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월토기 (3)
그럼 그렇지.
실수다.
후공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보는 것만으로’라는 말에서 감을 잡았어야 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활력을 찾고 생기를 얻을 수 있는 영약이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약왕문주에게 화운과 화청은 어떤 것보다 더 기운이 나는 영약이었던 모양이다.
후공은 이제 약왕문주의 상태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정신이 제대로 나가버렸구나.’
미치지 않고서야, 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일 테지.
월토기를 가리키는 것이었다면 굳이 난해하게 암호로 남겨야 할 까닭이 없었다. 그저 두 아들에게 책을 읽어준 시간이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말하면 그만이었다.
민망해서? 멋쩍어서?
뭐가 중요한가. 어차피 제정신 아닌걸.
한데 이게 무슨 고생이란 말인가.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난화서원에 천화서고, 그리고 두 아들까지 다 들쑤셔놓았다.
뭐 어찌됐든 보물은 성공적으로 탈취.
자정쯤에 나간다고 했지만 그럴 이유가 사라졌다. 그럴 기분도 아니었다. 암호 속 또 다른 암호를 만날 것을 감안해 시간을 넉넉히 잡아두었을 뿐.
후공은 천장의 한 지점을 바라봤다.
“거기 두 분?”
처음부터 두 감시자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진법의 묘용으로 은신해 있었는데, 감시 임무를 맡은 둘은 자리가 협소한 탓에 여간 불편한 자세를 취한 채로 바라보고 있어 내내 안타깝게 느끼던 후공이었다.
실제 보이기도 했지만, 두 감시자가 놀랐는지 천장 쪽 기운까지 순간 출렁였다.
“……?”
“……??”
천장 진식 너머 흑양과 추백이 화들짝 놀라 서로를 마주봤다.
- 서, 설마…… 우리에게 하는 말인가?
- 그럴 리가.
- 하지만 시선이…….
막연하게 넘겨짚는 것이라기엔 천화서고 대공자의 시선이 정확히 자신들을 향하고 있었다.
“저 때문에 고생하시는 걸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치 않군요. 일다경(15분) 후 나갈 생각이니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일다경을 말한 건 천공단과의 약속 때문.
천공단에게 개수작을 준비할 시간을 주기 위함이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한 놈은 당황 속에 여전히 주시하고 있지만, 다른 한 놈은 이미 보고를 위해 몸을 빼낸 터.
후공은 다시 월토기를 펼쳤다.
천천히 읽어나가면서 시간이 되길 기다렸다.
<형, 사람들이 소원을 빌고 있어.
그래, 그러니까 달은 빛나야 하는 거야.
응.>
피식 웃음이 난다.
수긍이 빠른 아우가 귀여웠다. 알고 다시 봐서 그런지, 이제 아우 토끼가 용화청으로 보였다.
“후후, 쿵떡, 쿵떡.”
책을 덮고 의식을 흘려 바깥 동향을 살폈다.
약왕문의 정예들이 모여들고 있는지 분주한 움직임이 잡혔다. 최대한 기척을 숨기려는 듯 이동이 조심스럽고 기운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들이 꽤 진지했다.
‘총 동원령이라도 내린 것인가.’
어찌된 게 인원이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었다.
현재까지 거의 삼백여 명에 육박.
약왕문의 수뇌부와 정예들만이 아니라 이 정도면 약왕문도들 거의 전부가 모여들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기세면 사백여 명까진 이를 듯했다.
‘이런……. 일이 커지네.’
후공은 미간을 좁히며 월토기를 내려다봤다.
슬그머니 후회가 다시 피어났다.
역시 금적자가 제안할 때 묵살했어야 했나 싶은 후회. 달나라 토끼들 이야기에 이렇게까지 할 건 아니지 않은가.
이내 익숙한 기운들도 감지되었다.
천공단이었다.
약왕문도들과는 달리 살벌한 기세를 유감없이 드러내며 돌아다니더니 장서각 앞쪽 선봉에 도열하고 있었다.
“…….”
후공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이제 밖으로 나가면 저 망나니 같은 천공단이 살벌한 기세를 한순간에 거두고 환영인사를 크게 외치게 된다. 생각만으로도 몸이 오그라들고 민망함에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민망이고 뭐고 이제 와서 되돌릴 수는 없는 일.
