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최정예는 남는다.
두두두두…….
마차가 약왕문을 떠나 천화서고로 질주했다.
그리고 마차 지붕 위에선,
“두목, 초대한 사람 생각도 해야지. 남궁세가가 얼마나 서운해하겠어. 울지도 모른다고!”
“맞아. 천공단주가 참석해 자리를 빛내주지 않으면 이번 천룡대전은 망하는 거야. 두목형아야, 제발 천룡대전에 가자. 응, 제발 쫌~~.”
드러눕고 걸터앉은 두 거지가 천룡대전에 가자며 애걸복걸 성화였다. 원래 타고 온 마차 대신 약왕문이 최고급 마차를 준비해둔 덕분에 마차의 지붕이 멀쩡해진 후유증이었다.
‘시끄럽구만.’
마차 안 후공은 귀를 후볐다.
거지들이 남궁세가를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이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천룡대전에는 구미가 당기는 요소들이 많은 것이다.
강호의 명사들을 만나는 것이야 관심 없을 테지만…….
일단 온갖 먹거리가 풍부하다.
더불어 현 세대에 새롭게 떠오르는 신성들과 눈부신 미녀들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참석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해진다.
거기다 십대세가 후기지수들의 비무가 펼쳐질 것이니 그 광경들은 또 다른 눈요기다. 승자와 패자의 엇갈린 표정을 보는 맛은 구경꾼 입장에선 늘 쏠쏠하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거지들의 입장이고,
전직 무림맹주에겐 그저 따분한 남의 잔치일 따름이다.
절정의 미녀라 해도 후공의 눈에는 손주 같은 귀여운 아이들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 외 불참의 이유라면,
십대세가는 하나의 연대.
십대세가 중 하나인 서문세가를 몰락에 준하는 상태로 빠뜨린 천화서고를 다른 세가들이 곱게 볼 리 만무했다. 천룡이라 자칭하는 이들의 명성에 흠집이 난 것이 아닌가.
물론 겉으로야 미소로 응대할 것이나, 꾸며낸 거짓 미소를 굳이 봐야 할 이유가 후공에겐 없었다. 어딜 가나 깐죽대는 인물은 나오기 마련이니, 그 같잖은 꼴을 굳이 찾아가서 마주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두목, 남궁세가에 가면 쥐 죽은 듯이 얌전히 있을게. 믿어 봐. 진짜야!”
얌전히라…….
마차 안 후공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개방 밥을 얼마나 먹은 건지, 은앙개는 사기꾼이 다 되어 있었다.
곧바로 소천개도 뒤를 이어 호소했다.
“그래, 난 분명히 얌전히 있을 거야. 형아도 알잖아. 내가 내성적인 거.”
“누가 내성적이야!”
즉각 묘빙빙이 어디서 개소리냐는 듯 호되게 질책했다.
소천개는 이내 울상이 되었다.
“아니 그냥 내성적이라고 하면 좋잖아. 하여튼 누나는 손발이 안 맞아! 난 너무 속상해!”
“어느 정도 말이 되는 소리로 우겨야 할 것 아니니! 적정선이란 게 있는 거야!”
적정선이 없기로 정평 난 묘빙빙이 가르침을 내리고 있다니.
‘후후, 웃기는 녀석들…….’
후공은 내심 너털거리고는 바로 양소에게 명했다.
“양소, 마차를 세워라. 쉬었다 간다.”
“네. 공자님.”
밖으로 나온 후공은 천공단의 일부만 따로 불렀다.
금적자와 항마삼협, 무산쌍웅이었다.
“형님, 무슨 일이십니까?”
무산쌍웅이 물었다.
“여러분들께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부탁이요?”
“그렇습니다.”
무산쌍웅이 인상을 찡그렸다.
“아니 뭔데 왜 자꾸 부탁을 하시는 겁니까!”
“……?”
후공이 갸웃했다.
‘이놈의 새끼가 뭘 잘못 처먹었나.’
특별히 이상한 걸 먹은 기억은 없는데……. 아니면 영악초의 후유증이 이렇게 오래가나? 그렇게 바라보자니 무산쌍웅이 인상을 험악하게 구겨가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부탁 그런 거 하지 마십시오!”
“……??”
“그냥 명령하시면 됩니다! 명이 더 멋져 보이고 듣기도 좋잖습니까!”
“…….”
후공은 어이가 없어 무산쌍웅을 노려봤다.
도대체 이놈들은 뭘까.
결과적으로 순응하겠다는 말이다. 그런데 왜 좋은 의도로 말하면서도 누구 하나 죽일 것 같이 말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형님, 쌍웅의 말이 옳습니다. 이제 그냥 이거해라 저거해라 하십시오.”
