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최근 강호를 뒤흔들고 있는 인물.
후공은 여인을 보며 피식 웃곤 바로 시선을 거뒀다.
아름다움에는 뭔가 알 수 없는 마력이 담겨 있나 보다.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고 만다.
거기에 아는 얼굴이라면, 마음이 더 가는 법.
‘저 녀석은 더욱 예뻐졌군.’
한눈에 알아봤다.
미녀는 현 남궁가주의 막내딸이었다.
남궁소예.
최근에 본 것이 1년 전쯤이었던가.
그새 꽃이 만개하듯 미모가 활짝 피었다.
한창 때라서 그런 걸지도.
소예는 조카나 다름없는 제갈혜와 친분이 깊어, 어찌된 게 가주인 아버지보다 더 무림맹에 자주 온다 싶을 정도였다.
“남궁 소저, 밖에 누가 있습니까?”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던 남궁소예가 목소리에 반응했다.
그녀의 맞은편에 자리한 팽무결이었다. 무슨 말을 한 것 같은데 듣지 못했다.
“방금…… 무슨 말씀을 하셨던가요?”
오늘 이 자리는 금번 천룡대전을 위해 참석한 후기지수들 중 남궁소혜를 포함해 여섯 명의 명문가 자제들이 함께한 자리.
팽무결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시 말해주었다.
“하하, 밖에 누가 있느냐 여쭈었을 뿐입니다.”
“아! 본 세가 호법 중 한 분이 손님을 모시고 이곳에서 식사를 하시려나 봅니다.”
“그렇습니까. 남궁세가의 호법께서 모시는 분이면 강호 배분이 꽤 높은 분이겠군요.”
곁에서 이 이야기를 듣게 된 이들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런 분과 합석을 하게 된다면 큰 영광이겠습니다. 다들 어떻습니까?”
“높으신 어른이라면 따로 나눌 말씀이 있을 수도 있으니, 먼저 의중을 묻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야 당연하지요.”
소예도 내심 합석을 원했다.
가능할 것도 같았다.
배분을 논하기엔 분명 젊어 보였다.
소예가 합석을 원한 이유라면,
단 한 가지.
그녀는 진심으로 오늘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칠비단혼 님이 저런 다정함을 보이다니…….’
너무 황당한 광경이라, 바라보면서도 잘못 본 것이 아닌가 싶었을 정도였다. 장담컨대 그녀가 아는 칠비단혼은 다정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릴 때부터 봐왔기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칠비단혼은 억양도, 표정도 없다.
웃는다면 그건 비웃을 때뿐.
심지어 자신에게조차 정겨운 미소를 보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선천적으로 사람이 원래 그런가 보다 생각했을 정도인데, 그런 칠비단혼이 서생 차림의 젊은 공자에게 세상 다정하게 미소 지은 것이다.
아니, 다정함이 뭔가.
아예 곁에서 살갑게 눈웃음을 치고 있었다.
‘대체 누구기에?’
호기심은 소예만이 아니었다.
어떤 귀인이 들어오게 될지 다들 궁금히 여길 때, 후공과 일행이 3층으로 올라왔다.
이후, 모두의 호기심은 놀라움이 되었다.
나타난 인물은 모두에게 너무도 뜻밖이었던 것이다.
“하하, 정녕 천화서고 대공자란 말입니까?”
“이렇게 만나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생각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르군요. 아, 물론 좋은 의미이니 오해는 마십시오.”
칠비단혼의 소개가 끝나자마자 반응이 뜨거웠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강호를 뒤흔들고 있는 인물은 단연 ‘천화서고 대공자’인 것이다.
죽음만을 갈망하던 천재에서,
멸문의 위기에 처한 가문을 지켜낸 이.
십대세가 중 하나인 서문세가를 몰락시킨 자.
강호의 떠오르는 별.
떠도는 말 중에는,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살인청부했다가 마음이 바뀌어 청부조직을 말살하려 한다는 말도 돌고 있어, 혹시 ‘성격파탄자’ 아니냐는 의문까지 따라다녔다.
이렇듯 여러 수식어가 난무하니,
다들 금번 천룡대전의 초대자 명단에 천화서고 대공자가 포함된 것을 보고서, 내심 어떤 인물인지 만나보고 싶어 했던 것이다.
“사제야, 우리 지금 투명한 상태인 거지?”
“응. 은신도 안 했는데 아무도 날 쳐다보지 않아. 마음이 안 좋아. 속상해.”
