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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화 서고 대공자-73화 (73/460)

73화. 월토기 (2)

한편 부리나케 달려간 용화청은 부문주 앞에 이르러 숨도 제대로 고르지 못하고 소리쳤다.

“형님, 큰일입니다! 대공자가 본문의 보물을 빼돌리려 합니다!”

“진정해라. 앞뒤 다 자르고 난데없이 무슨 말이냐!”

부문주가 나직이 꾸짖었다.

용화청은 즉시 경망스런 태도를 바로잡았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대처할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님을 상기했다.

“죄송합니다. 너무 충격적인 내용이라서 경거망동하였습니다.”

“말해 보거라.”

“대공자는 문서해독을 이미 끝냈고, 장서각에 들어가고자 했던 이유인즉 보물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부문주가 미간을 찡그렸다.

“출처는?”

“천공단입니다.”

“천공단?”

“네, 대공자의 의도를 간파한 천공단은 겉으로는 동조하는 척했으나 실은 때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용화청은 금적선생이 은밀히 보내왔던 전음이며 천공단의 분위기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했다.

“흐음……. 그렇게 된 것이었나.”

부문주가 침음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게 된 것인가.

대충 돌아가는 사정을 알 것 같았는데, 아우의 말을 듣고 보니 이제 선명해졌다.

“문서해독에 장서각이라……. 대공자가 생각보다 훨씬 뛰어난 자로구나.”

“네, 3일 만에 문서를 해독했으니 그의 천재성은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래, 놀라운 자다.”

부문주는 거의 대부분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토록 뛰어난 천재가 의중을 간파당할 리가…….’

무슨 수로 천공단이 속마음을 알 수 있단 말인가. 머리를 강제로 열어본다 해도 머릿속에 쓰여 있는 것도 아니니 읽어낼 수도 없는 일.

천공단이 그 사실을 알았다는 건,

대공자가 직접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는 의미.

“하지만 형님, 그가 천재적인 두뇌를 지녔다곤 하나, 동시에 간교하고 음험함이 말로 할 수 없는 자입니다.”

“흠……. 그렇구나.”

부문주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도 천공단이 있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멧돼지를 잡은 것도 모두 허술하게 보이려는 의도였다니, 저는 많이 놀랐습니다.”

“그래, 고맙고 다행스런 일이다.”

부문주는 턱을 매만졌다.

천공단이 아우에게 거짓정보를 흘린 건?

‘그저 유희일 테지.’

멧돼지를 잡은 것과 같은 맥락일 터.

만약 대공자와 천공단이 틀어졌던 거라면?

‘진작에 난투극이다.’

천공단의 면면,

그 성향은 차분히 때를 기다려 기회를 노릴 만큼의 인내심이 없다.

그저…….

천공단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충실히 대공자의 뜻을 따르고 있을 뿐.

그리고,

대공자에게서 느껴지는 건 따뜻한 호의.

난화서원의 묵공자를 호위하여 약왕문이 실수할 뻔한 상황을 막아주었을 뿐 아니라, 장서각에 들어가 아버지의 보물을 찾아주려 한다.

문서를 해독해냈으니 탐낼 만도 한데…….

패악을 의심할 만도 한데,

천공단을 선동할 법도 한데,

그런 것도 없이…….

‘그가 왜?’

의문이 따라온다.

그건 직접 들어봐야 알 수 있을 듯싶다.

부문주는 아우를 지그시 바라봤다.

아우의 눈은 피곤에 지쳐 충혈되고 눈밑이 검어져있다. 아우에게 있어 오늘 하루는 길고도 힘겨운 날. 그러니 알아차릴 수 없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리저리 휩쓸려 경황이 없는 하루인 것이다.

“화청.”

“네, 말씀하십시오.”

“수고가 많았다. 이제 드디어 끝이 보이는구나. 칠흑 같던 암호문서도, 아버지의 보물도.”

“네, 드디어입니다. 또한 대공자 놈의 당황해하는 얼굴도 보게 될 테지요.”

부문주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럴 테지. 너의 공이 크다.”

“부끄럽습니다.”

“아니다. 잘해주었다.”

“감사합니다.”

용화청이 머리를 숙였다.

“대공자가 나오는 때가 자정쯤이라고 했느냐?”

“네.”

“장로들과 각주들을 소집해라. 그들에게 이야기를 전하고 모두 함께 갈 것이다.”

“네!”

***

그 시각,

장서각에 든 후공은 크게 한 바퀴 둘러보고 있었다.

서각의 내부 규모는 넓었다.

