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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화 서고 대공자-82화 (82/460)

82화. 정중히 모시겠습니다.

후공이 칠비단혼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남궁세가에서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한다는 뜻이로군요.”

“그리 날카롭게 받아들일 것 있습니까. 도리어 사실 관계를 따지자면 천화서고 쪽에서 남궁세가를 우습게 여기고 있지 않습니까. 안휘 남부에 머물고 있다면 최소 거절의 말을 해도 본 세가에 오셔서 직접 말씀해주시는 것이 예의지요.”

“허허……. 이야기가 그렇게 됩니까?”

후공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떻게 된 게,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어느샌가 자신이 크게 잘못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정중히 모시겠습니다.”

“제가 안 간다고 버티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정중히 모시겠습니다.”

“설마 실력행사를 하시는 겁니까?”

“정중히 모시겠습니다.”

후공이 빤히 바라봤다.

이쯤이면 사람새끼가 아니라 벽이었다.

대화는 불가능.

맹랑한 녀석인 줄은 알았는데 아예 말이 통하지 않는 녀석이 아닌가. 바로 몸을 일으켰다.

“저는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무서우니 쫓아오지 마십시오.”

***

두두두두두…….

달리는 마차 지붕 위에선 성토가 쏟아졌다.

“하아……. 남궁세가 그렇게 안 봤는데 개답답하네. 아니 손님 초대를 이런 식으로 하는 경우가 어딨냐고! 분위기는 왜 그리 잡는 건데! 시발, 난 진짜 모가지에 철심 박은 줄 알았지 뭐냐.”

“남궁세가 개후져. 아주 멍청이들임!”

은앙개와 소천개의 연이은 분노에 묘빙빙이 가세했다.

“멍청이 맞지. 거기다 따라오지 말란다고 진짜 안 오는 걸 보면 사내자식이 근성까지 없고 말씀이야. 그런데 그 자식 운 하나는 좋네. 삼협이랑 쌍웅이 있었으면 탈탈 털렸을 텐데.”

“칠비단혼이 그런 수준은 아니야.”

은앙개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더했다.

“실력은 있거든. 멍청이인 건 틀림없지만.”

“싸움 잘해?”

“아마 쌍웅과 맞서도 막상막하일걸.”

“하지만 거기에 삼협이 참전한다면?”

“그야 팔이 일곱 개가 아니라 스무 개로 늘어도 죽어나가겠지.”

“거봐, 그니까 운이 좋다는 거야.”

이어 소천개가 징징거렸다.

“바보 멍청이 때문에 괜히 설렜어. 내 설렘 어떻게 할 거야. 물어내라, 남궁세가야! 어떻게 포기가 이렇게 빠른 거냐고!”

마차는 산길로 접어들며 굽이도는 소로로 진입했다.

마부석의 양소가 속도를 줄였다.

그리고,

‘포기는 무슨.’

마차 안 후공은 인지하고 있었다.

칠비단혼은 여태 따라오고 있다. 은밀히 기척을 숨긴 채로 적당한 기회를 엿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쯤이려나.’

나타난다면 지금 진입한 지점이 적합해 보인다.

이곳은 인적이 없고, 부근에 인가도 보이지 않는다. 소란이 일어 소리가 커진다 해도 염려할 일이 없는 지형지세다.

아니나 다를까,

후공의 짐작은 들어맞았다.

마차 뒤쪽에서 별안간 크게 기세가 일어났다.

“뭐야?”

“따라왔었어?”

“날아오르……?”

지붕 위 천공단 기타 등등들이 놀란 눈이 되어, 머리 위를 날아 지나가는 시커먼 인영을 쫓았다.

마차 뒤에서 갑자기 나타났다 싶은 칠비단혼은 마차 위로 신형을 날리더니 파라락, 옷자락 소리와 함께 마차 앞쪽에 착지했다.

“헉!”

마부석의 양소가 놀라 고삐를 틀어쥐었다.

휘이이잉!

급히 멈추려 한 탓에 말들이 몸부림쳤다. 하지만 달리는 속도가 있어 바로 멈출 수 없었다. 마차 방향이 좌측으로 틀어졌고 소로의 언덕에 부딪히면서 우당탕 크게 요동쳤다가 겨우 멈춰 섰다.

“이게 무슨 짓이오!”

양소가 분을 참지 못하고 고함쳤다.

칠비단혼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였다. 스산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특별히 무슨 짓을 한 건 아니다 싶은데……. 정작 하려고 하는 건 사실 지금부터거든.”

그 기세에 질려 양소며 지붕 위 기타 등등들도 무슨 뜻인지 물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저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칠비단혼이 말들을 향해 다가갔다.

