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75화 (75/460)

75화. 삼악 그리고 만향 (1)

“형님, 혹시 천화서고 대공자가 독양충을 원하는 것이 삼악을 이루려는 것은 아닐는지요?”

은약전에서 나와 잠시 숨을 돌린 오후 나절,

화청이 물었다.

독양충은 이제 대공자의 몫.

상대가 방대한 지식의 천화서고이니 삼악을 모를 리 만무했다. 그러다 보니 혹여 독양충을 원하는 이유가 삼악에 근접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삼악(三惡)이란,

영악초와 육각망, 그리고 독양충.

한데 천화서고 대공자는 이 중에서 오직 독양충 하나만을 원했으니, 이미 영악초와 육각망을 확보했거나 혹은 그 둘을 흡수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글쎄다. 그는 알다가도 모르겠으니.”

“네, 괴이한 자입니다.”

화청도 같은 생각이었다.

대공자는 알면 알수록 기이한 느낌이다.

얕아 보인다 싶으면 깊고, 생각이 없는 듯 느려 보이나 이미 어느샌가 그곳에 가 있고, 놀라움에 경탄하고 있노라면 그보다 더 큰 놀라움을 선사한다.

처음 만났을 때는 특별해 보이지 않았건만, 지금은 다르다.

단지 천재적인 문서해독 능력과 상황을 해결해가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지난밤의 모습은 그야말로 충격.

장서각 앞.

엄청난 함성 속에서 약왕문의 뭇 군중들을 둘러보며 미소 짓던 모습은 아직까지 뇌리에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분명 당혹스러워할 것이라고 생각했건만.

그 태연함이란.

수많은 인파와 거대한 함성 속에서도 동요함이 없이 마치 태산처럼, 또는 흐르는 구름처럼 굳건하면서도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레 그는 그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만약 그라면 이미 이악에 이르렀을지도…….”

화운이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게 되는 것이었습니까?”

“물론 일악에 이르는 것도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긴 하다. 심지어 육각망은 본문조차 확보하지 못한 영물이 아니냐.”

약왕문이 보유한 건 독양충과 영악초까지다.

육각망은 구해보려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결국 찾지 못하였고, 그 결과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고 포기했을 정도.

하지만 정작 삼악에 있어 난제는 육각망이 아니다.

육각망까지 확보했다 해도 그것들을 체내에 받아들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다.

누구나 복용할 수는 있으나 어느 누구도 체화하지 못한다.

강한 의지를 품고 복용했다 해도 의지와 별개로 구토가 일어나며, 구토를 억눌렀다 해도 흡수되는 과정에서 체내 역전(逆轉)반응으로 도리어 경맥에 해를 입는다. 물론 그 전에 대다수는 시작도 하기 전에 악취에 질려버리지만.

약왕문 역대로도 영악초조차 성공한 이가 없으며, 화운과 화청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런 탓에 삼악의 영초나 영물의 활용은 극히 미세한 양만을 따로 첨부하는 식으로 특이한 해독제를 제조하는 데 쓰이거나 다른 약재와 혼합하여 기운을 북돋는 데 활용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형님, 만약 대공자가 삼악에 이른다면 만향(萬香)의 일주는 다룰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겠지. 삼악에 이른다면야. 너는 만향지서(萬香之書)를 대공자에게 주고 싶은가 보구나.”

화운이 미소 지으며 의외라는 듯 바라봤다.

화청이 겸연쩍어했다.

“대공자에게 호감이 있다기보단…… 비록 칠주 중 일주라도 만향이 세상에 피어나는 것을 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일주가 피어날 순 있겠지. 하지만 만향지서는 위험하다. 반드시 그를 해칠 것이다.”

“일부만 남아서입니까?”

“그렇지.”

화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만향존자의 만향칠주 중 남겨진 건 고작 일주. 삼악에 이르러 일주에 도달한다면 아예 칠주를 완성하고 싶어질 것이다. 그것이 사람의 마음이지. 무학의 이치에 통달하지 않고서는 필연코 잘못된 길로 나아가게 될 것이고, 그 결과 크게 화를 입게 될 테지.”

“……네.”

화청도 수긍했다.

주화입마는 멀리 있지 않다. 뛰어난 절학에 다가갈수록 한 번의 잘못된 선택이 비참한 말로를 초대한다. 약왕이라 불린 아버지가 약초의 배합으로 이미 크게 해를 입기도 하였고.

형님의 뜻은 대공자를 염려함인 것이다.

