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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화 서고 대공자-90화 (90/460)

90화. 천향삼주

송화는 멍청히 눈을 깜박거렸다.

어린 소녀? 어린 아이?

“저기…… 공자님……. 그게 무슨 말씀이실까요?

그녀는 분명히 본 것이다.

지난밤 주인은 난화서원의 묵 공자와 함께 연못 위에서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나누셨고, 그 후 바로 침소에 들었다.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또 그녀는 아직까지도 예전의 습관이 남아, 새벽에도 침소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주인이 평안히 잠을 청하고 계시면 그제야 마음이 놓이곤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난 새벽의 주인은 평소와 달리 침상 곁에서 가부좌를 튼 채 좌정을 하고 있었다. 최근에는 잠을 줄여가며 좌정하는 시간이 늘고 있긴 하다.

하지만, 어린 소녀라니?

되묻는 송화를 향해 후공은 빙긋 웃어 보였다.

“그리 전하면 된다.”

“……네.”

송화로선 묻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토를 달지 않았다.

기억상실 전의 주인은 서늘한 두려움이어서, 눈을 마주할 때면 몸이 덜덜 떨려오고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기억상실을 겪은 후의 주인은 달랐다.

유쾌한 데다 대부분의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성향으로 변모하시어 모시기가 세상 이보다 편안할 수가 없는데, 그것과는 별개로 툭 던지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는 의미가 담겨 있음이다.

하는 일이 늘 그랬다.

역모를 꾸몄던 천화서고 총관 곽도는 어느 순간 보니 거꾸로 매달려 있었고, 설렁설렁 몇 번 오가시고 껄껄 웃다가 한심하다는 표정이 지나고 보니 서문세가가 파멸을 맞았다.

뭔 갑자기 천공단인가 하고 보니 어느새 주인은 천공단주가 되어 있었고, 최근엔 남궁세가의 호법이 주인의 눈앞에서 알랑거리다가 땅속에 파묻혀 버렸다.

그러니 다 생각이 있으실 것이다.

송화로서는 주인이 남궁세가의 소예 아가씨와 잘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지만, 그건 마음으로만 응원해야 할 일이었다.

송화가 밖으로 나가 고대로 전하니,

당연하게도 남궁소예는 어리둥절을 금치 못했다. 그녀의 미간이 깊이 파였다.

“밤에 어린 소녀와?”

“네.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소예는 당혹스러움을 감추려 안간힘을 써야 했다.

‘…….’

상상조차 못했다.

어떻게 자신의 청을 거절할 수 있지? 이 천하에 자신의 요청과 선심을 거절하는 사내가 존재할 것이라곤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

설령 지난밤에 둘러보았다 해도, 그런 적 없었다는 듯 따라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소예는 열기가 확 올라 뺨이 화끈거렸다.

아니 그보다,

안내했다는 어린 소녀는 대체 누구야?

밤에 어린 소녀라니.

남궁세가에 어린 소녀가 한둘이 아니긴 해도, 이곳 동쪽 후원을 출입할 수 있는 아이는 없다.

“그 소녀가 누구라시더냐?”

소예는 그저 궁금해서 묻는 것처럼 차분히 물었다.

송화가 마른침을 삼켰다.

소녀 같은 건 애초에 온 적도 없는 것이다.

“듣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송화가 최대한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하아, 듣지 못했다라.

남궁소예는 얼굴의 화끈거림이 심해져 당장이라도 손부채질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고 내심 분을 삭이기 바빴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대로 그냥 돌아가자니 자존심이 상하고, 한마디 쏘아붙여주자니 모양이 빠진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소예가 내심 씩씩거릴 때였다.

“누나, 우리끼리 가자!”

“이미 다 들었다구!”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소예가 돌아보다 거지들을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라버렸다.

“어멋!”

거지들이 언제부터 있었던 걸까.

기척도 없이 나타나 헤실거리고 있었다. 용선각에서 이미 인사를 나누긴 했어도, 갑자기 나타난 데다 거지들의 모습이 기괴하게 바뀐 탓에 그녀는 놀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누나 놀랐어? 미안. 헤헤……. 우리가 너무 꾸몄나?”

