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89화 (89/460)

89화. 지난밤 어린 소녀와 돌아보았다.

“언니, 무슨 일 있어요?”

악영산이 소예에게 다가갔다.

원래 두 사람은 같이 이야기 중이었다가 갑자기 소예가 불려갔던 것인데, 나온 후 소예의 상태가 이상한 것이다.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눈만 빠르게 깜박깜박댄다. 아무래도 정상이 아니었다.

“앉아 봐요. 무슨 일인데 그래요?”

둘이 한적한 곳으로 옮겨가 앉았다.

소예가 멍한 표정으로 입술만 달싹거렸다.

“나 아무래도 팔려가는 분위기야.”

“네? 팔려가다뇨?”

악영산의 눈이 동그레졌다.

언니가 누구인가. 남궁세가 가주의 딸이다. 팔려갈 일도 없고, 어느 누구든 팔라고 입을 놀렸다간 그 순간 멸문이다.

그렇다면 이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단 하나뿐이다.

정략혼인.

이해가 된 탓에 악영산이 호들갑을 떨었다. 소예의 팔을 마구 두드렸다.

“어머, 어머! 어쩜 좋아! 누군데요? 누구에게 팔ㄹ…… 아니, 누가 거론된 건데요?”

“천화서고.”

“네???”

짧은 시간 악영산이 빠르게 떠올려보고 있던 몇몇 예상 인물들의 얼굴이 그녀의 머리에서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대충,

모용세가의 모용진.

하북팽가의 팽무결.

황보세가의 황보강.

그리고 그 외 기타 등등.

한데 천화서고 대공자라니.

난데없기가 거의 날벼락 수준이었다.

이어 소예가 방금 전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경청하던 악영산이 입을 쩍 벌렸다.

“언니에게 직접 안내를 맡겼다고요? 전례가 있었어요?”

“아니.”

이번이 처음이었다.

여태껏 남궁세가를 찾아온 손님을 안내하는 건 상대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녀의 몫이 아니었다.

천하절색의 미녀는 과하게 보호되었고,

언제나 소중히 다뤄졌다.

그렇기에 천화서고 대공자를 직접 안내하라는 아버지의 말은 소예에게 의미심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소예가 피식 웃었다.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있긴 했네.”

“누구였는데요?”

“후공. 내가 다섯 살 때였나.”

“에이……. 난 또 누구라고요.”

악영산이 따라 웃었다.

상대가 무림맹주 후공이라면 다섯 살 때의 소예 언니든, 지금의 아름다운 소예 언니든 그저 영광스러운 일일 뿐이다.

하지만 천화서고 대공자는 다르지.

그가 대체 뭐라고.

“그런데 언니 말대로 어르신이 ‘천천히’라고 하신 건 말의 무게가 보통이 아닌걸요.”

“그뿐이 아니야.”

“또 뭔데요?”

“천화서고 일행을 동쪽 후원의 별채에 머물도록 배려했거든.”

“그곳이 왜요?”

“넌 몰라서 그래. 다 비슷한 것처럼 보여도 거긴 다르거든. 그곳은 강호의 거물들에게나 허락되는 곳이야. 구대문파의 장문인급이나 그 너머의 인물들, 그리고 또 그 너머의 후공 정도.”

이내 악영산이 발작을 일으켰다.

“어머, 어머! 언니, 어쩜 좋아, 어쩜 좋아요! 이거 그거. 그거잖아요!”

“응?”

“그거 모르겠어요!”

“뭔데?”

“사위 사랑은 장인 사랑!”

소예가 미간을 잔뜩 찡그리고 입술도 앙다물었다.

“농담할 기분 아니야.”

“……미안해요, 언니.”

“휴우……. 이런 날이 내게 올 줄이야.”

악영산이 갸웃했다.

“원래 천화서고와는 교류가 있었던 거예요?”

“전혀.”

“와아, 그럼 단번에 어르신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뜻이네요.”

“그렇지.”

“묘한걸요. 만약 호법이 맞고 온 것이 틀림없다면 무공이 뛰어나다는 건 인정할 수 있어도, 그 이유라면 도리어 헛간을 배정해야 하잖아요. 다른 뭔가가 있다는 뜻인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모르지. 근데 넌 어떤 느낌이었니?”

“천화서고 대공자요?”

“그래.”

“으음…….”

악영산이 떠올리느라 눈동자를 위로 올렸다.

“뭐랄까. 활달하면서도 근사한 느낌? 또…… 애매하긴 한데, 약간 사람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느낌이었어요. 거만하다는 것과는 성격이 다른…….”

소예가 장난스럽게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너, 마음에 들었구나?”