애초에 모르면 호기심이나 과욕은 생겨날 수조차 없다.

화운이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삼악이 될 리가. 우리가 괜히 앞서가는 것일 테지. 나는 곧바로 대공자를 만나러 가겠다. 화청, 너는 독양충을 준비해 놓도록 해라.”

“네.”

***

부문주 용화운은 동행 없이 홀로 별채를 찾았다.

그저 함께한 건 존중과 감사의 마음뿐.

별채는 예상과 달리 고요했고, 뜨락에는 시녀 차림의 젊은 여인만이 장작불을 정리하고 있었다.

화운이 다가가 말을 건넸다.

“약왕문 부문주입니다. 모두들 안에 계십니까?”

“아! 안녕하세요. 공자님께선 안에 계시고, 천공단분들은 지금 잠시 자리를 비웠습니다.”

“어디 가신 겁니까?”

화운이 미간을 좁혔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천공단이다. 혹여 또 무슨 일을 벌이는 것은 아닌가 괜히 마음이 쓰였다.

“다들 꿩 잡으러 가셨어요.”

“…….”

화운은 맥이 빠져 입을 쓰게 다셨다.

오늘은 꿩인가. 멧돼지를 잡았다더니만 천공단의 부지런함에는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때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송화야, 안으로 모셔라.”

“네, 공자님.”

이내 화운은 천화서고 대공자와 마주했다.

둘 사이에 뜨거운 찻잔이 놓였다.

김이 모락거리는 중에 화운이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천공단분들은 늘 바쁘십니다.”

“허허…… 그러게 말입니다. 왜 꿩인지 저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건 부지런한 정도가 아니라, 한가하면 죽는 병이라도 걸린 것 같습니다.”

“하하, 그럴 리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치료약이 나오지 않는 이상 천공단은 계속 바쁠 겁니다.”

화운은 웃긴 했지만 내심 놀랐다. 농담인데도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이자는 모든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은 것인가.’

농담 속에는 그 사람의 기본적인 정서가 담겨 있기 마련인데, 대공자의 말투를 들어보면 이자는 천공단을 말 안 듣는 오래된 수하 대하듯 하고 있는 것이다.

천공단은 연배나 강호의 연륜으로도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이들이거늘, 이 정도면 거의 잡놈들 취급이다.

단지 천재라서?

모르겠다.

확실한 건, 간밤 장서각 앞에서 모두에게 보인 미소에서도 드러났듯 대공자의 관조는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찾아뵌 것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자 함입니다.”

“…….”

“아버님께서 월토기를 보신 후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모두 대공자께서 길을 열어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어찌 이 은혜를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은혜라는 말씀은 과하군요. 괜히 소란을 피운 것이 아닌가 하여 죄송할 따름입니다.”

화운이 양쪽 입가를 올렸다.

보통 소란이 아니긴 했다. 약왕문을 들었다 놨다 했으니. 하지만 그조차 고마운 일이었다.

“솔직히 대공자와 천공단 덕분에 본문에 생기가 돕니다. 내내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어제 일로 많이 살아났습니다.”

“좋게 봐주시니 감사드립니다.”

후공으로선 기특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라고 한 일인데, 화운이 영리하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으니 흡족했다.

‘역시 형 토끼로군.’

월토기대로다.

화청보다 화운은 확실히 어른스럽고 상황 파악에 능하다.

“그럼 이제 약왕문주께서 속히 쾌차하시는 일만 남았군요.”

“물론입니다. 여러 방면으로 길을 찾아보고 있으니, 조만간 방법이 나올 테지요.”

후공이 지그시 바라봤다.

“부문주.”

“네, 말씀하십시오.”

“그 여러 방면 중에 하나의 방편으로 제가 도움을 드릴까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네?”

화운이 놀라 눈이 커졌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을 터. 후공은 송화를 불러 이미 책자화 해둔 쇄금현침진을 가져오게 했다.

“살펴보십시오.”

“이, 이건…….”

화운은 책자를 펼쳐본 순간 보이는 여러 도해들과 주석들을 통해 바로 알아보았다.

“……진식이 아닙니까?”

“무너진 의식과 부조화를 붙들어주는 진법입니다. 쇄금현침진이라 칭하는데, 저 또한 의식을 회복하는 데 있어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천화서고 대공자가 정신이 황폐화되어 폐인이 되었다는 건 알 만한 사람은 아는 사실. 후공이 각색해서 말하긴 했어도 진법의 효능만은 틀림없는 것이었다.

