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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화 서고 대공자-71화 (71/460)

71화. 압도적인 천재성

후공이 미소 지었다.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빠른 길을 찾다보니 그리 되었습니다.”

담담히 인정하는 것으로 후공은 예의를 갖췄다.

묵영이 그 마음을 받아들였다.

“솔직히 말씀해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럼 제게 원하는 바는, 제가 떠나는 것이겠군요?”

“허허……. 대화가 편합니다.”

“하하하…….”

묵영도 웃음을 터뜨렸다.

대화가 편하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여태 살아온 날 중 오늘만큼 웃어본 적이 없었다.

압도적인 재능의 격차,

하늘 너머에 있는 듯한 천재성에 대한 경외심 때문일까?

아니,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천화서고 대공자는 가벼운 듯하면서도 자신의 뜻을 정확히 밝히며 예의를 잃지 않으니, 휘말린다 싶긴 해도 묘하게 싫지 않았다.

“좋습니다. 저의 완패인데 그렇게 하지요. 한데 떠나기 전 몇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대공자께선 약왕문의 상황을 대강 파악하신 듯한데, 혹시 약왕문의 내분을 수하들과 함께 조율하실 생각입니까?”

천공단이 그랬던 것처럼 묵영도 약왕문주의 안위 문제와 내분, 혹은 더 나아가 패륜의 여지까지도 보고 있었다.

한데 잠깐의 대면이긴 해도 어쩐지 대공자가 내분을 해결하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터. 또 해독본이 굴러다니는 것으로 보아 보물을 탐내는 상황이 아닐 것이라는 유추도 따라왔다.

“약왕문에 내분은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묵영이 갸웃했다.

“약왕문은 건재합니다. 밖에서 저 난리를 치며 버젓이 멧돼지를 잡고 있으니까요.”

“아…….”

묵영이 탄성을 흘렸다.

약왕문에 심적 여유가 있다는 뜻.

“또 외부적으로도 약왕문은 정파와 사파의 구별 없이 강호에 힘 있는 세력이나 친구들이 많지요.”

“그렇군요.”

묵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자의 담담한 어조 탓인지, 아니면 자신이 이미 상대를 인정하고 있어서인지 몰라도 수긍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는 한편,

‘강호 사정에도 밝은 것인가.’

그럴 리가. 강호라는 곳은 서책을 통해 이해되는 곳이 아니다. 분명 천공단에게 조언을 들은 것이겠지.

이어 묵영은 앞으로의 계획을 물으려다 마음을 접었다.

구질구질한 느낌이다.

어차피 들을 수 있는 대답도 아니고.

“그럼 더 묻지 않겠습니다. 앞으로의 일에 행운을 빕니다.”

후공이 미소를 머금었다.

‘이 녀석 깔끔하네.’

첫인상과 달리 후공은 묵영이 마음에 들었다.

언행에 군더더기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던가.

특히 그 결과가 자신의 능력이나 평판의 하락으로 이어진다 싶을 때면, 사람은 흔히 온갖 변명과 억지로 합리화할 구실을 찾기 마련이다.

한데 냉소적이고 날카로운 인상과 달리 묵영의 성향은 깔끔하기 이를데 없었다.

“묵 공자, 헤아려 주시니 감사합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천화서고에 들려주십시오. 그때 오늘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요.”

후공이 그냥 하는 말은 아니었다.

묵영 정도면 보기드문 훌륭한 인재. 윤과 부몽과도 제법 잘 어울릴 수 있을 듯 보였다.

그런데 그때, 뜻밖에도 묵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감사한 말씀이고, 꼭 그리하고 싶습니다만…….”

“……?”

“말씀하시는 걸 듣자니, 혹시 이번 천룡대전은 참석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천룡대전이라니요?”

후공이 뚱해졌다.

그야말로 뜬금없었다.

천룡대전이란 걸 몰라서가 아니었다.

강호 십대세가의 회합이 천룡대전.

명문 세가의 교류와 연대의 장이다.

3년마다 한 번씩 회합을 개최하는데, 과거 후공도 자리를 빛내달라는 요청에 귀찮음을 무릅쓰고 두 번이나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천화서고 대공자의 신분일 뿐이다.

되묻는 것을 몰라서라고 생각했는지, 묵영이 곧바로 천룡대전이 무엇인지 간략히 설명하고는 말을 이었다.

“……혹시 남궁세가에서 보낸 초대 서찰을 받지 못하셨습니까?”

“금시초문입니다.”

“흐음……. 제가 받은 초대 서찰에 대강의 초청자 명단이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그중 대공자도 포함되어 있어, 저도 좋은 기회다 싶어 천룡대전에 참석하겠노라 회신을 보냈습니다.”

후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렇다면 본가에 서찰이 전달되기 전 제가 먼저 약왕문으로 출발하여 엇갈린 모양이군요.”