거의 삼백 평 가량.

천장은 높았고, 사방 벽면이 책장이었다. 또 중간 중간 책장이 놓여 있어 통로는 책장 사이를 지나야 했다.

후공은 둘러보며 먼저 진법 여부를 살폈다.

자령안을 시전.

기의 반응을 관찰했다.

진법은 기운의 조합.

음양을 기본으로 오행을 조화시켜 기운을 생성한다. 세부적으로는 방위와 토양, 거기에 계절의 영향까지 더해지면 더욱 다양한 양상으로 묘용이 나타나게 된다.

그 가운데 생과 사가 있고, 허상과 실체가 있으며, 그림자와 빛의 영역도 나뉜다.

‘암진(暗陣) 계열이군.’

일부 지점에서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반응을 볼 수 있었다. 벽의 사방 모서리에서 천장의 중심부, 그리고 좌측 책장의 하단부까지 연결되었다.

설치된 진법은 이 층으로 향하는 길을 환영으로 감추는 용도일 뿐이었다.

예전이라면 자령안으로 감지는 할 수 있을지언정 진법의 특성을 파악할 수는 없었을 테지만, 현재 이 두뇌는 어렵지 않게 답을 찾아냈다.

‘자, 그럼 보물이 뭔지 보자꾸나.’

금공단보다 더 대단하다는 보물.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고 했다. 취할 마음은 없으나 후공으로서도 호기심이 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책장의 서책들은 잘 관리되어 있었다.

정돈 상태가 최상이다.

또한 이미 예상했던 대로 각 책장의 아래쪽에는 꽂혀 있는 서책의 번호가 각인되어 있었다.

<달빛 아래 약제실의 그림자가 가리키는 곳. 그곳에서 일(一) 그리고 삼백칠십오(三百七十五)>

번호를 따라 걸었다.

‘이백삼십…… 이백 오십구…… 삼백육십칠…….’

이내 후공은 삼백칠십오라는 표기를 찾았다.

바로 서책을 꺼내들었다.

겉면에 ‘월토기(月兎記)’라는 글자가 크게 보였다.

‘응?’

월토기.

달토끼 이야기라고?

제목도 제목인데, 후공이 의아해한 건 그림이었다.

두 마리의 토끼 그림.

심지어 토끼들은 방망이를 들고 방아를 찧고 있는데, 세밀한 화풍이 아닌 대강의 형상으로 귀엽게 그려져 있었다.

잘못 찾았나 싶어 책장의 번호를 다시 확인했다. 맞다.

다른 책과 바뀐 건가?

부근의 책들을 꺼내 살폈다.

하지만 주변 책들은 모조리 약초와 식물에 대한 책자들이었다.

무엇보다 주변 책자들은 앞면에 책장 번호와 일치하는 번호가 표기되어 있었다.

오직 월토기 책자에만 번호가 없고, 책장 번호만 삼백칠십오.

제대로 찾은 듯한데 토끼라니.

‘선입견일지도.’

그렇다.

토끼면 어떻고, 호랑이면 어떤가.

중요한 건 내용이다.

후공은 선입견을 떨쳐내고 자리에 앉아 서책을 펼쳤다.

첫 문장은,

<옛날 옛적에 달나라에 형제 토끼가 살고 있었답니다>

“…….”

떨쳐냈던 선입견이 신속하게 돌아왔다.

‘정녕…… 동화책이냐?’

그림을 보고 설마했건만, 첫 문장에서 옛날 옛적과 달나라가 나와버리면 동공이 흔들리는 걸 막을 방도는 없다.

월토기는 달나라에 사는 두 토끼 이야기.

후공은 입술이 말라갔다.

장서각에 들어온 건 보물을 찾아주겠노라 호언장담을 한 것과 다름없거늘…….

다시 월토기에 시선을 던졌다.

아직 희망을 버리기엔 월토기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인 것이다.

<형 토끼와 아우 토끼.

두 토끼에겐 매일 매일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건 해님이 집으로 돌아가면 시작되었어요. 해님이 안녕, 하고 인사한 뒤 캄캄한 밤이 찾아오면 시작되었어요.

해님이 깨어나는 아침이 될 때까지 방아를 찧는 것이었답니다. 매일 매일, 매일, 매일.>

“…….”

읽어갈수록 희망이 사라져갔다.

반복되는 단어만 봐도 영락없이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 책.

