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88화 (88/460)

88화. 난 젊어졌단다.

진짜 거지같네.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대사형씩이나 돼서 모른 척이라니. 그렇게 외면당한 은앙개와 소천개가 취운개를 원망스럽게 노려봤다.

그제야 취운개가 사제들을 돌아봤다.

“뭐야! 사랑스런 내 사제들이 왔었네!”

“어어! 헤헤헤!”

“으헤헤헤!”

바로 원망이 눈 녹듯 사라진 두 거지가 헤벌쭉 웃었다.

“이야~~ 얼마나 잘 처먹고 다녔는지, 니놈들 때깔이 아주 장난 아니게 곱다야.”

“사형, 무슨 소리야. 남궁세가에서 많이 먹으려고 오늘로 굶은 지 열흘째야.”

“맞아, 대사형. 나 현기증 나.”

“워워~ 개소리들 집어치우시고요.”

그러는 사이 후공은 하나의 시선과 마주쳤다.

저 멀리 전각 앞이다.

오십대 중반, 안광에 정기가 흐르는 이.

남궁세가의 가주였다.

‘남궁학, 넌 이제 제법 늙은 태가 나는구나.’

자신과는 한 배분의 격차.

30년에 가까운 나이 차여서 후공은 남궁학을 늘 애송이로 보았는데, 오늘 보니 흰머리가 유독 돋보여 새삼스러웠다.

‘후후, 하지만 난 젊어졌단다.’

***

남궁가주의 집무실.

칠비단혼이 경위를 보고했다.

보고의 시작점은 약왕문에서부터였고, 내용은 세밀했다.

남궁가주는 들을 뿐 내내 말이 없었다.

그가 경청하고 있음은 번뜩이는 그의 안광이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어느 부분에서는 안광이 은은했다가 또 한 번씩 격동되었음인지 안광이 폭발적인 기세를 뿜어냈다.

그 안광 속에서.

칠비단혼은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매장되었다가, 부활했으며, 건달들을 만났고 이후 용선각에 이르면서 보고는 끝을 향해 달려가,

“죄송합니다.”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 끝맺었다.

그리고 머리를 조아린 채 이제부터 쏟아져나올 분노를 기다렸다. 이번 일은 명백히 남궁세가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이다.

하지만 칠비단혼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가주는 분노 대신 긴 침묵을 지켰다.

그 침묵의 무게에 칠비단혼이 짓눌려갈 쯤,

남궁가주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무겸, 너는 내게 전부를 고하지 않았다.”

“……?”

칠비단혼이 의문을 띠었다가 바로 답했다.

“맹세컨대 그 어느 것도 더하거나 빼지 않았습니다.”

“아니.”

“…….”

“말이란 건 참으로 신묘하다. 부드러운 세 치 혀에서 나오나 칼날이 되기도, 독이 되기도 한다. 한편으론 몇 마디 말로 씻은 듯 병이 치유되기도 하지.”

“무슨 말씀이온지.”

칠비단혼이 머리를 조아렸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이 뭘 빼놓았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듣는 입장에서 바로 머리에 그림이 떠오를 만큼 보고는 상세했고, 일체의 누락이 없었다.

“너의 말에는 그에 대한 원망이 없다. 너는 분노하거나 울화를 삼키지도 않는군.”

‘그’가 누구를 칭하는지는 명확하다.

천화서고 대공자!

비로소 칠비단혼은 이해했다.

가주는 묻고 있는 것이다.

그 지경이 되었으면서 어찌 담담하냐고,

어떻게 그저 순응할 수 있느냐고.

“내 너를 알기에 너의 말에 가감이 없음도 안다.”

“…….”

“의아한 점은 너의 심중. 어찌 당연한 일인 양 받아들이고 도리어 그에게 감복한 것처럼 보인단 말이냐. 무엇이 널 그리 만든 것이냐?”

“…….”

똑같은 말이라도 풍겨나옴은 다르다.

‘있는 그대로를 말한다고 생각했건만…….’

자신도 모르게 천화서고 대공자를 감쌌던 모양이다.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대공자가 가주의 분노를 사지 않길 바랐던 모양이다.

칠비단혼은 떠올려보았다.

‘왜 그랬을까?’

자신이 먼저 두 번의 살격을 펼친 것 때문인가?

애초부터 강요요, 무례였기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파묻혔을 동안의 공포가 각인되어서? 무공의 격차에 압도당해서? 모든 것이 계산되었음을 깨닫고 경이에 사로잡혀서? 혹은 개방의 아이들이나 백화장의 묘 소저와도 스스럼없이 지내는 그의 인간미 때문에?