“단주, 나도 동감일세. 천공단이 결속된 것도 어제 오늘이 아니잖나. 거리를 두는 것 같아서 섭섭하네.”
항마와 금적자가 뜻을 같이했다.
갑자기 충성 경쟁인가?
후공이 잠깐 그런 생각을 했지만, 실상 그건 아니었다.
이는 그저 천공단주를 향한 그들의 시선이 달라졌을 뿐이었다. 단주를 향한 신뢰도는 첫 만남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진 터다. 최초 단주를 정할 때만 해도 단순히 보은하겠다는 마음으로 출발했던 이들이었지만, 겪어보니 알게 되었다.
천공단주로서,
우두머리로 손색이 없다.
저절로 인정하게 되었다.
단주가 하나하나 상황을 타개해나가는 과정은 물 흐르듯 막힘이 없고,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이 따라온다.
또한 적재적소에 천공단을 활용함은 물론이고, 약왕문을 뒤흔들면서도 결과적으로는 선한 영향력을 드러내니, 함께 있는 것만으로 괜히 으쓱해져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뿌듯해질 지경이었다.
단주의 성향도 마음에 들었다.
한가할 만큼 여유가 넘치는데, 그에 반해 결정은 늘 신속하다. 있는 듯 없는 듯 느긋해 보이면서도 어찌된 게 단주는 점점 존재감이 커져가는 기묘한 인물인 것이다.
거기다 한 번씩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는 모습에서는 상대가 젊은 서생이란 것까지 잊게 된다.
고작 스무 살 남짓한 청년이 아닌,
어른의 어른 같은 느낌이 든다.
‘천재여서일까?’
‘영악초를 먹고 버텼다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지녀서일지도요.’
‘아니,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다른 기묘한 뭔가가 있습니다.’
금적자 등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지금의 발언은 충성경쟁이 아니었다.
그저 사람에 대한 매료.
하지만 후공 입장에선,
‘……이놈의 새끼들, 어이가 없네.’
부탁이란 말에 시비가 털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에, 순간 어떻게 해버릴까 싶을 정도였다.
“그럼 명령이라고 해두죠.”
후공이 애써 마음을 진정하고 입을 열었다.
“하하하, 바로 그겁니다. 형님, 어서 명을 내려주십시오.”
항마 중 이열이 껄껄거렸다.
후공이 슬쩍 미간을 찡그리며 바라봤기에 이열이 멋쩍어하면서 웃음을 거둬들였다.
“저는 무극살부를 확실히 정리했으면 합니다.”
“아, 맞다! 그놈들이 있었지.”
잊고 있었다는 듯 금적자가 탄성을 터뜨렸다.
“네, 그놈들이 남았습니다. 포기를 모른다 하여 무극이라 지었다고 하니, 무극살부 부주가 하늘 아래 멀쩡히 돌아다니는 한 저는 두 다리 뻗고 잘 수 없을 테죠.”
물론 과장된 말이었다.
현재 후공은 4성 초입에 도달한 터.
무극살부는 더 이상 위협적인 요소가 아니었다.
하지만 무극살부는 마치 잠들려 할 때 귓가에 왱왱거리는 모기와 같은 존재. 별것 아니긴 해도 계속 신경 쓰이는 녀석들이다. 물려도 큰 문제는 없지만 기분은 언짢다. 그러니 말끔히 때려잡고 잠드는 것이 현명한 길이었다.
“그쪽은 멸살단이 힘쓰고 있지 않나?”
“멸살단은 신뢰할 수 없습니다.”
멸살단은 무극살부의 궤멸을 위해 모인 이들.
그놈들도 주양과 만박자가 모았을 것을 감안해보면, 멸살단이 정상일 리 만무했다.
후공 입장에선 그나마 겪어본 천공단이 믿음직스러웠다. 이놈들은 비록 투닥대고 궁시렁거리긴 해도, 그 와중에 시키면 시키는 대로 잘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근본이 있고 신의가 있는 놈들이기도 하고.
“저는 그들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어떤 능력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현재 이 강호에서 믿을 수 있는 건 천공단뿐입니다. 여러분들이 무극살부 부주의 목을 가져오면 좋겠군요.”
다들 안색이 환하게 밝아졌다.
믿을 수 있는 건 천공단뿐이란 말에 기분이 좋아졌다.
“클클, 아무렴요. 믿을 수 있는 건 우리뿐이죠.”