“언니도 참. 그런 게 어딨어요.”

“맞아. 사람을 어떻게 잠깐 보고 알겠어.”

“그럼요.”

소예는 천화서고 대공자를 떠올렸다.

용선각에서 모두에게 술을 따르던 모습.

근사하긴 했다.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려 해도 돋보이는 이가 있는데, 그런 사람으로 보였다.

‘짜증나네.’

**

일행은 동쪽 후원으로 안내되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너무도 뜻밖이고 경탄스러워, 천공단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우와와, 쩔어!”

“우워워, 여기 뭔데? 너무 멋지잖아.”

“아니 왜 남궁세가에 무릉도원이 있는 건데! 진짜 우리가 여기에서 지낸다고?”

화려한 전각과 잘 가꿔진 드넓은 정원.

거기에 정취가 깃든 연못과 그 중앙의 정자. 그것들을 잇는 구름다리까지 조화롭고 멋들어진 풍광이었다. 주변을 두르고 있는 푸른 소나무도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다들 입을 다물지 못하고 좋아 죽긴 했지만, 당연하게도 의구심도 떠올렸다.

“형아야,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우리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크흠…….”

후공도 동감했다.

진작에 들어서면서부터 뚱해있었다.

‘여길?’ 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이곳의 특별함이야 후공이 어찌 모르겠는가.

남궁세가에 올 때면 늘 자신이 머물렀던 곳이다. 하지만 지금 자신은 무림맹주가 아니고 천화서고의 대공자이거늘.

은앙개가 입을 열었다.

“혹시 이거 그건가?”

“뭐?”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는 거.”

“하하, 말도 안 돼. 바보 멍청이에다 거지 사형.”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배려라기엔 과하고, 배려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다 후공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갸웃했다.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몸을 쭉 훑어봤다.

‘……?’

젊네? 배도 안 나왔고.

얼굴에 주름이 없고 머릿결이 부드러운 건 안 봐도 당연한 것이고.

‘청년…….’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후공은 설마하면서도 헛웃음이 터졌다.

‘아니겠지. 남궁학 고 녀석이 엉뚱한 면이 있긴 해도, 설마…….’

**

밤이 무르익어갈 쯤.

후공은 달빛 아래 밤을 거닐었다.

별채를 두르고 있는 소나무 길은 산책하기 좋다.

은은하게 풍겨오는 솔향도 만족스럽고.

깔깔깔, 웃음소리가 들려 후공은 시선을 주었다.

전각의 지붕 위.

분타주 취운개의 합류로 완전체가 된 거지들이 떼로 모여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며 회포를 풀고 있었다.

‘후후, 웃기는 놈들.’

저것들은 왜 늘 지붕에 올라가 있는 걸까.

모를 일이다. 방도 많고 정원도 넓은데, 고양이도 아닌 주제에 틈만 나면 지붕이라니.

지붕 위 거지 떼 곁에는 묘빙빙도 가세해 있었는데, 웃고 떠드는 것이 원래부터 개방 소속이었던 것처럼 이질감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뽀얀 살결과 깨끗한 옷만 아니면,

같은 개방도라고 해도 믿을 만한 쾌활함이었다.

“양소.”

“네, 공자님.”

한 걸음 떨어져 따르던 양소가 머리를 조아리며 분부를 기다렸다.

“남궁세가 쪽을 통해 내가 난화서원의 묵 공자를 보고자 한다고 전하여라.”

“네.”

약왕문의 보물과 그 뒷이야기.

그에 관하여는 묵영도 궁금해하고 있을 터.

묵영은 들을 자격이 있다.

시간이 걸리긴 했어도 묵영은 암호 문서를 결국 해독해냈지 않았던가. 게다가 번잡스러움을 피하고 싶어 넌지시 돌려 말한 말을 바로 알아듣고, 이유도 묻지 않고 흔쾌히 떠나주기까지 했다.

기다리는 동안 후공은 장소를 옮겼다.

구름다리를 건넜다.

연못 한가운데 세워진 정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자니,

첨벙, 첨벙.

연못 위 연꽃을 넘나드는 개구리가 물소리를 냈다.

오랜만이다.

이곳도, 이 소리도.

‘그때도 이랬지.’

낮에 소예를 만나서인가.

후공은 마치 눈앞에 어릴 적의 소예가 보이는 듯하여 피식 웃고 말았다.

그때 소예가 네 살이었던가.

다섯 살이었던가.

지금은 떠난 남궁세가의 전대 가주 남궁선과 한담을 나누고 있을 때, 어린 소예는 저도 한자리 차지하고선 두 손으로 탁자에 턱을 괴고는 눈동자를 이리 돌렸다 저리 돌렸다 하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놀아주지 않으니 이내 따분한 표정을 떠올렸다.