<그래야만 달은 빛을 낼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방아를 찧을 때마다 달은 힘을 낼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혹시나 이것조차 암호일지도 모른다 싶어 집중해 봤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방망이를 들고 형이 한 번, 그다음 아우가 한 번. 쿵떡, 쿵떡, 쿵떡.>

“…….”

<쿵떡, 쿵떡. 방망이는 무거웠고, 절대로 멈춰서는 안 되었답니다>

‘쿵떡이 너무 많아. 이렇게 아침까지 절구질만 해서야…….’

<그러던 어느 날, 아우 토끼는 궁금했어요.

왜 달은 꼭 빛나야 하지? 매일 매일 쿵떡 쿵떡 힘들기만 해.>

‘흠, 그렇긴 하지.’

후공도 고개를 끄덕였다.

<형 토끼가 대답했어요. 동생아, 저길 봐.

어디? 쿵떡, 쿵떡.

대화중에도 두 형제의 손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저기 말이야. 달을 보면서 소원을 비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

응, 보여.>

“…….”

<잘 들어봐.

아우 토끼가 귀를 쫑긋 세웠습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어요. 누구는 집안에 아픈 사람이 있나 봐요. 저 달이 밝게 비추면 좋겠어. 그럼 건강해질 수 있을 거야.

누구는 사랑을 노래했어요.

누군가는 그리워하고, 또 누구는 물끄러미 그저 바라보며 웃음 짓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수천, 수만 명 아니 별처럼 많은 사람들이 매일 밤 달을 보고 있었답니다.>

“…….”

<형, 사람들이 소원을 빌고 있어.

그래, 그러니까 달은 빛나야 하는 거야.

응.>

‘수긍이 빠르네, 이 녀석.’

후공은 피식 웃고 말았다.

아우 녀석이 순진했다.

그러는 사이 이야기는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쿵떡, 쿵떡.

형 토끼와 아우 토끼는 힘든 줄 몰랐답니다.

소원의 목소리를 들으면 힘이 났으니까요.

그리고 다음날이면 소원이 이루어졌다며 사람들이 좋아했으니까요. 사람들의 미소를 보면 또 힘이 났으니까요.

형과 아우가 한 번씩 쿵떡, 쿵떡.

사이좋게 쿵떡, 쿵떡.

그래서 달은 오늘도 밝은 빛을 비추고 있답니다.

달나라에 사는 형 토끼와 아우 토끼가 매일 매일 사이가 좋으니까요.>

이야기는 이렇게 끝나버렸다.

“허허허…….”

금공단보다 더 대단한 보물이 수많은 쿵떡쿵떡과 함께 끝나버렸기에, 후공은 너털거리면서 바쁘게 수염을 쓰다듬다가 허공만 움켜쥐게 되면서 어정쩡하게 손을 내렸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암호해독이 틀린 것일까.

아니, 문서 해독은 정확하다.

이미 교차검증까지 마치지 않았던가. 틀렸다면, 단 하나라도 오류가 있었다면 난화서원의 묵영이 지적했을 것이다.

약제실의 그림자가 가리키는 곳이 장서각이 아닐 가능성은? 없다. 장서각 주변 그리고 뒤쪽에도 다른 건물이 없음은 이미 확인했다.

그렇게 되자 더욱 막막.

나오느니 한숨이라 후공은 길게 숨을 내쉬며 월토기를 덮었다. 그렇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어?”

뒷면의 서명처럼 남겨진 글귀에 후공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의 보물 화운, 화청.>

‘보물이…….’

작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허허…….”

다른 의미로 어이가 없어진 후공은 혹시나 싶어 눈 가까이에 대고 다시 뚫어져라 살폈다. 달라진 건 없었다.

<나의 보물 화운, 화청.>

“허허허…….”

그래서 그런 말이 적혀 있었던 것인가.

그런 것이 가능해? 라고 생각했던 의문.

후공은 문서 내용을 떠올렸다.

- 나 약왕문주.

마음을 보이니, 천하여 들으라.

사람들은 내 필생의 역작을 금공단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다르다.

내 생애 가장 빛나는 역작.

내 생애 가장 위대한 보물은

금공단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과 비할 수 없다.

절대적이며, 특별하고 특별하다.

- 만약 바라보는가.

보는 것만으로 활력을 찾게 되며 생기를 얻게 된다.

만지는가.

희열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냐고 묻는다면,

보물을 보았을 때,

그리고 보물이 내게 미소 지을 때라 할 수 있다.

어린 아들들에게 읽어주었던 월토기.

그날의 보물 같은 시간.

그리고 약왕문주가 아닌 아버지로서,

그의 보물은,

- 화운, 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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