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은약 그리고 목련
지하 석실 부근.
달빛 아래 밤이 무르익었다.
그곳에서,
“오늘도 아닌 모양입니다.”
“기척은?”
“오전에 잠깐 뼈마디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가, 이후엔 쥐죽은 듯 고요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흐음…….”
아우의 대답에 부문주 화운은 침음성을 흘렸다.
천화서고 대공자가 석실에 들어간 지도 오늘로 7일째다. 늦어도 3일이라는 말을 남겼던 터라 이제나 저제나 나오길 기다렸건만 감감무소식이었다.
보고가 오길 기다리다 안 되겠다 싶어 이 밤에 직접 나와 본 것인데, 슬슬 불안해졌다.
벽곡단은 넉넉히 한 달 분량이 내부에 비치되어 있지만, 식사가 문제가 아니다. 혹여라도 삼악을 이루는 중에 예기치 못한 상황에 놓여 있는 건 아닐까? 그런 걱정이 든다.
그렇다고 들어가 확인하는 것도 망설여졌다.
만약 어떤 고비를 넘기는 시점이라면 최대한 간섭이 일지 않게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후우…….”
화운은 절로 한숨이 났다.
‘하나가 해결되니 또 다른 걱정이 빈자리를 채우는구나. 뼈마디 소리는 또 무엇이고…….’
사흘 전 천잠육도가 해결되었다. 뜻하지 않게 혹을 떼었다 싶었거늘, 별일 없을 줄 알았던 대공자가 심기를 괴롭힐 줄이야.
‘어찌한다…….’
그렇게 화운과 화청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할 때였다.
그르르릉…….
“어?”
“허?”
지하 석실의 석문이 열리는 소리.
화운과 화청의 안색이 밝아졌다.
“대공자가 드디어 나…….”
말을 끝맺기도 전,
휘이잉~
한줄기 바람이 두 사람에게 불어닥쳤다. 그리고 어느샌가 둘의 눈앞에는 한 청년이 고요한 신색으로 서 있었다.
“어…….”
“대, 대공자?”
화운과 화청이 놀라 눈이 커졌다.
반가운 마음 한편으로, 천화서고 대공자의 신법이 이처럼 신묘할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저 바람이 인다 싶었거늘 한순간 눈앞이었다.
방금 막 석문이 열렸다.
또 지하석실까지의 계단은 깊고 나선 형태로 돌아든다. 그럼에도 천화서고 대공자는 순식간에 나타나, 바로 앞에서 잔상이 선명해져 가며 미소 짓고 있는 것이다.
당황한 나머지 화운과 화청이 주춤 두어 걸음 물러나기까지 했다.
후공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예를 갖췄다.
“예정보다 늦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두 분은 나와 계신 겁니까? 설마 저를 기다리고 계셨던 겁니까?”
시일을 지체한 건 천향오주의 정립에 많은 시간이 소요된 탓이었다. 비록 시전 가능한 영역은 천향이주까지였으나 오주까지의 정립은 해두어야 했고, 또 활용 가능하도록 기본 숙련의 시간을 가졌다. 거기까지가 어제.
그리고 오늘 하루는 무학의 성취를 점검했다.
축골의 공능인 교릉은 이제 찰나에 가깝게 즉각적인 변화를 보인다. 삼대호신기인 전혈과 허운, 통격 또한 효용 범위가 넓어졌다.
전혈은 의식과의 간극이 사라져, 의식하고 떠올리는 즉시 혈도의 위치는 바뀐다. 전조로 나타나던 흰자위까지 검게 물들어가는 묵화현상은 이제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허운의 반탄과 풍익은 권장법과 어우러져 펼침에 무리가 없었다. 통격 또한 기를 관통시키며 전이하는 공능이 대폭 향상되었다.
그뿐 아니라 안법인 자령안도 이전에 비해 크게 상승해, 더 이상 어둠은 어둠이 아니었다. 그 외 내력의 상승으로 신법은 물론이고 검기를 다루고 발출함에도 무리가 없었다.
비록 신검 ‘령’과의 검연은 아직 이루지 못했으나, 이는 크게 기대했던 바는 아니었다.
“기, 기다린 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만…….”
화운과 화청이 얼떨떨해했다.
둘은 천공단을 통해 대공자의 무위에 대해선 듣긴 했다. 홀로 특급 살수 넷을 순식간에 처리했다는 이야기.
검의 조예와 신법이 뛰어날 뿐 아니라, 무엇보다 상황 대처의 유연함은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는 것이 천공단의 설명이었다.
그래도 반신반의했다.
말한 이들이 천공단인 것이다.
