니다. 천화서고는 3일째. 시일은 총 시간을 따져 누가 먼저 문서를 해독하는지로 결정하면 되겠습니다.”
열흘의 차이가 나니, 그만큼을 감안하겠다는 말이었다.
“묵 공자,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공자께선 앞으로 며칠 정도면 문서 해독이 끝나리라 예상하십니까?”
“며칠요?”
묵영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후공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설마 벌써 끝낸 겁니까?”
“맟춰 보십시오. 어떻게 됐을 것 같습니까?”
반문하는 묵영의 조소가 짙어졌다.
이는 대답이나 마찬가지였다.
후공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하고 말았다.
“놀랍군요. 그 난해한 내용을 고작 열사나흘 만에 풀어냈단 말입니까?”
후공의 찬사는 진심이었다.
이 몸인 범항이야 애초에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논외.
그저 묵영이 천재라곤 해도 그 수준이 천화서고의 아우들인 윤과 부몽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막내 부몽이면 한 달 안쪽, 윤이면 한 달은 넘겨야 한다.
그렇기에 묵영도 최소 한 달은 넘길 것이라고 봤거늘, 13일이라면 묵영은 생각 이상으로 뛰어난 기재인 것이다.
“하하하, 그리 놀라셨습니까?”
“놀라다마다요. 솔직히 제 아우들보다 뛰어난 이를 만나게 될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습니다.”
“…….”
통쾌하게 웃던 묵영이 웃음을 뚝 그쳤다.
느낌이 쎄해지면서 순식간에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아우들보다……라는 건 무슨 뜻입니까?”
“약왕문주의 암호가 무척 심오한 탓에, 저는 묵 공자가 한 달은 족히 고생하리라 봤습니다. 한데 벌써 결과를 내셨다니 놀랄 수밖에요.”
“…….”
묵영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져갔다.
‘약왕문주의 암호’라는 말이 나온 순간부터 머리에서 피가 빠져나가며 현기증이 돌았다.
문서의 작성자가 약왕문주라는 걸 알고 있다는 건 이미 해독을 마쳤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무슨……. 고작 3일 만에…….’
그럴 리 없다.
전체 문서를 해독했을 리가.
앞부분만 해독한 것만으로도 약왕문주가 문서의 주체라는 건 알 수 있다. 그건 첫 문장이지 않은가.
“설마…… 전체 문서를 해독했다는 말씀은 아니겠지요?”
“흐음……. 일부와 전체가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가 곧 전체입니다만.”
꿀꺽.
묵영이 마른침을 삼켰다.
“사……사흘 만에 풀었단 말입니까?”
“그보다 짧습니다.”
“……?”
“반시진 걸렸습니다.”
“켁켁!”
너무 놀란 나머지 생목에 사래가 들린 묵영이 마른기침을 토해냈다.
반시진(1시간)이라니,
이는 가히 청천벽력이었다.
겨우 진정한 묵영이 눈을 부릅떴다.
“대공자, 장난이 심하십니다. 그걸 지금 믿으라고 하는 말입니까?”
“크흠…….”
감히 누구 앞에서 눈을 부릅뜨냐 싶어진 후공이 심기가 불편해져 습관처럼 수염을 쓰다듬다가, 수염이 없다는 걸 깨닫고는 어정쩡하게 손을 내렸다.
“송화야.”
“네, 공자님.”
“일전에 적어둔 해독본을 가져오너라.”
“네.”
묵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미 적어 두었다고?’
그렇지 않아도 직접 문서 전문을 이야기해보라고 할 참이었다.
하지만 반시진이라니, 이건 그저 상상의 나래일 뿐이다.
아니 그보다 그걸 왜 적어둔단 말인가?
곧 송화가 두 겹으로 접힌 화선지를 건넸다.
후공이 받아들고는 다시 묵영에게 넘겨주었다.
“지저분해도 이해해주십시오.”
묵영이 미간을 좁히고 받아들었다.
지저분한 정도가 아니라, 여기 저기 굴러다녔는지 가장자리는 이미 너덜거리고 있었다.
펼치자, 화선지 안쪽은 더 가관이었다.
여기저기 낙서에 동물에 물고기 그림까지 그려져 있었다.
“제 수하 중에 아직 어린아이가 있는데, 동물을 자주 그립니다. 허허허…….”
“하하하하…….”
묵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동물 그림 따위는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냥 해독본을 펼쳐보자마자 어처구니가 없어, 나오느니 웃음이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해석.
한 치의 오차도 없다.
결과물이 말하고 있었다.
애초에 상대는 넘볼 수 있는 이가 아니라고.
반시진 만에 끝냈다는 것을 증명하라고 할 것도 없었다.
서신의 상태가 그 증명.
심지어 약왕문의 보물에 관한 것임에도 대충 던져놓고 방치해두어 낙서에 그림까지 그려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더 어처구니없는 건,
심지어 이 사실을 천공단인가 하는 수하들이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천공단이 그럼에도 멧돼지를 잡으러 다녔다는 점이었다.
‘이 사람들, 도대체 뭔가?’
무엇보다 천화서고 대공자는 견주고 말고 할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천재적인 두뇌뿐 아니라 배포, 그리고 수하들에 대한 신뢰까지.
“이것 참.”
나오느니 헛웃음이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허허, 이것 참…….”
묵영은 같은 말만 반복했다.
‘운이라고?’
이것이 운으로 될 일인가.
격차는 상상 이상. 하늘과 땅의 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래라면 화가 나거나 기분이 엉망이 되어야 마땅한데, 연신 웃음만 나온다.
마음이 날을 세우는 것도 넘볼 수 있겠다 싶을 때라야 일어나는 법. 차이가 넘을 수 없는 벽이 되고 나니 그저 인정하게 되고 도리어 편안해져버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창가의 서신……. 저를 이곳에 오게 한 건 대공자였겠군요.”
묵영이 물었다.
차분한 어조인 탓에 혼잣말처럼 흘러나왔다.
마음을 내려놓아서인가.
지금까지의 정황들을 되돌아보니 대충 알 것 같았다.
약왕문의 소행이 아닌, 자신이 자석처럼 끌려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