세가의 회합에서 외부 인사를 초청하는 것이 특별한 일은 아니라 해도, 초대를 받게 될 줄은 예상치 못한 일. 물론 올해에 천룡대전이 열린다는 것도 애초에 관심 밖이라 모르기도 했고.

아무래도 서문세가를 짓이겨놓은 것이 다른 세가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이리라.

하지만 후공은 별 감흥이 없었다.

천룡이든 흑룡이든 번잡스러울 따름.

“대공자, 아직 한 달의 여유가 있고 남궁세가가 이곳에서 멀지 않으니 그곳에서 다시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확답을 드리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여건이 허락된다면 참석을 고려해보지요.”

불참의사를 부드럽게 돌려 말한 것임을 알아차린 묵영은 아쉬움을 드러냈다.

후공이 말을 이었다.

“그보다 묵 공자.”

“네, 말씀하십시오.”

“약왕문을 떠나는 것이 쉽지 않을 겁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의아해하는 묵영을 향해 후공은 미소를 지었다.

이어 앞으로 발생 가능한 상황들에 대해 말하고 또 당부했다.

***

묵영이 떠나겠다는 의사를 약왕문에 고하니, 약왕문은 당혹을 금치 못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보고를 받은 부문주 용화운이 노를 발했다.

용화청이 난감해하며 상황을 전했다.

“이중의뢰가 불쾌하다며, 더 이상 머물 뜻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또한 천화서고 대공자와 독대하고 나온 후 묵공자의 표정이 얼음장 같았습니다.”

용화청의 생각에 두 천재가 만나 힘을 합칠 것이라는 행복한 기대 같은 건 그저 일말의 희망 정도였다. 세상 일이 어디 그리 만만하던가. 하지만 최소 서로가 서로에게 자극제가 될 수는 있다고 생각했거늘,

묵 공자의 선언은 예상을 뛰어넘는 최악의 결과였다.

“안에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들은 것이 있느냐?”

“워낙 소란스럽고 거리가 먼 탓에, 대화를 듣는 건 무리였습니다.”

부문주 용화운이 미간을 좁혔다.

그의 뇌리로 의심이 스멀거리며 피어났다.

심경 변화가 지나칠 정도로 갑작스럽지 않은가.

‘얼음장 같은 얼굴이었다고? 표정을 꾸미는 것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 하지만 만약 이것이 의도된 것이라면…….’

“이중의뢰인 걸 알아낸 것이 누구냐?”

“난화서원입니다.”

“천화서고 대공자를 만나겠다는 말을 꺼낸 건 또 누구고?”

“역시 난화서원……입니다…….”

대답하는 중에 용화청의 눈이 점점 커져갔다.

형님이 이미 서로 간에 다 아는 사실을 왜 다시 묻는지 의아했는데, 말하는 중에 이해된 탓이었다.

부문주가 입을 열었다.

“만남을 먼저 제안한 자가 이중의뢰가 불쾌하다며 떠나겠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이는 그저 난화서원이 본문을 빠져나갈 구실을 만든 것일 뿐.”

“이미 난화서원 쪽은 문서해독을 마친 것이겠군요.”

“다른 이유가 있을 리가.”

“하아…….”

용화청이 탄식을 토해냈다.

암호문서는 약왕문주인 아버지가 정신착란 상태에서 남긴 보물에 관한 것이다.

자신들은 아직까지 그 보물이 무엇인지 모른다.

하지만 아버지가 사람과 장소를 구별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자신의 보물을 찾아야 한다며 소리쳤기에 어떤 형태의 것이든, 무엇이든 반드시 그것을 찾아야 했다.

보물은 외부에 남겨진 어떤 것일 수도, 아니면 아버지의 새로운 깨달음에 의한 특별한 약제의 비방일 수도 있었다.

아버지의 정신이 돌아오면 간단히 해결되는 일이나, 현재로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일.

어느 날은 형님을 향해 ‘형씨’라고 부르고, 다른 날은 ‘뭐하는 놈’이냐며 묻기도 하는 지경인 것이다.

용화청 자신은 주로 ‘어린놈아’라고 불렸고, 가끔은 그도 ‘형씨’가 되곤 했다. 이곳이 어디냐며 집에 가야 한다고 하기도 했다가,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마치 누가 있는 것처럼 대화를 나누기도 하신다.

대화 상대는 이미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되었다가 다른 날은 후공이 되기도 했고, 무림맹의 십객 중 몇몇, 또 어느샌가는 장강용왕이나 천잠노조가 되기도 했다.

‘만약 난화서원이 문서해독을 마친 것이라면, 묵 공자는 보물의 정보를 지닌 채 떠나는 것이 된다.’

그때 부문주의 음성이 서늘하게 흘러나왔다.

“놈이 이미 떠났느냐?”