아니다.

칠비단혼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방금 떠올린 것들의 총합일수도 있지만. 아니다.

이건 그 너머다.

‘대공자 자체.’

약왕문 부문주가 그랬다.

대공자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오랫동안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작 한다는 소리가 ‘멋진 사람입니다’였다. 당시 매우 언짢았는데 지금에 와선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겠다 이해되는 것은 무엇인가.

긴 생각의 끝에 칠비단혼이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흠…….”

남궁가주가 침음성을 흘렸다.

그의 눈이 깊어졌다.

“무겸, 이번 일은 함구하여라.”

“네.”

“되었다. 나가 보아라.”

“……네.”

홀로 남은 남궁학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턱을 어루만졌다. 격동한 마음이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이윽고 한숨처럼 그가 말을 흘렸다.

“대단하군. 대단해…….”

그는 진심 감탄했다.

칠비단혼이 겪은 일을 생각할수록 천화서고 대공자라는 놈에게 감탄을 금할 길이 없었다.

‘강호에 물건이 나왔구나.’

그냥 물건이 아니다. 매우 특별한 물건이다.

곱씹을수록 어찌된 게 점점 더 새롭고 대단하게 느껴지니, 정녕 탐나는 재목이 아닐 수 없다.

먼저, 칠비단혼은 아쉽게 패배한 것이 아니다.

완패였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천화서고 대공자의 현 무공 수준이 증명되었을 뿐 아니라, 향후 어디까지 성장할지 모른다는 점이다.

현 강호의 십대세가의 후기지수들은 물론이고 구대문파의 신룡들을 훌쩍 뛰어넘었음을 의미한다. 젊은 세대에서 그와 견줄 수 있는 이가 누가 있을까.

더 놀라운 점은 기세다.

그대로 묻어버렸다. 모르고 한 일이 아니다. ‘남궁세가’임을 인지한 후 벌인 일이니, 명성에 주눅 드는 자가 아니다.

정녕 멋지지 아니한가.

이어지는 후속조치는 깔끔하다.

무례는 무례대로 응징한 후로 얼버무리거나 회피하지 않고 정면돌파를 택해 직접 찾아왔으니, 이는 남자다.

또한 사람을 다룰 줄 아는 자이기도 하다.

사람을 다룬다는 건 배워야겠다고 하여 습득되는 것이 아니다. 무공과 기세보다 더 난해한 영역이다. 한데 천화서고 대공자는 이미 그 영역 속에 있는 듯하지 않는가.

그가 아는 칠비단혼은 감복을 모르는 자.

그런 칠비단혼이 은연 중 감싸고 돌았으며 ‘잘 모르겠다’라고 말한 건 거의 극찬인 셈이다.

그 부분은 천공단이란 이들의 면면으로도 입증된다.

금적자, 항마삼협, 무산쌍웅.

떠올리는 것만으로 머리가 아파오는 인물들이다.

그들이 동행이 가능한 사람들이었다는 걸,

남궁학은 보고를 듣는 중에 처음 알았다. 그게 되는 것이었다니.

한데 그들 중 하나도 아니고 그들 모두와 동행이 가능했다는 점에서, 천화서고 대공자는 자신이 사람을 다루는 재주가 범상치 않음을 과시한 것이나 다름없다.

거기에 잠시 들렀다는 약왕문조차 무슨 조화인지 천화서고 대공자를 아끼는 마음을 대놓고 내비쳤다 하고, 용선각에서는 모두를 아우르는 면모를 보였으며, 세가로 들어섰을 때 지켜본 바로는 친화력은 물론 두루 인맥까지 탄탄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 보물.

천화서고 대공자는,

향후 강호에 거물이 된다. 그렇다면 곁에 두어야 한다. 손아귀에 쥐어야 한다. 남궁학은 그런 마음이 점점 커져갔다.

그리고 그에겐 확실한 방법이 있었다.

“후후후……. 딸을 낳길 잘했지.”

그의 딸이 어디 보통 딸인가.

소예는 천하에 경국지색으로 손꼽히는 미모를 지녔다. 이 세상에 미녀를 싫어하는 남자가 있을 리가.

천화서고라면 혼약 상대로도 근사하다.

학식, 재력, 잠재력, 명성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남궁학은 어느샌가 소예와 혼인하여 자신을 향해 ‘아버님’이라고 부르는 천화서고 대공자의 모습이 떠올라 흐뭇함을 참을 길이 없었다.

