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죽어보면 안다. (1)
후회는 언제나 늦다.
왜 그때 알아듣지 못했을까.
칠비단혼은 약왕문 부문주의 말을 떠올렸다.
[대공자를 곁에서 호위하는 이들이 누군지 알고 있습니까? 금적선생, 항마삼협, 무산쌍웅입니다. 하지만 정작 두려워해야 할 이는 그들 너머에 있는 대공자일 겁니다. 항마삼협과 무산쌍웅이 대공자 앞에서 고분고분한 걸 보셨어야 제 말이 이해가 되실 텐데, 아쉽군요.]
왜 걱정되느냐는 추궁에 부문주는 이렇게 부연 설명을 늘어놓았었다. 그때만 해도 헛소리를 장황하게도 떠든다 싶었거늘…….
그의 상념은 이어지지 못했다.
뚜득, 뚜드득, 뚜드드득.
통제불능의 발작이 심화되었다.
더욱 거칠고 예측불가한 방향으로 전신이 틀어지면서 엄청난 고통이 찾아들었다.
“으으갸갸갸…….”
흙더미가 짓누르고 있음에도 몸부림은 그걸 이겨내려는 듯 뼈와 근육이 쉴 새 없이 비틀리니 통증이 말로 할 수 없었다. 뼈가 부러지지 않고 있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 절로 벌어진 입으로 흙이 밀려들어오니, 입안조차 흙범벅이 되어 비참함이 더해졌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발작은 서서히 진정되었다.
칠비단혼으로서는 이유도 모른 채 그저 현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왜 시작되었는지를 모르니 왜 멈추는지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때는 매장당한 지 한시진(2시간)이 지난 뒤였다.
하지만 일각이 여삼추처럼 길게만 느껴졌던 칠비단혼은 체감이 달라, 하루나 이틀 정도가 지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직은 산 넘어 산이었다.
발작만 멈춘 것이다. 점혈된 마혈이 문제였다. 발작할 때는 잘도 움직이던 몸이, 정작 스스로 움직이려니 족쇄에 매어진 양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혈도를 풀어낼 기력은?
그런 건 남아있지 않았다.
정상적인 상태라면 일반적으로 두 시진이면 점혈을 뚫어낼 수 있지만, 이 상태로는 꿈같은 일이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이대로 죽는 것인가.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면 좋으련만…….
그렇다고 하기엔 풀까지 심어놨다고 했다.
갑자기 폭우가 쏟아진다면, 그래서 흙더미가 쓸려나간다면 좋겠는데…….
하지만 묻히기 전까지 바람도 없이 화창하기만 한 날씨였다. 한 달 정도는 비 소식이 없을 만큼 맑았다.
게다가 하필 이곳은 인적이 드문 곳이다.
이 장소를 고른 것이 자신이었기에, 스스로 깊은 무덤을 찾아온 꼴이 되고 말았다.
‘시발…… 흑흑…….’
막막한 어둠 속에서 칠비단혼이 흐느꼈다. 나중에 큰 홍수가 나면 그때 발견될지도 모른다. ‘이런, 이런……. 이미 썩어버려서 누군지 알아볼 길이 없구만.’ 따위의 대화가 오갈지도. 그걸 생각하자 어처구니가 없어 눈물이 났다.
임무가 뭐라고.
살다 보면 실패할 수도 있는 것이거늘.
후회가 들었다가 이내 대공자에 대한 원망이 솟구쳤다. 그렇다고 생매장은 아니지 않는가. 사람이 이럴 순 없는 것이다. 거기에 개방의 어린놈들의 행태는 또 뭐란 말인가. 개방 방주는 자신의 제자들이 이러고 다니는 걸 알기는 할까. 이대로면 개방의 미래는 심히 걱정…….
‘시발……. 그걸 내가 왜 걱정하고 있냐. 흑흑흑…….’
완전한 어둠 속에서 칠비단혼은 쌍욕을 했다가 울었다가 후회했다가를 반복하며 그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누구라도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해줬으면 싶은데, 아무도 방해하지 않아서 서글픈 칠비단혼이었다.
그렇게 다시 얼마가 지났을까.
한순간,
‘……어?’
기적이 일어났다.
몸이 돌아오고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스륵 혈도가 풀리면서 몸이 움직였고, 미약하지만 힘도 회복되었다. 기쁜 나머지 눈을 떴다가 그만 흙이 눈에 들어오는 바람에 따가워져서 얼른 다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살았다!’
희열이 차올랐다. 움직일수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빠져나가는 건 어렵지 않다.