과장이 섞여 있거나 생략된 부분이 있을 것이라며 신뢰하지 않았다. 하지만 방금 보인 신법을 보니,
‘도리어 천공단은 제대로 표현을 다 못한 것이 아닌가.’
천공단이 과소평가하고 있다 싶을 정도.
또 이런 무위라면 천공단을 휘어잡은 것이 단지 사람의 그릇의 크기 때문만은 아니다 싶었다.
그러나 곧바로 화운과 화청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아…….’
‘독양충은 결국 실패한 건가?’
자신의 일도 아닌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대공자, 삼악은 결국 이루지 못하셨습니까?”
머무른 곳이 지하석실이다.
그것도 칠 일.
한데 대공자에게선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다.
물론 석실 내부에 환기통로가 갖추어져 있다.
하지만 그건 최소한의 환기 기능.
그렇기에 어떤 식으로든 독양충의 악취가 몸이든 옷이든 배어있어야 마땅하거늘, 악취는 물론이고 악취 비슷한 것조차 맡을 수 없다.
아니, 도리어 숲속의 맑은 향취가 풍겨나고 있었다.
목함을 아예 열지도 않은 듯 보였다.
그럼에도 묘하게 달라 보이는 점은 있었다.
차분하던 신색이 전보다 더 고요해진 듯 보이고, 한편으로 날카롭던 느낌이 매만져져 부드러워진 느낌이었다.
“독양충은 버거우셨던 겁니까?”
다시 물어오는 말.
“하하하!”
후공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어찌 토끼 형제가 품고 있는 의문을 모르겠는가.
“벌레 따위가 버거울 게 무엇입니까. 무섭다면 몰라도. 두 분은 나오자마자 재밌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후공은 두루뭉술 모호함으로 넘겼다.
삼악이든 천향이든 구구절절 설명할 이유 따윈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귀찮아.’
지금 필요한 건 휴식.
거기에 따뜻한 욕조와 요리다.
“가십시다. 지금 제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진 않으실 테지요.”
후공이 성큼 걸음을 내딛었다.
화운과 화청이 멍해졌다가 황급히 뒤따르며 볼멘소리를 냈다.
“대, 대공자! 어딜 가십니까? 그러니까 이뤘다는 겁니까, 안되었다는 겁니까?”
“말씀 좀 해 보십시오오오!”
***
다음 날 오전.
후공은 형토끼와 마주앉았다.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이며, 석실에 머무는 사이 일어난 일들을 전해 들었다.
천공단은,
지난밤이며 이 아침까지 막장 상태.
영악초 복용의 후유증을 겪고 있었다.
그런 탓에 입가심인지 속가심인지를 해야 한다면서 내내 술을 입에서 떼지 않고 있는 중.
물론 후공 입장에서야 7일이면 해소의 여지가 충분해 보였기에 그저 술을 마시기 위한 핑계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천공단 녀석들이 정상이 아님을 감안하여 내버려두었다.
화운의 이야기가 영악초에서 천잠육도로 넘어갔다. 그 와중에 생각지도 못했던 별호 하나가 튀어나왔다.
“이런……. 그사이 천잠노괴가 다녀갔단 말입니까?”
사흘 전 천잠노괴가 약왕문에 찾아와 육도를 데려갔다는 말이 나온 뒤였다.
화운이 멍해져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대공자, 어째…….”
“왜 그러십니까?”
“천잠노조를 천잠노괴라고 부르십니까?”
물론 안 보이는 곳에선 염라대왕도 염라놈이 될 수 있고 후공도 돼지라고 부를 수 있다지만, 화운으로선 엄연히 자신이 천잠노조라 공손히 칭했거늘 돌아오는 말이 ‘노괴’가 되어 있었다.
그 말투가 마치 잘 아는 양, 또는 별것 아니라는 듯했기에 화운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못 보게 된 것이 아쉽다는 느낌까지 섞여 있었다.
“크흠…….”
후공이 침음성을 흘렸다.
노조라 불러본 적이 없어 그저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것인데, 생각해보니 화운이 의문을 가질 만했다.
솔직히 후공으로선 노괴라는 호칭도 꽤나 존중해서 불러준 것이었다. 원래는 ‘그놈’ 혹은 ‘너 이놈의 새끼’ 정도다. 하지만 그걸 설명할 길은 없었다.
“부문주께선 뭘 잘 모르십니다.”
“네?”
“노괴가 듣기에 더 강해 보이지 않습니까? 듣는 입장에선 분명 좋아할 듯싶습니다만.”
“…….”