역시나,
바깥의 상황은 후공이 짐작한 대로였다.
약왕문은 대대적으로 장서각을 둘러싸고 있었다.
약왕문의 수뇌부.
부문주와 아홉장로들, 그리고 십이 각주가 위치한 가운데 그들 곁으로는 약왕문의 무력대들이 자리 잡았다. 최정예인 광무경천대와 광무철혈대, 광무암전대. 그들 뒤쪽에는 칠십여 명의 궁수대까지 포진하고 있는 형국.
무력대뿐만이 아니었다.
약왕문 내 문사들, 약학연구에 종사하는 이들까지도 굳은 표정으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그 인원은 거의 사백여 명에 육박할 지경이었다.
이러한 광경에 선봉에 선 천공단은,
‘굉장하네!’
‘판이 엄청 커졌구만. 흐흐, 바로 이거지.’
‘재밌구만, 재밌어.’
다들 개수작에 대한 기대에 들떠 있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내는 표정을 엄중히 꾸미는 것은 잊지 않았다.
- 근데 약왕문 쪽에서 형아에게 먼저 공격하면 어떡해요?
소천개가 금적자를 향해 전음을 발했다.
걱정되는 부분은 단 하나 약왕문 쪽의 돌발 상황이었다.
뒤쪽에 멀찌감치 떨어져 있긴 해도 혹시라도 숙련된 궁수들이 활을 연사하기라도 하면 눈 한 번 깜짝할 사이에 수백 발의 비화살이 쏟아질 것이다.
게다가 약왕문 궁수들의 절반이 지닌 활은 강궁이니, 개수작이고 뭐고 호신강기를 두르지 않는 이상 난감한 상황이 될 터였다.
금적자가 보일 듯 말 듯 미소 지었다.
- 걱정마라. 이미 부문주 화운에게 절대 나서지 말라고 말해두었으니. 이 일은 천공단이 마무리 짓겠다고 말이다.
- 그래야 해요. 약왕문 사람들 너무 진지하게 살벌하잖아요.
- 걱정 말래두. 연습한 대로나 잘해라. 어? 단주 나온다.
안쪽의 기척을 느낀 금적자가 천공단을 향해 눈짓했다.
천공단이 안광을 빛내며 기운을 끌어올렸다.
장서각의 문이 열리며 젊은 서생이 걸어나왔다.
순간,
약왕문의 수백의 시선도 서생을 향해 날아들었다.
서생이 걸음을 멈췄다.
서생은 뒷짐을 진 채 쏟아져오는 시선을 무심히 받아냈다.
거의 사백여 명에 이르는 시선이 한 사람을 향하고 그 시선 속에 한 사람이 차분히 둘러보는 모습. 그건 어떻게 봐도 홀로 이 모두와 상대해야 자의 모습이었다.
‘장관이네. 멋지고.’
밖으로 나온 후공은 막상 약왕문도들을 바라보자 그런 감상이 들었다. 수많은 약왕문도들이 하나되어 뜻을 같이하는 모습을 보니 보기 좋았다.
이어 막장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크흠, 이것도 지나가겠지.’
그렇게 자포자기하며 바라본 것이 천공단에겐 신호가 되었다. 찰나간 천공단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라갔다. 그리고 목청을 높이려 할 때였다.
스릉, 스릉!
처억, 처억, 척!
뒤쪽으로부터 도검을 뽑아내는 소리가 척척척거리면서 웅장하게 울려퍼졌다.
“응?”
“뭐여?”
천공단이 놀라 뒤돌아봤다.
약왕문 무력대들이 도검을 빼어들고 높이 추켜세우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궁수들도 활을 재우고 하늘 높이 겨눈 채였다.
“……?”
“왜 그래?”
“야! 이거 아니잖아!”
천공단이 누구 할 것 없이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이, 후공은 미소를 머금었다.
‘토끼 녀석들…….’
그 순간,
거대한 외침이 터져나왔다.
“약왕문이!”
사백여 명에 육박하는 이들이 일제히 외쳤다. ‘약왕문이’라는 말이 크고 길게 밤하늘에 메아리쳤다.