칠비단혼은 빨라지는 심장박동만큼이나 마음이 급해졌다. 발작이 또다시 나타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으니, 그는 흙더미를 미친 듯이 파헤치며 조금씩 위로 나아갔다.
푹!
땅을 뚫고 나온 손등에 바깥 공기가 와닿고, 이어 흙을 젖히며 몸을 빼냈다. 밖은 어느샌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때였다.
“우와, 이 새끼 진짜 나왔네.”
“시간 정확한 거 봐.”
“이야, 이 꼬라지는 대체 뭐야.”
뒤쪽에서 들려온 목소리.
경황 중에 칠비단혼은 심장부터 덜컥 내려앉았다.
‘헉! 기다린 건가?’
다시 묻으려고? 놀라 황급히 몸을 돌려 바라봤다가 눈이 더 커졌다.
처음 보는 이들이었다.
세 명의 사내. 이십 대 중반에서 삼십 대 초반 정도의 얼굴들은 한껏 조소를 머금고 있었다.
“누, 누구냐?”
이미 자라를 보고 놀란 그였기에 솥뚜껑처럼 나타난 사내들을 보며 더듬거렸다.
“하하, 이 새끼 더듬거리는 거 보게. 쫄았냐?”
“크큭, 안 쫄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야.”
“너 이 새끼, 뭔 짓을 하고 다녔기에 매장당해버린 거냐? 사채 썼냐?”
“…….”
칠비단혼은 말을 듣는 와중에 냉정을 찾아갔다.
당혹감이 가라앉으며, 처음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무공을 익히지 않는 자들이었다.
그냥 아무것도 아니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건달.
그렇다는 건 이들은,
심부름꾼이다.
“천화서고 대공자가 보낸 것이냐?”
그들이 했던 말 속에 정답이 있었다.
진짜 나왔네, 라고 했다.
또한 정확한 시간에 나왔다며 놀랐으니,
이들을 이곳에 보내 이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리게 한 이가 있음을 의미했다.
이 장소, 나올 시간을 누가 알아낼 수 있겠는가.
그 의미를 곱씹자면 혈도가 이 시간에 풀린 것은 우연이나 기적이 아닌, 처음 파묻을 때부터 대공자가 의도했다는 뜻이 된다.
“천화서고?”
셋 중 청의 사내가 갸웃하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그게 뭔데, 개새끼야! 죽다 살아나더니 처돌았냐. 갑자기 개소리를 해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
칠비단혼이 갸웃했다.
청의 사내의 말이 이어졌다.
“머리가 어떻게 된 거여? 누구한테 당했는지도 기억이 안 나? 병신아, 개방을 건드린 거잖아.”
“……!”
“은앙개 형님의 심기를 건드린 놈이라 제법 한가락 하는 놈인가 했더니만, 그냥 처 돌은 놈이었네. 너 그냥 다시 매장 당할래?”
‘흐음……. 그렇게 된 건가.’
칠비단혼은 충분히 돌아가는 사정을 이해했다.
이런 밑바닥 건달들에게 개방은 절대적이다.
종교다.
그리고 은앙개 정도면 신(神)이며, 대재앙인 것이다.
은앙개가 이들에게 심부름을 맡긴 건 확실할 터. 하지만 그 너머에서 은앙개에게 지시를 내린 것이 누구인지는 묻지 않아도 뻔했다.
천화서고 대공자.
언제부터였을까?
현 상황까지의 그림을 그린 건.
자신이 마차를 가로막았던 순간부터였을지도.
생매장은 생매장대로 시키고, 발작에 이은 혈도의 해제.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심부름꾼들까지. 물 흐르듯 이 과정들을 실현하는 중에 드러낸 고절함은 자신이 넘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후우…….”
칠비단혼은 죽어봐야 저승을 안다던 대공자의 말이 생각나면서 한숨이 절로 터졌다. 이런 몰골로 당하고 나니 자신이 얼마나 오만했는지, 상대가 얼마나 무서운 자인지 깨달았다.
그가 이내 고개를 절레거리곤 입을 열었다.
“내가 어디로 가면 되지?”
세 건달이 히죽 웃었다.
“여어~. 이거 아주 멍청이는 아니었네. 따라와라.”
***
황목객잔.
깊은 밤 자정을 넘긴 시간.
칠비단혼은 객잔의 일층에 자리했다.
그는 이미 깨끗하게 씻고 의복도 갈아입어 겉으로 보기엔 꽤나 멀쩡한 모습이었다. 그런 칠비단혼 곁으로 은앙개와 소천개, 그리고 묘빙빙이 위로하겠다며 함께했다.