화운은 놀라움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어찌 이 귀한 것을…….”

“쇄금현침진은 정기신 중 신(神)에 관여합니다. 정과 기는 귀문의 힘으로 충분히 북돋울 수 있을 터, 신만 보완한다면 반년 정도면 회복도 무리는 아닐 겁니다.”

“아…….”

화운이 어찌 정기신을 모르겠는가.

사람에게 있어 세 가지 보물이라 칭하는 것이 바로 '정(精)' 과 '기(氣)'와 '신(神)'이다. 정은 쉽게 말해 육체의 구성. 기는 정을 돌보는 기운이요, 원기. 신은 정신이요, 의식이며 마음이다.

정으로서 사람은 현실에 존재하고,

기로서 활동하며, 신으로서 무의식과 의식 속에 생의 의미와 방향성을 지니며 살아간다.

하지만 의문도 따라왔다.

고마움과는 별개로 솟구치는 의아함.

그의 시선이 쇄금현침진으로 향했다.

‘도대체 어떻게 본문의 사정을 미리 알고 아버지를 위한 최적의 진법서를 가져왔단 말인가?’

철저히 비밀에 붙였으며 외부에는 폐관으로 알렸을 뿐이었다.

그 의도가 독양충과 교환하고자 했다고 해도, 역시나 정확히 필요한 진법을 택한 건 공교롭기 짝이 없었다.

후공은 화운의 시선이 닿아 있는 곳을 보며 의문을 알아차렸다. 화운 입장에선 충분히 의문이 날 법한 상황이었다.

“의아해하실 것 없습니다. 미리 알고 있었던 것도, 본 서고에서 가져온 것도 아닙니다.”

“……네?”

“요 며칠 이곳에서 작성했습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고작 오늘로 나흘이다.

첫날 암호해독을 끝내고 바로 작성했다고 해도 빠듯하다.

아니, 그전에 이 방대하고 세부적인 수식과 주해까지 전부 외우고 다닌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이 내용 전부를 말입니까?”

“부문주, 그리 놀랄 일은 아닙니다. 저는 물론이고 아둔한 제 아우들도 이 정도는 합니다. 앉은 자리에서 몇 개라도 써내려갈 수 있습니다. 난화서원의 묵공자도 직접 만나보니 재능이 비범해 다르지 않겠더군요.”

“…….”

화운은 그저 멍하니 눈만 깜박였다.

첫날 울려퍼진 피리 음률. 그 음률에 취하게 하여 본문의 상황을 파악했다는 것까지는 짐작했다.

하지만 대공자가 그 시점부터 아버지에게 도움이 될 만한 진식을 작성하기 시작했다는 건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던 부분이다.

하지만 그 외에는 설명될 수 없다.

화운은 경외에 차 바라보았다.

대공자는 모든 상황의 배후였다. 천공단을 멋대로 주무르는 것도 충분히 놀라운데, 쇄금현침진에 이르러선 말문이 턱 막혔다.

또 이토록 놀라운 호의를 보이면서도 대공자의 태도는 잡담하듯 술렁술렁 아무 일도 아니란 식이니, 더 기가 막혔다.

하지만 넋만 놓고 있을 순 없는 노릇.

의문은 아직 남아 있다.

“대공자, 무슨 연유로 본문에 이리 호의를 베푸는 것입니까?”

암호해독에 이은 아버지의 보물을 찾아준 것도 감사한 일이나, 진식은 그 이상이었다.

문서를 해독한다고, 월토기를 찾았다고 해서 아버지가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진식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었다.

또한 하나의 진법체계는 그 가치가 이루 형용할 수 없다. 게다가 이것은 천화서고의 진법, 또 신을 다루고 있으니 이는 하나의 절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것은 대대로 약왕문의 자산이 될 테고, 다양한 양상으로 활용도 가능하다. 재물이 많다 하여 무공절학을 구할 수 없는 것처럼 진법도 마찬가지이건만, 이걸 선뜻 내놓은 것은 기쁘면서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후공이 미소를 머금었다.

내가 본래 무림맹주 후공이요, 네 아버지와도 인연이 있었으며 아꼈었노라 말할 수는 없는 일.

“호의라……. 뭔가 크게 착각을 하고 계시는 듯하군요.”

약왕문에 넘치는 것이 약이다.

또 쇄금현침진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후공으로선 그저 베풀 생각은 없었다.

적당히 상대에게 보답할 기회를 주는 것도 배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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