“천화서고 대공자께!”
첫 번째 외침의 메아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이어진 장대한 소리가 덮쳤다.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후공은 수많은 인파 속에서 두 사람을 찾아냈다.
먼저 화청을 찾고, 이어 장로들로 보이는 이들에 둘러싸인 화운을 찾았다. 화운은 못 알아볼 테지만 후공은 알아보았다.
그렇게 바라본 형 토끼와 아우 토끼.
아우 토끼도 크게 외치고 있다.
순진한 아우에게 형 토끼가 설명한 모양이다.
호의를 지니고 있음이라고.
후공은 월토기의 한 구절이 떠올라 절로 웃음이 났다.
<달나라에 사는 형 토끼와 아우 토끼가 매일 매일 사이가 좋으니까요.>
***
다음 날 오전 은약전.
“으하하하, 드디어 나의 보물이 내게 돌아왔구나!”
약왕문주가 웃음을 터뜨렸다.
월토기를 받아든 약왕문주는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탓에 그의 백발이 바람이라도 분 듯 휘날렸다.
약왕문주는 이내 앞에 앉은 두 중년인을 향해 감사를 표했다.
“형씨들, 고맙소! 고마워! 내가 이걸 얼마나 찾았는지 모를 거요. 여기 쓰여 있지 않소. 내 아들들 이름이 말이오.”
“…….”
“…….”
“하하하하, 내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소이다. 하하하, 근데 오늘같이 기쁜 날 형씨들은 왜 우는 것이오? 집안에 슬픈 일이라도 있소?”
화운과 화청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화운은 입술을 깨물었고, 용화청은 소매로 눈가를 훔칠 뿐이었다.
솔직히 은약전에 오기 전까지는 반신반의했다.
지난 밤 천화서고 대공자로부터 월토기를 건네받으면서 적잖이 당황했다. 월토기일 것이라곤 상상조차 못한 터. 비록 책자 마지막에 아버지의 서명이 있다 해도 와닿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늘 엄격하여 한 번도 따뜻한 말이나 애정 어린 표현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훈육은 회초리였고, 실수에는 엄한 질책이 따라왔다.
실제로도 월토기는 겨우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의 기억. 그 기억마저도 가물가물이다. 6살 정도 때부터는 월토기는 구경조차 못했다. 그저 귓가에는 불호령이 떠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지난 밤,
천화서고 대공자에게 월토기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할 뻔했다. 물론 그러진 못했다.
그저 압도당한 나머지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
천화서고 대공자가 암호 해독 내용만이 아닌 암호의 세부 구조까지 상세히 설명하니 그 결과는 어떻게 해도 장서각이요, 또 월토기인 것이다.
덕분에 밤새 한숨도 청하지 못했다.
그렇게 아침이 오기만을 기다려 은약전으로 달려 아버지께 월토기를 건넸거늘, 눈앞에서 보물임이 확인된 것이다.
한 번도 칭찬받은 적이 없었고, 쓸모없는 녀석들이라는 말만 하셨는데 아버지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자신들이 늘 보물이었던 모양이다.
오늘도 자신들을 못 알아보고 ‘형씨’로 불리고 있지만, 그래서 더 진심임이 와닿으니 웃어야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일이었다.
“형씨들, 근데 이것을 어디서 찾은 거요?”
애써 마음을 추스르며 화운이 답했다.
“운이 좋았습니다. 지나는 길에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이 책자는 어르신께서 직접 지으신 겁니까?”
약왕문주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다오. 내가 지었어. 우리 애들은 늘 이것만 읽어달라고 떼를 쓴다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오.”
“어르신께선 언제 가장 행복하셨습니까?”
“행복이라…….”
약왕문주의 눈이 아련해졌다.
“……내 아들들. 화운, 화청을 바라볼 때. 녀석들이 내게 미소 지을 때.”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냐고 묻는다면,
보물을 보았을 때,
그리고 보물이 내게 미소 지을 때라 할 수 있다.>
문서 내용이 떠올라,
화운과 화청의 눈가는 어느새 다시금 촉촉이 젖어 들어갔다.
천화서고 대공자가 해독해준 내용 그대로.
자신들이 보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