뭔 소리냐는 듯 화운이 미간만 좁혔다.
후공은 헛기침을 몇 번 해보이고는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천잠노조가 잡아갔다는 겁니까?”
“네. 워낙 극대노하는 모습에, 저는 그 자리에서 육도를 죽이는 줄 알았습니다.”
천잠노조는 동해로 오래 출타 중.
그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안휘 남부며 절강성까지 뒤집어진 다음이었다. 그렇게 뒤늦게 약왕문까지 찾아와서는 ‘후공도 떠난 마당에 그리 애타면 너희들도 후공 곁으로 보내주마’라면서 노발대발 장난이 아니었다.
화운의 설명이 이어졌다.
“……워낙 분노가 큰 걸 보고 있자니 한편으론 노조께서 육도를 애지중지 아끼고 있다 싶더군요.”
“그렇게 되었군요.”
후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잠노괴에게 혹여 문제가 생겼거나 정신이 나가 방관 아닌 방관 상태일까 마음 쓰였는데, 그건 아닌 듯하니 다행이었다.
한편으로 아쉬움도 남았다.
일찍 나왔다면 육도가 떠나는 걸 볼 수 있었을 테니.
태미나 삼둥이들과 달리 태대나 태야와는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것이다.
‘언젠가 또 때가 오겠지.’
그렇게 후공이 마음을 다독이고 있자니,
“그런데 떠나기 전 태대가 이상한 말을 남겼습니다. 대공자께 꼭 전해달라고 하였습니다.”
후공은 옅게 미소 지었다.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태대는 격정적으로 보이나, 나아갈 때와 멈춰야 할 때를 안다. 충돌 당시 물러선 것만 봐도 어느 시점부터는 과거 그들이 어릴 때 처음 만나 당부했던 말들과 약속들을 떠올렸으리라.
언젠가 천화서고로 찾아뵙겠노라…….
이 정도 말이 아닐까 싶다.
태미에게 수화의 약속을 지켰던 것처럼,
그날은 비무를 할 수 있고,
선물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을 테지.
“뭐라고 하던가요?”
“다음에 만나면 가만 안 둔다고.”
“…….”
“후공이 떠올라 참은 것뿐이지, 각오하라고. 찢어버리겠다고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
후공이 퀭해졌기에 화운이 급히 위로했다.
“대공자, 괜찮습니까? 허허…….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젊은 혈기에 무슨 말을 못 할까요.”
“…….”
후공은 자신이 감성적이었음을 인정했다.
하긴, 환혼이든 환생이든 미루어 짐작하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우연히 비슷하다고 여기는 정도면 모를까.
“그런데 대공자……. 아무리 생각해봐도 후공이 떠올랐다는 태대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대공자께선 후공과 인연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저 아주~~ 훌륭한 분이란 것 정도…….”
“그렇군요.”
화운은 의문이 남았지만 미소를 지으며 넘어갔다.
바로 화제를 돌렸다.
“대공자, 이제 남궁세가로 가시는 겁니까?”
“저는 천화서고로 돌아갑니다.”
“네? 이번 천룡대전의 초대자 명단에…….”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곳이 어디 제가 낄 자리입니까?”
“대공자시면 차고 넘치지요.”
화운이 망설임 없이 말했다.
후공이 빙긋 미소 지었다.
“무서워서 안 가는 겁니다.”
“아!”
화운은 바로 이해했다.
천룡대전은 십대세가의 행사.
서문세가 건으로 십대세가에 흠집이 났으니 이번 초청의 의도를 좋게만 볼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무서워서라는 말은 진심이 아닐 터. 화운은 대공자가 그저 번잡스러워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본문은 천화서고와 대공자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오늘 이후 천화서고의 곤경은 곧 약왕문의 곤경이요, 대공자의 적은 약왕문의 적이며, 천화서고의 친구는 본문의 친구입니다.”
“크흠, 좋군요.”
후공이 흡족해했다. 용화운도 따라 웃었다.
떠나기 전,
후공은 약왕문을 잠시 거닐었다.
은약전 근처에서 소나무를 어루만졌다.
천향을 운용하여 검지 끝에 목련향을 맺혔다. 이어 기의 막으로 감싸 나무에 스며들게 했다.
용악이 말했었다.
- 후공, 저는 목련향이 좋습니다. 기분이 좋아집니다.
- 왜?
- 은약이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 은약?
- 제 안사람입니다.
- 목련향이 나나 보군.
- 아닙니다.
- 그럼?
- 목련향이 나면 그냥 떠오릅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 뭔 소리야?
- …….
‘잘 지내라. 용악.’
후공이 천향을 시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