불안하게 발을 굴리고 있는 말의 머리를 그가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한 차례, 두 차례, 그렇게 쓰다듬고 세 번째.

손을 댄 채 잠시 머물렀다.

순간,

퍼석.

기음이 터지며, 말이 그 자리에서 허물어졌다.

단말마의 비명조차 없었다.

칠비단혼은 그렇게 차례로 나머지 세 마리의 말도 머리를 터뜨렸다. 말이 한 마리씩 죽어나가며 허물어질 때마다 마차는 덜컹거렸고, 차츰 더 주저앉으며 앞쪽으로 기울어졌다.

양소의 안색이 핼쑥해졌다.

방금 보인 칠비단혼의 한 수는 그의 수준에서는 가늠해보기조차 힘든 내가공력인 것이다.

특별히 타격한 것 같지도 않거늘 말의 뇌수가 터져나갔다. 외부로 출혈이 난 것도 아니며, 말 머리가 움푹 들어간 부분조차 없다. 그저 말끔하게 말의 머리 내부만 폭사된 것이다.

천공단의 기타 등등들도 조용했다.

그만큼 칠비단혼이 무심히 드러낸 한 수는 가볍지 않았고, 또 그가 뿜어내는 냉막한 기세 또한 부근을 압도하고 있었다.

마차 안도 고요하긴 마찬가지.

칠비단혼이 마차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대공자, 제가 크게 무례를 범했습니다.”

매우 정중하고 절도가 있었다. 또 그의 태도는 상대가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진중했다.

마차 안은 그저 고요했다.

칠비단혼이 말을 이었다.

“갑자기 길을 막아섰고, 마차는 파손되고 말들을 죽이기까지 했으니 크게 손해를 입히고 말았군요. 이 일은 제가 엄히 문책 받아야 마땅한 일이니, 함께 본 세가로 가시지요.”

“…….”

“대공자는 방금 있었던 일을 그대로 고하시면 됩니다. 저는 문책을 받고, 대공자는 재차 사과를 받음과 동시에 마차와 말들에 대한 손해 배상도 몇 배로 받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었다.

지붕 위 묘빙빙이 눈을 표독스럽게 떴다.

자신이 일을 저질러놓고, 문책을 받을 테니 남궁세가로 가자니.

“시발놈이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난리났네.”

작게 소곤거렸지만 다 들었다.

칠비단혼의 시선이 비수처럼 묘빙빙에게 날아들었다. 묘빙빙은 얼른 딴청을 피웠다.

그때 마차 안 후공은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하지만 자세는 지그시와는 딴판이었다.

마차가 앞으로 주저앉은 덕분에 뒤쪽을 보고 앉아있던 후공은 한껏 몸이 젖혀진 채로 반쯤 눕다시피 되어 모양새가 영 아니었다.

마차 안에 함께 있던 송화는 주인이 그 상태로 미동도 없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주인의 무공은 애저녁에 자신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으니 다치셨을 리는 만무하고, 지금은 그저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뿐이신 것이다.

그때 후공이 입술을 달싹였다.

“송화야.”

“네, 공자님.”

“나가 있거라.”

“……네.”

송화가 나가자, 후공이 칠비단혼을 불렀다.

“들어오십시오. 이야기를 나눴으면 합니다.”

“…….”

칠비단혼이 미간을 찡그렸다.

들어오라는데 막상 들어가려고 보니 마차 꼴이 우스웠다.

마차는 앞으로 처박히듯 고꾸라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어서, 밖으로 나와 이야기를 하자고 말하기가 난처했다.

칠비단혼은 먼저 마차 앞쪽을 들어 고정하여 수평을 맞춰놓았다. 마차 안으로 들어서자, 똑바로 앉게 된 후공이 옆자리를 권했다.

“이쪽에 앉아 보십시오.”

“네.”

“칠비단혼께선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알고 있지 않습니까?”

다시금 사람이 아닌 벽과 같은 대답이 튀어나왔다.

“심합니다. 이건 아니지 않나요?”

“저로선 꽤 정중했다고 생각합니다.”

“누구에게나 이런 식입니까?”

“그렇습니다.”

“여태 무서운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나 봅니다.”

“그렇습니다.”

“그럼 오늘 만난 겁니다.”

후공이 나직히 말했다.

칠비단혼이 순간 이해를 못해 갸웃했다. 하지만 이내 깨닫고는 자신도 모르게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 만났다라니…….

“하하, 대공자께선 보기와 달리 유쾌한 분이었군요.”

평소라면 결코 웃지 않았을 그였지만, 방금 들은 말은 황당하기 그지없어 거의 기습과 같았다.

“크흠…….”

후공이 헛기침으로 불편함을 드러내고 입을 열었다.