관심이 한쪽으로만 쏠리니 소외된 거지들이 시무룩해졌다. 그제야 칠비단혼이 거지들과 묘빙빙을 소개했다. 그러자 이번엔 또 다른 의미로 다들 놀라워했다.
웬 거지들이 멀뚱하니 서 있나 싶었다.
그저 때마침 동냥하러 온 줄 알았는데 무려 현 개방 방주의 제자들이라 하니 모두의 시선이 달라졌다.
묘빙빙 또한 안휘 북부에서 명문가로 이름 높은 백화장의 장녀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십대세가의 후기지수들도 각자 자신을 소개했다.
후공은 온화한 얼굴로 그들 한 명 한 명을 눈에 담았다.
이 시대의 미래요,
강호의 자라나는 새싹들인 것이다.
하북팽가의 팽무결.
황보세가의 황보중선.
사마세가의 사마강.
진주언가의 언교운
그리고 두 여인.
웃을 때 보조개가 유난히 돋보이는 귀여운 미모의 산동악가의 악영산과, 눈부신 미색의 남궁소예까지.
몇은 대화도 나눠본 적이 있고, 몇은 처음이었지만 다들 신색이 밝고 눈에 총기가 담겨 있으니 후공은 보고 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이내 착석하고 요리가 나오면서는 질문이 쇄도했다.
“서문세가의 일을 듣고 경악했습니다. 그들이 명문가의 가면을 쓰고 패악을 저지르고 있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들의 위협이 거셌을 터인데, 어떻게 맞섰던 것입니까?”
황보세가의 황보중선을 시작으로,
“서문가주가 잠력까지 격발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천화서고 외부를 두르고 있는 환상진이 고절하기 이를 데 없다 들었습니다. 살상(殺傷)의 묘까지 담고 있는 것인지요?”
“대공자의 검공이 무척 뛰어나다는 말이 돌던데, 기연을 얻으신 것입니까?”
서로 앞다퉈 물음을 던져왔다.
후공은 그저 두루뭉술하게 답하며 다른 문파에 공로를 넘겼다.
“강호의 소문은 과장되었습니다. 천화서고는 본시 무가가 아니며 저 또한 대단치 않습니다. 서문세가를 막아선 건 전적으로 개방의 영웅들과 안휘 북부 명문가의 힘이었지요. 그들이 아니었다면 본 서고는 크게 곤혹을 치렀을 겁니다.”
그러자 은앙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럼, 고럼, 우리 개방이 다했지. 에헴~.”
“뭐래? 우리 백화장이 다했다던데! 하여튼 개방은 아무 데나 숟가락을 얹지.”
거만하게 으스대는 은앙개를 묘빙빙이 쏘아붙였다.
후공은 내심 코웃음쳤다.
‘빙빙도 제법 눈치가 늘었네.’
이놈들은 자신의 의도를 파악하고 나름 보조를 맞춰준다고 이러고 있는 것이다. 개방 녀석들의 상황판단이야 그렇다 쳐도 묘빙빙 또한 눈치 빠르게 반응한 걸 보면, 천공단과의 생활이 헛된 것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거기에 소천개도 참전했다.
“있잖아. 그냥 천화서고는 개허접해. 어떻게 좀 해보라며 발만 동동 구르지. 그거 알아요? 서문가주 막타도 우리 개방이 쳤어요. 냠냠냠…….”
“하하하!”
뻘소리겠거니 방심하다 후공이 터져버렸다.
정녕 못 말린다. 정녕 이런 점이 개방의 매력이 아닌가.
미워하기 힘들다.
소천개의 말이 아예 없던 이야기를 지어낸 것도 아닌 데다 당시 상황이 떠오르면서 후공은 좀처럼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곁에 앉은 칠미단혼도 이미 은앙개를 통해 당시의 사정을 들은 바 있어 껄껄거리며 웃어젖혔다.
“…….”
“……!”
“……?”
그러나 지켜보는 이들은 반신반의했다.
허접하다는 말에 발끈하지 않으니 그저 농담이 오고 갔나 싶다가도, 천화서고가 무슨 수로 서문세가를 상대할 수 있었겠나 싶은 현실 인식이 들면서는 역시 외부의 힘이 전부였지 않나 싶기도 했다.
- 언니, 어때 보여요?
산동악가 악영산이 전음을 발했다.
남궁소혜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저었다.
- 거짓말이야.
- 왜요? 언니는 뭔가 다른 게 보여요?
- 본가의 호법 때문에. 저렇게 웃는 분이 아니거든. 계속 놀라게 되네. 사람이 변했어.
- 원래는 어떤데요?