“하하, 형님 염려 마십시오. 놈의 모가지는 이미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껄껄껄! 단주, 이번 기회에 멸살단도 우리 천공단의 휘하에 접수해버리겠네.”
‘그건 알아서 하고…….’
후공이 흡족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한은 백 일이면 되겠습니까?”
“너무 길군. 두 달 안에 끝내도록 하지.”
“마음에 듭니다. 그럼 추후 천화서고에서 뵙도록 하죠.”
뒤늦게 은앙개 등이 이러한 결정을 듣고는 다들 서운함을 내비쳤다.
어느새 정이 들었던 것일까.
악다구니를 쓰고 싸울 때가 태반이었지만, 갑자기 떨어져 함께하지 못한다 생각하니 기분이 묘해진 모양이었다.
“흥! 정들까 봐 걱정했는데 잘됐네 뭐.”
묘빙빙을 시작으로,
“뭐야, 천공단의 최정예만 남겨두고 찌끄레기 하수들만 출전인 거네. 괜찮겠어요? 얻어맞고 보고 싶다면서 울 것 같은데?”
“난 아주 좋아! 고기를 더 많이 먹을 수 있게 된 거잖아.”
표정은 반대면서,
전혀 그렇지 않은 얼굴이면서,
은앙개와 소천개까지 말로만 시큰둥하게 각자의 방식으로 서운함을 표했다.
금적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렴, 최정예는 단주 곁에 남아야지.”
***
그렇게 천공단이 둘로 나뉘어 각각의 여정에 돌입해갈 때, 약왕문은 뜻밖의 손님을 맞았다.
“칠비단혼?”
“네, 혼자 왔습니다.”
외무각주의 보고에 부문주 화운은 미간을 좁혔다.
“용건은?”
“지나는 길에 들렀다고 합니다만…….”
“그럴 리 없지.”
“물론입니다.”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듣지 않아도 목적과 의도를 짐작할 수 있을 때가 있다. 거기에 어떤 시점인지가 곁들여지면 추측은 거의 들어맞는다.
그런 점에서, 방문자가 남궁세가의 칠비단혼(七臂斷魂) 무겸이라는 건 사안이 특별하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었다.
칠비단혼!
그가 남궁세가의 가주 직속 호법단 중 일인인 까닭이다.
호법단의 임무는 중요도가 남다르다. 신속하거나 은밀한 일처리를 요할 때 중용된다고 알려져 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본문의 불참 때문은 아닐 겁니다.”
“그렇겠지?”
“네.”
금번 천룡대전에 약왕문은 불참의사를 밝혔다. 그에 대한 아쉬움의 표시라면 남궁세가의 외청관주가 찾아오는 것이 순리였다.
그렇다면 초점은 한 사람으로 좁혀진다.
‘……역시 천화서고 대공자인가?’
화운은 저절로 떠오른 생각을 한쪽에 밀어두고 몸을 일으켰다.
“접객실로 가겠다.”
...두 사람이 마주앉았다.
대화는 예의가 담긴 인사말로 시작되었다.
“칠비단혼께서 귀문까지 어찌 걸음하셨습니까?”
“약왕문에서 금번 천룡대전에 참석이 어렵다 하시니, 혹여 본 세가에 서운한 점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불편한 건 여전하군.’
화운은 내심 혀를 찼다.
칠비단혼은 냉막함 그 자체였다.
말로는 걱정이 된다면서, 이 마른 체형의 중년인은 그의 흑청색 의복만큼이나 차갑고 무거운 표정이었다.
오직 명령 수행이 전부인 자.
정겨운 맛이라곤 전혀 없으니 화운으로선 목석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최근 어우러진 이들이 천공단이라서 더 차가운 느낌이 드는 걸지도 모르겠다. 천공단은 정겨움을 넘어 시골에서 상경한 일가친지들이 찾아온 것처럼 떠들썩했으니까.
화운이 차분히 말을 받았다.
“남궁세가에 서운한 점이라니 농담도 잘하십니다. 현재 본문은 문주님께서 폐관 중이시고 마침 처리할 일들이 많아 저희 쪽에서도 얼마나 아쉬움이 큰지 모릅니다.”
“영단에 관한 것입니까?”
“그걸 포함하여 두루두루 여러 해결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기대되는군요.”
억양 없이 무감정한 칠비단혼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 귀문에 진동하고 있는 목련향과 영단이 관련있는 모양입니다. 약왕문의 목련꽃만 이 시기에 피어날 리는 없을 테니 말입니다.”
“아……. 이 향기는…….”
화운이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가 돌아왔다. 누군가가 저절로 떠올라 화운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습니다. 영단의 제련 과정 중에 목련향이 피어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