“웃을 일이 아닙니다. 그대 정도는 이렇게 손가락으로 건드리기만 해도 끝낼 수 있습니다.”

말하며 후공이 검지를 세워 칠비단혼의 몸을 톡톡 건드렸다.

그건 마치 장난하듯 가벼웠고 스치듯 했다.

문제라면 그것이 일곱 번이란 것이며,

각각 다른 지점이란 점이었다.

하지만 칠비단혼이 후공의 교릉을 알아차릴 수는 없었다. 사성에 이른 후공의 교릉은 워낙에 자연스러워진 데다, 각 부위들이 일반적인 상식에서는 의미있는 혈도로 분류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칠비단혼이 대수롭지 않게 받았다.

“대공자께서 그 정도로 놀라운 분인지 몰랐소이다.”

“죽어봐야 저승을 아는 법이지요.”

“제가 오늘 죽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제 손에 죽습니다.”

후공은 씨익 웃어주었다.

반면 칠비단혼은 이제 언짢음이 한 겹씩 쌓여갔다. 적당히 받아주던 아량도 한계치에 육박했다.

“이거 궁금해지는군요. 저는 어떻게 죽게 됩니까?”

“생매장 당합니다. 처음일 테죠?”

담담한 어조가 칠비단혼의 심기를 상처냈다.

칠비단혼이 안광을 무섭게 발했다.

“대공자…….”

“말씀하세요.”

“방금 선을 넘은 것 같습니다만.”

“후후…….”

후공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건방을 떨 땐 언제고?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나갈 생각을 하니 흥분되냐?”

“이놈이!”

슬슬 긁히다 아예 대놓고 긁힌 순간 칠비단혼이 이성을 잃었다. 그가 즉시 우수를 갈고리처럼 뻗었다. 머리를 틀어잡으려는 공격에, 후공은 예비동작도 없이 앞으로 튕겨나갔다.

꽈작!

마차 뒷면을 부수고 빠져나갔다.

쾅!

방금까지 후공이 앉아있던 자리를 강타한 칠비단혼이 바로 뒤따랐다. 그의 분노는 말로 할 수 없었다. 그에게 있어 오늘 같은 모욕은 처음이었다. 또한 이는 자신에 대한 모욕이자 남궁세가에 대한 모독이었다.

후공이 멀리 간 건 아니었다.

그저 마차 뒤쪽으로 나와 어느샌가 뒷짐을 진 채 기다리고 있었다.

“두목!”

“형아야!”

“두목 형님!”

지붕 위에서 은앙개 등이 일제히 걱정스럽게 소리쳤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에 후공이 만류했다.

“거기 얌전히 있도록.”

그사이 폭주한 칠비단혼의 장력이 쇄도했다.

‘셋!’

후공은 세 줄기의 장력을 확인했다.

좌측과 우측, 그리고 중앙.

팔이 일곱 개라더니 아주 허언은 아닌 모양이었다. 셋을 다 벗어나려면 허운을 발휘하거나 위로 솟구쳐야 했지만, 후공은 하나는 맞아보기로 했다.

이 몸은 실전경험이 필요했다. 비무 따위가 아닌 전력을 다한 부딪침은 몸을 일깨우는 데 중요하다.

좌우로 보법을 가볍게 일렁였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건 마치 어디로 회피하는 게 좋을지 몰라 우왕좌왕 당황하는 것처럼 보였다.

파앙.

가슴께로 짓쳐든 칠비단혼의 장력이 그대로 후공을 강타했다.

후공이 연달아 뒤로 밀려났다.

거의 열 걸음이 넘게 물러나서야 멈춰섰다. 후공은 신형을 정비하고 자신이 물러나며 딛었던 지면에 남겨진 발자국을 확인했다.

처음 두 걸음 물러난 자리에만 발자국이 새겨졌다.

‘괜찮군.’

호신기 중 하나인 통격의 운용.

통격은 외부 힘의 관통과 전이.

후공은 삼대호신기 중에서 가장 난해하면서도 의미있는 수법이 무난히 수행되었기에 흡족한 마음이 되었다.

장력의 기운은 두 걸음째에 고스란히 지면으로 흘러나갔다.

굳이 열 걸음을 물러난 건 자신의 경지를 다 드러내지 않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칠비단혼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분명 장력은 치명적으로 들어갔다. 심지어 적중시킨 후에는 자신이 성급했다는 후회가 찾아왔을 정도였다. 내부 장기는 진탕되고 뭉개져 즉사여야 했다. 그런데 대공자는 그저 멀리 밀려났을 뿐이다.

후공이 미소 지었다.

“솜방망이를 들고 강호를 활보하는 놈이 있다더니, 너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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