“아직 채비 중입니다. 제가 배웅하기로 했습니다.”

“배웅을 마친 후 은밀히 따라 붙어 그를 사로잡아라.”

“네.”

“놓쳐선 안 된다. 반드시 놈을 잡아, 험악하게 다뤄서라도 입을 열게 해야 한다.”

“염려 마십시오.”

**

이후,

용화청이 돌아온 건 두 시진(4시간)이나 지나서였다.

생각보다 늦어 내심 염려하고 있던 부문주는 용화청을 보자마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잘못됐구나.’

어찌된 일인지 돌아온 용화청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설마 놓친 것이냐?”

대답을 굳이 듣지 않아도 될 정도로 결과가 뻔히 보이는 얼굴. 하지만 그가 정작 의아한 점은 어찌 놓칠 수 있느냐였다.

용화청이 입을 열었다.

“놓아……주었습니다.”

“놓아주었다니?”

“…….”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냐!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줄이나 알고 말하는 것이냔 말이다!”

대노하여 소리친 외침이 얼마나 컸던지, 방 안의 가구며 집기들이 흔들릴 지경이었다.

“똑바로 고하거라. 너와 광무경천대가 함께했으니 분화십창이 상대할 수 있었을 리 만무하지 않느냐!”

광무경천대는 약왕문 최정예 무력대다.

분화십창이 간단한 상대는 아니긴 해도, 광무경천대에게 위화감을 줄 수준은 아니다.

“떠나는 길에 항마삼협과 무산쌍웅이 묵공자를 호위했습니다.”

“누, 누구라고?”

부문주가 더듬거렸다. 바로 알아듣기 힘들었다.

“항마삼협과 무산쌍웅이 묵공자의 마차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

부문주는 머리가 얼얼했다.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가격당한 느낌.

천공단이 왜 묵공자를 호위한단 말인가?

서로 좋은 감정일 리가 없을 터인데.

왜?

번뜩 하나의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설마 우리와 같은 생각?’

천공단이 호위를 핑계삼아 묵공자를 노리고 따라가 문서해독 결과를 얻으려 한 것이라면 말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라면 다시 다른 의문이 따라온다.

용화청의 말은 ‘놓아주었다’였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항마와 무산은 묵공자의 마차를 한 시진(2시간) 넘게 그저 따라가기만 했습니다. 그러곤 마차가 멈춘 뒤 간단히 인사를 나눈 다음 돌아섰습니다.”

“…….”

“항마와 무산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몰래 뒤따르던 저희 쪽으로 오더니 이만 돌아가자고 말했습니다.”

“왜?”

“그걸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함께 돌아왔단 말이냐?”

“네. 죄……죄송합니다.”

“허…….”

부문주가 바싹 당겨 앉아있던 중에 털썩 등을 의자에 기댔다. 왜 아우가 놓아주었다라는 표현을 썼는지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자신이라도 함께 돌아왔으리라.

항마삼협과 무산쌍웅이 묵공자를 해한 것도 아니고 뭔가를 캐내려한 것도 아닌 상황에서 이미 예상은 빗나갔다. 그저 말 그대로 순수한 호위가 아닌가. 왜 나섰냐며 항마와 무산을 윽박지르기도 애매한 데다, 칼부림을 벌여도 승산이 없다.

‘정녕 기이하구나.’

부문주는 한 사람이 절로 떠올랐다.

- 천화서고 대공자.

그가 모두의 배후인가.

소란과 어지러움이 난무한데,

그 안에 어떤 정연함이 이어진다. 그것이 엿보인다.

오늘 일이 그렇다.

묵공자를 호위한 건 엄밀히 말해 천공단이 아니다. 천화서고 대공자가 호위했다고 봐야 했다.

항마삼협과 무산쌍웅이 상관도 없는 이의 호위에 선의를 가지고 나설 인물들인가. 그것도 한 시진이 넘는 수고를 무릅쓰고?

대공자의 요청이 없었다면 움직이지 않았을 터.

이는 대공자가 천공단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음을 방증함과 동시에, 이미 약왕문이 어떤 생각과 행동을 할 것인지 예측하고 있었음을 의미했다.

‘설마 난화서원이 떠난 것도 대공자의 의중이란 말인가?’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그리고,

그 너머가 어렴풋하게 보일 듯 말 듯했다.

머릿속에서 여태까지 일어난 일련의 상황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대공자와 천잠과의 갈등, 멧돼지 사냥, 그 외 소소한 소란 등을 따로 빼내 쳐냈다. 그다음 중요 줄기만을 연결해가니, 부문주는 그동안 아리송하게 여겼던 부분들이 조금 이해될 것도 같았다.

물론 마지막에는 또 다른 의문으로 막힌다.

대공자가 무슨 이유로? 라는 갸웃함.

‘그가…… 장서각에 들어간다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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