“남궁소저, 같이 다니기에 부끄럽지 않게끔 최선을 다해 신경 좀 썼는데, 어떻습니까?”

소예의 동공이 흔들렸다.

자연스럽게 ‘누나’가 된 것까진 이해하겠는데,

거지들의 머리 비율이 칼인 것이다.

‘가르마…….’

머리가 정확히 8대 2다.

마치 자로 잰 듯했다.

무슨 기름을 발랐는지 둘 다 머리가 무척 번들거렸다.

소천개와 은앙개가 배시시 웃다가 괜히 으스대면서 손바닥을 펴 머리를 쓸어넘기는 시늉을 했다.

‘너희들……. 왜 부끄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니? 왜?’

소예의 당혹스러움은 말로 할 수 없었지만, 그런 형편 따위 고려해 줄 거지들이 아니었다. 그저 좋아서 펄쩍펄쩍 뛰었다.

“누나, 형아는 원래 제멋대로야. 막장이지. 그니까 냅두고 얼른 가자. 빙빙 누나도 술이 덜 깨서 안 간다고 했어. 이야, 나 천룡대전에 오길 얼마나 잘한 거야. 하하하, 너무 영광이어요!”

“나도라고!”

“…….”

**

“소혜 아씨께서 동쪽 후원으로 가셨습니다.”

“알겠다.”

보고를 받은 남궁학이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드러낸 표정과 달리 그의 내심은 흐뭇하기 그지없었다. 이리저리 넌지시 의도를 내보였으니 대충 둘 다 눈치는 챘을 터.

이제 시작이다.

남녀사이란 모름지기 많이 접하고 한 마디 두 마디 대화가 쌓여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생겨나는 법이다.

더욱이 한창 때의 선남선녀라면 긴 시간이 걸리지 않을 수도 있다. 딸과 대공자 녀석이 나란히 걸으며 한 번씩 웃음이 터져나온다면 더 바랄 것 없다.

그 모습을 상상하자니 그림이 제법 나오는 듯하여 남궁학은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후후, 어디 한번 볼까.’

밖으로 나가 시선을 던졌다.

언제 봐도 어여쁜 딸이 보이고, 그 곁에 거지들이 웃으며 걷고 있…….

‘…………………….’

**

그 시각.

후공은 좌정을 이어갔다.

소예를 따라 나서지 않은 건 비단 지난 밤 어린 소예를 떠올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최근 천향의 공법에 진전이 있었다.

천향삼주로의 진입이 보인 것이다.

그동안 틈틈이 정진한 보람이 있었고, 지난 새벽에는 확실히 가닥을 잡은 터라 밀어붙여야 했다.

그로부터 반시진.

“후우우.”

깊은 숨결과 함께 눈을 떴다.

이내 후공은 검결지를 맺어 허공을 툭 건드렸다. 그건 마치 허공에 점혈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타점된 지점이 중심이 되어 아지랑이처럼 파문이 일었다.

향이 퍼져간다.

천향삼주의 진입 여부는 지금부터다.

시작은 은은한 솔향이었다.

향이 번져가는가 싶더니 바로 흙내음이 뒤따르고, 축축한 느낌의 연못 냄새가 이어지며 뒤섞였다.

후공은 눈을 지그시 감고 향을 음미하듯 맡았다.

분명 방 안인데 향취는 자연스럽게 혼합되어, 마치 연못 위 정자에 앉아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되었구나.’

후공은 흡족히 고개를 끄덕였다.

향의 혼합.

이는 천향이주를 넘어서 천향삼주에 진입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삼주에 이르면서부터는 비로소 공법을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게 된다. 그 유용함은 말로 할 수 없다.

부족한 경지의 일정 부분을 천향이 채워줄 것이다.

또 향의 혼합으로 독특하면서도 많은 종류의 향을 배합해낼 수 있게 된 것도 의미가 컸다.

예를 들어,

육각망의 악취에 영악초를 더한다면…….

‘끔찍하군.’

후공은 피식 웃고 말았다.

강호에서 개방의 구취신개가 입냄새만으로 여럿 기절시키는 기염을 토했다지만, 그딴 악취는 삼악에 비하면 꽃향기나 다름없다.