- 웃는 걸 오늘 처음 봐.
- 정말요? 무슨 일을 겪은 걸까요?
- 응, 분명해. 제갈혜가 내게 해준 말이 있거든.
- 제갈 언니가요?
- 그래. 맹주가 그랬대. 강호인이 갑자기 변하면 두 가지 경우뿐이라고. 첫째는 처맞은 거고, 둘째는 약을 한 경우라고.
- 뭐야, 그럼 약을 했단 거잖아요. 약왕문도 멀지 않고.
- 무슨 소리니. 맞은 거지.
- 설마요.
- 시험해보면 좋겠는데.
- 제가 팽 공자에게 부탁해볼까요?
- 그럴까?
그렇게 정리된 전음.
악영산은 다시금 은밀하게 팽무결에게 전음을 발했다. 팽무결은 이어 언교운과 의견을 나눴다.
그때 후공은 황보중선, 사마강과 한담을 나누는 중에 넌지시 돌려 물으면서 궁금히 여기던 부분을 해소하고 있었다.
제갈세가의 근황과 천룡대전 참석자에 대한 것으로,
돌아온 대답은 짐작한 대로였다.
금번 천룡대전에 제갈세가에서는 두 명의 장로만 참석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황보중선이 말을 보탰다.
“무림맹주 후공은 들어보셨을 테죠? 그 후공 때문입니다. 근자에 운명을 달리하셨는데, 그 충격에서 제갈세가가 아직 벗어나지 못한 상태입니다. 후공과 제갈세가의 관계가 그만큼 각별했으니까요. 일체 외부 활동이 없을 뿐 아니라, 제갈 군사도 맹을 떠난 뒤로는 거의 칩거상태라고 들었습니다.”
“흠,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후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그럴 시기일 테지.
시간만이 약이다. 1년여 정도는 지나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천잠의 아이들도,
제갈세가도.
그 와중에 후공은 좌중의 분위기가 미묘해진 것을 감지했다.
남궁소예와 악영산의 눈동자가 바쁘고 입술을 달싹여대는 것이 전음을 교환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이젠 팽무결과 언교운으로까지 번져가는 모양새가 뭔가 꾸미는 것 같다.
‘녀석들, 무슨 꿍꿍이를 부리려나 보구나.’
한창때다.
이 나이 때는 이것저것 재는 것보다 질러보는 것이 좋다.
물론 이 꿍꿍이의 대상은 자신일 터.
대충 예상되기도 하여 느긋하게 바라보자니,
“대공자.”
“…….”
진주언가의 언교운이 나섰다.
“천화서고의 무공실력을 내심 기대했거늘 보잘것없다 하니 이 언모는 크게 실망했습니다.”
“…….”
시작된 모양이다.
언교운이 살짝 입매를 비틀며 말을 이었다.
“범 형, 실망의 마음도 해소할 겸 제가 술 한잔 따라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후공이 잔을 들었다.
언교운이 술병을 잡고 기울였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술은 한 방울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어라? 이상한 일이군요. 술은 가득한데 술이 안 나옵니다그려.”
언교운이 조소를 머금은 채 갸웃거렸다.
후공은 순간 피식할 뻔했다.
‘녀석, 어설프면서도 제법이군.’
어설픔이란,
후공은 언교운을 알고 있는 것이다.
진주언가를 방문했을 때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교운은 성정이 온화하고 예의 바름이 지나칠 정도여서, 도리어 험한 강호를 어찌 헤쳐나갈지 걱정될 지경이었다.
성정이 천화서고의 막내 부몽과 흡사했다.
그렇다 보니, 언교운이 입매를 비튼다고 비틀었지만 어설프기 짝이 없는 것이다. 사람이 안 하던 걸 하면 이런 식이 된다.
그런 가운데 제법이라 여긴 건,
언교운이 내력을 이용해 술병 안의 술을 휘감아 술이 한 방울도 흘러내리지 않게 유지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인(引)’과 ‘막(膜)’의 묘용이다.
이를 수련하기 위해 각 문파가 흔히 쓰는 수련법은 물이다.
손바닥을 펴 물을 고이게 하고 그 상태에서 거칠게 흔들어도 물이 손아귀를 벗어나지 않으면 인과 막의 결에 이르렀다 본다. 일정 수준을 넘어선 뒤부터는 검법이든 장법이든 이 묘용이 없이는 더 나아갈 수 없다. 여기에는 섬세한 내력 운용이 필수적이다.
한데 지금 언교운은,
그보다 더 나아갔음을 증명해 보이고 있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