“두 번째 생의 시작! 부활 축하드립니다! 아랫동네 공기는 어떻던가요?”
“사형, 내가 숨구멍 만들어놓았잖아. 공기는 아주 잘 통했을 거라고. 그쵸? 공기 슝슝 잘 들어왔죠?”
칠비단혼이 입을 쓰게 다셨다.
분명 위로의 자리라고 했던 것 같은데, 어디에 위로가 담겨있는지 찾을 길이 없었다.
위로 같지 않은 위로가 이어졌다.
묘빙빙이 새침하게 물었다.
“근데 어쩜 그렇게 발작을 잘해요?”
“…….”
술잔을 들어올리던 칠비단혼이 동작을 멈췄다.
하지만 묘빙빙은 그런 걸 신경 쓰는 이가 아니었다.
“점혈되었으면서 그렇게 팔딱거리는 사람을 처음 봐서 그래요. 난 누가 소금 뿌린 줄 알았지 뭐겠어요.”
우린 흙을 뿌렸을 뿐인데, 라며 묘빙빙이 말을 마쳤다.
칠비단혼은 당시 상황이 떠오른 탓에 울화가 치밀었지만 이내 포기하고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다툴 생각 같은 건 없었다. 그리고 기력을 운용할 수 있는 몸 상태도 아니었다. 씻을 때조차 기운이 회복되지 않아, 다리가 멋대로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그리고 발작에 대해서라면 솔직히 그도 의문이었다.
은앙개가 웃으며 빈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그러게 제가 뭐랬나요. 두목이 진상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우리도 진짜 묻을 줄은 몰랐어요. 얼마나 놀랐다고요. 근데 또 어떻게 하나요? 우린 졸개들인데. 파라면 파야지.”
“맞아, 안 팠으면 우리도 묻혔을 거야. 형아는 너무 무서워.”
칠비단혼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렇다고 하기엔 이 세 놈들, 흙 덮을 때 꽤 신나 있었다. 풀을 심자는 말도, 서둘러 덮자며 호들갑을 떨던 목소리도 아직까지 생생하다.
은앙개의 말이 이어졌다.
“첫 단추부터 문제였어요. 제 이야기대로 살살 아부 떨면서 꼬드겼으면 두목 성향상 ‘그래볼까요, 껄껄.’ 이럼서 지금쯤 분위기 좋았을 텐데, 칠비께서 보인 태도는 거의 납치범이었잖습니까.”
“맞아. 형아는 무섭지만 좋은 사람이야. 약왕문도 공손한 태도로 똑똑하게 굴어서 아주 계 탔잖아.”
“계를 타다니?”
칠비단혼이 호기심을 보였다.
소천개가 얼른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러다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그런 거 있어요. 비밀이야.”
그때 일행에게로 송화가 다가왔다.
“공자님께서 부르십니다.”
칠비단혼이 몸을 일으켰다.
기다리고 있었던 터다.
..칠비단혼이 객실로 들어오자, 창가에 서 있던 후공이 객실 내 탁자를 가리키며 손짓했다.
“그쪽에 앉아.”
“…….”
칠비단혼이 우뚝 멈춰 노려봤다.
당혹감에 사로잡혔다.
‘뭐지? 왜?’
이유를 알 길이 없었다.
대공자가 존대를 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이미 서로 갈 데까지 갔던 관계가 아닌가.
그리고 이 일은 자신의 강압에서 시작되었고, 결과는 완패였으며, 아직 마무리된 것도 아닌 상황이다.
문제는,
‘젠장…….’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한 것이다. 마음에 두려움은 없었다. 대공자는 이미 자신을 죽일 의사가 없음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몸이 저절로 반응하고 있었다.
그런 칠비단혼을 후공이 뚱하니 쳐다봤다.
대충 봐도 상태는 한눈에 들어왔다.
칠비단혼은 교릉에 당했으니 몸이 아는 것이다. 몸이 공포를 기억하고서 멋대로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은 최소한의 교릉을 적용했다지만, 고통이 없는 건 아니었을 테니.
“뭐냐? 왜 그렇게 무섭게 쳐다보면서 부들거리고 있어? 다시 해볼 작정이냐?”
후공은 짐짓 화내는 것으로 모른 척해주었다.
도리어 그런 반응은 칠비단혼에겐 여유가 되었다.
경기를 일으켜가던 몸이 이내 사그러들었다. 이것이 대공자의 배려임을 칠비단혼은 어렴풋이 이해했다.
“아닙니다.”
그가 공손히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