후공은 이내 검결지를 맺은 손을 휘저으며 슬쩍 당겼다. 그러자 방 안을 뒤덮던 향취가 순식간에 흡수되면서, 방 안의 냄새는 원래대로 돌아왔다.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송화와 양소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공자님.”

둘이 신속히 달려와 머리를 조아렸다.

“오냐.”

“공자님, 지금이라도 남궁 소저를…….”

미련이 남은 송화가 말을 꺼냈지만 잘려나갔다.

“그건 됐고…….”

후공이 말을 이었다.

“너흰 지금 바로 각자 새 한 마리씩을 잡아 오너라.”

“새를 요? 구우시려고요?”

“그럼 삶을까 봐?”

주인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기에 양소와 송화는 웃으며 바로 움직였다. 여태 지켜보고 겪은 바가 있다. 이는 그저 주인이 농담을 하고 있을 뿐이며, 목적은 전혀 다른 데 있는 것이다.

송화가 빨랐고, 양소가 늦었다.

둘 다 잡아온 건 참새였다.

굽지도, 삶지도 않을 것 같았기에 둘 다 산 채로 잡아왔고, 후공은 그런 모습을 기특하게 여겼다.

“어디 보자.”

후공은 송화가 붙들고 있는 참새의 목덜미를 짚었다. 참새의 겁먹은 눈이 정신없이 움직였고, 목이 꺾일 것 같은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후공은 참새의 목덜미에 천향삼주를 기반한 향을 남긴 후 손을 뗐다. 마찬가지로 양소가 잡아온 참새에게도 똑같이 천향을 남겼다.

거기엔 아무 향취도 없어서 참새들은 눈만 깜박여대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송화와 양소도 무슨 의미인지 짐작도 할 수 없음은 당연했다.

“됐다. 이제 도로 날려 보내라.”

“도로요?”

“그래, 도로.”

이내 참새 두 마리가 손아귀를 벗어났다.

힘찬 날갯짓을 하며 날아올랐다.

운이 좋았어. 다시 잡히면 끝이야, 같은 마음이라도 품은 것일까. 참새들은 후원의 소나무 숲을 벗어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참새들은 벗어나지 못했다.

시야에서는 벗어났을지언정 후공의 의식의 줄기에선 붙들려 있었다.

후공은 참새들이 어디쯤, 어느 거리만큼 날아가고 있는지 위치를 가늠해볼 수 있었다.

이는 천향의 추적술.

참새의 목덜미에는 ‘무향(無香)’이 남겨졌다.

각각 다른 종류의 무향.

그것은 오직 시전자인 후공만이 분별할 수 있으며, 후공에게만 무향이 아닌 진향이 되었다. 삼주의 공법에 이르면서 독특한 무향을 혼합해낼 수 있게 되었고, 의식과의 연계를 이룬 덕분이었다.

그리하여,

향은 보이지 않는 선이 되었다.

그 선은 상대가 멀어져도 길게 이어지니, 후공은 의식을 따라 위치를 잡아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강호의 추적술인 만리향이나 여타 추종술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비슷한 형태라면 밀교의 향선초 정도.

밀교의 법사들 중 수행이 높은 이들이 인연이 닿은 자에게 향선초를 건네곤 했는데, 곤란함에 처한 인연자가 향선초를 피우면 법사들은 그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렇기에 강호인들은 ‘향선초를 피우는 자를 건드렸다면 곧 밀교의 적이 된 것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동남방…… 백여 장 밖이라.’

후공은 거리를 가늠했다.

가늠할 수 있는 거리는 당연하게도 한계가 있다. 하지만 성취도에 따라 그 거리는 점점 늘어나게 될 터.

백여 장 정도까지 참새의 윤곽은 명확했다.

참새 두 마리는 아직까지 함께였다. 동병상련 탓이려나. 아니면 두 놈이 친구인가. 잠시 쉬는지 움직임이 없었다.

‘천향은 다룰수록 재밌구나.’

삼대 악취의 고통을 겪은 후의 추가 보답과도 같은 천향이었지만, 생각할수록 쓰임이 쏠쏠하다 싶으니 후공은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후공의 미소도 잠시였다.

인기척이 들려 돌아본 후공은,

숙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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