혼사는 큰 규모로 치러야겠지.

천룡대전보다 더 크게.

아이는 다섯만 낳으면 딱 좋겠구나. 손자들의 이름은 뭘로 정해야 할까. 남궁손, 남궁미…… 아, 범가였지. 범손, 범미…….

“으하하하하…….”

남궁학은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져 기쁨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손자 손녀를 벌써 양팔에 각각 안아들고 있는 듯하여, 하마터면 비어있는 팔을 보면서 ‘까꿍’ 해버릴 뻔했다.

하지만 웃고만 있을 순 없는 노릇.

그가 밖을 향해 엄히 명했다.

“듣거라. 당장 가서 사위…… 아니 천화서고 대공자를 불러오라.”

“네!”

곧 두 사람이 마주했다.

남궁학은 근엄한 낯빛으로 입을 열었다.

“꽤 험하게 손을 썼더군.”

“제 손속이 과했습니다.”

“그대의 눈에 남궁세가는 안중에도 없음인가.”

“그런 마음이었다면 이곳에 오지 않았을 겁니다.”

남궁학의 안광이 짙어졌다.

“나는 내 사람이 상하는 것을 그저 지켜만 보는 사람이 아니다.”

“…….”

후공은 대답 없이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는 남궁학이 어떤 인물인지 아는 것이다.

이 애송이는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드높고 속내는 깊다. 자신이 지켜본 바가 그렇고, 더하여 직접 충고해주기도 했었다.

고작 40대 초반쯤에 전대 가주에게 절대적인 신임과 역량을 인정받은 남궁학은 가주직을 승계받고 맹에 인사를 왔었다.

[맹주, 어떻게 해야 훌륭히 가문을 이끌 수 있습니까?]

[너는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

[다 잊은 듯 막막합니다.]

그때 후공이 건넨 말은 간단했다.

[후후, 그럼 기억나게 해주마.]

[…….]

[누군가의 숨통을 끊어야겠다면 그 앞에서 환하게 웃고, 이해의 범주라면 숨통을 끊을 것처럼 하여라. 사람을 얻음을 보물을 얻듯 하거라. 신병이기로 둘렀다 함은 뛰어난 인재를 곁에 두르고 있음을 의미한다.]

[명심하겠습니다.]

떠오르는 대로 뻔한 말을 해줬을 뿐인데,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그렇기에 아무 일도 없을 터였다.

도리어 이 상황은 호의로 보인다.

남궁학의 말이 이어졌다.

“남궁세가는 은원에 명확하다. 남궁세가의 손톱이 상하면 팔이 잘려나갈 것이고, 생채기가 났다면 목이 날아갈 것이다. 은혜와 원한은 구별될 것이고 몇 배로 돌아갈 것이다. 천화서고는 무엇을 택할 것인가!”

“은혜입니다.”

망설임 없는 답.

이내 남궁학은 고심하는 듯 침묵을 지켰다.

이윽고,

“곧 천룡대전. 그대에게 기회를 주도록 하지. 지켜보겠다는 의미이지, 용서한 것이 아님을 기억하라.”

“물론입니다.”

“되었다.”

“그럼.”

다시 혼자 남게 된 남궁학.

그의 입가에는 흡족한 미소가 번져갔다.

마주하고 보니 더욱 확실해졌다.

이 태연함은 무엇인가.

저항이 없으나 비굴함 면모도 없다.

그저 관조.

자신 앞에서 막연히 바라봄을 보이는 후기지수를 볼 줄이야. 이미 한 가문의 수장 같은 면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연 남궁세가의 사위답군.’

이어 남궁학은 총관과 소혜를 불렀다.

총관이 머리를 조아렸다.

“부르셨습니까.”

“천화서고 대공자와 그 일행을 동쪽 후원의 별채에 머물게 하라.”

“동…… 동쪽 후원은…….”

총관이 놀란 눈이 되어 의문을 발했으나

그의 말은 잘려나갔다.

“그리하라.”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총관이 나가자 남궁학의 시선은 딸에게 향했다.

“소예.”

“네.”

소예가 극히 조심스러운 몸가짐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너는 내일 손님을 안내하여라.”

“……?”

“손님은 천화서고 대공자다.”

“……??”

“본가의 곳곳을 천천히 둘러보며 안내하거라.”

“천……천히요?”

소혜의 눈이 빛나고 눈동자가 또르르 오갔기에 남궁학이 소맷자락을 휘저었다.

“나가봐라.”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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