첨범, 첨벙.

따분함을 떨쳐준 건 개구리.

소예는 난간으로 걸어가 연못을 구경한다.

아장 아장 위치를 옮겨다닌다.

개구리를 보고 있다가 개구리가 뛰어 위치를 옮기면 따라다녔다.

그러다 호기심 많은 어린 아이는 개구리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나 보다. 난간을 딛고 타고 넘으려 했다. 균형을 잃고 떨어지기 직전, 후공은 손을 뻗어 부드럽게 끌어와 안아들었다.

허공섭물.

소예는 허공에 둥실 떠올라 유유히 끌려가는 것이 재밌었는지, 그때부터는 개구리는 잊어버리고 무조건 난간을 넘으려고 들었다.

그때마다 허공섭물로 끌어오면 깔깔거리면서 ‘또. 또. 또 해’ 라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어느 날은 집을 구경시켜주겠다던 소예.

구석구석 이미 다 아는데,

앞장 선 채로 빨리 오라며 손짓하는 앙증맞은 모습을 보고 있으면 따라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얼마 못 가 절반도 못 돌았을 때,

‘힘드니까 여기까지.’

이마에 땀도 안 맺혔으면서 땀을 닦는 척하며 웃던 어린 소예의 모습이, 그 표정이 눈앞에 있는 듯 선명히 떠오른다.

세월이 참 빠르기도 하지.

그 어린 꼬마가 어엿한 숙녀가 되었다니.

후공의 추억은 그쯤에서 그쳤다.

“공자님, 묵 공자가 도착했습니다.”

“모셔라.”

잠시 후,

후공은 묵영과 마주했다.

묵영이 약왕문을 떠나고 난 후 벌어진 일들.

약왕문의 보물 월토기에 대해 들려주었다. 이야기가 천공단의 영악초 복용으로 이어지니, 묵영은 약을 한 것처럼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후공은 해도 될 말과 꺼낼 필요가 없는 말을 구별해 들려주었고, 그럼에도 서로 간에 많은 이야기가 오가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남궁세가에서의 첫 번째 밤은,

그렇게 빠르게 깊어갔다.

**

다음 날 오전.

소예가 동쪽 후원을 찾았다.

맞이한 건 송화였다.

“소저께서 어인 일로 이곳까지…….”

“대공자는 안에 계시느냐?”

“네, 명상 중이십니다.”

“다름이 아니라 본 세가에 온 귀한 손님이니, 내 오늘 너의 주인과 일행들을 두루 안내하려 한다.”

“네?”

송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바로 이해가 되지 않아 잠시 멍해졌다.

선녀가 강림한 듯한 미모의 남궁가주의 딸이 직접 안내를 하겠다니. 송화로서는 주인이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안이 벙벙했다.

‘분명히…… 파묻었는데…….’

게다가 일행에는 거지들도 있지 않는가.

하지만 이유를 물을 수는 없는 노릇.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송화가 공손히 예를 갖추고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다급히 달려가 주인 앞에 섰다.

“공자님, 공자님! 지금…….”

“진정하거라.”

“그게 아니구요. 밖에 누가 왔냐면…….”

“들었다.”

후공이 좌정한 채 나직이 말했다.

밖에서 나누던 대화소리를 듣고 후공도 이미 ‘으흥?’ 하며 갸웃했다가 이내 상황을 이해한 터였다.

‘남궁학 이놈이 정녕…….’

이곳, 동쪽 후원도 과하다 싶어 설마 했거늘.

이번엔 한술 더 떠 소예에게 안내를 맡겼으니, 이는 소예와 천화서고 대공자인 자신을 엮어 보려는 속셈임이 확실해졌다.

한 걸음, 한 걸음씩 가까워지도록.

알아보는 안목이라면 칭찬해줄 만하다.

신병이기로 두름은 인재를 곁에 두는 것이라는 말도 명심하고 있는 것이겠지.

후후, 하지만 가당치도 않다.

문제라면 내가 후공이기 때문이지.

생각이 거기에 미치니, 후공은 절로 웃음이 나 입가에 미소가 번져갔다.

“공자님, 어서 채비를…….”

“송화야.”

“네, 공자님.”

“이렇게 전하거라.”

“……?”

송화가 갸웃했다.

주인의 한쪽 입꼬리가 즐겁다는 듯 올라가 있는 것이다.

“나는 지난밤 어린 소녀와 함께 이미 남궁세가를 돌아보았노라고.”

그리고,

그 시간은 유쾌했노라고.

물론 이어진 뒷말은 후공의 마음속에서 울렸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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