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재밌는 놈이 기어들어왔네.
나이는 24세. 그는 늘 적당했다.
키가 적당했고, 몸무게가 적당했고, 욕심도 적당했다.
집안은 풍족한 편이었다. 안휘 남부에서 큰 포목점을 몇 개나 가지고 있는 집안이어서, 어릴 때부터 풍족한 삶을 살아왔다. 그의 미래는 안전하게 보장되었다. 그래서 그는 도전하지 않았다. 어긋나지 않을 만큼만 부모의 바람을 충족시키며 적당히 지냈다.
적당히 술에 취하고, 적당히 건강을 유지했다. 여자도 적당히 취했다. 큰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여자의 얼굴은 따지지 않았다. 굳이 따진다면 느낌이었다. 얽매이고 싶지 않았고 가볍게 만나길 바랐다. 그래야 많은 여자를 두루 섭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밤에도 작은 욕심만 부릴 참이었다.
으캬캬캬!
문득 어디선가 이상한 웃음소리가 들려왔지만 이내 관심을 접었다.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니까.
그래, 운이 좋다.
그 밤, 거나하게 술을 걸치고 돌아가는 길에 여인이 말을 걸어왔다. 저랑 한잔 더 하지 않을래요? 그녀는 삼십 대 초반으로 보였다. 연상이다. 그럼 어떤가. 몸매가 좋다. 얼굴도 색기가 도는 것이 마음에 든다. 객잔에 들었다. 잔이 오갔다. 말이 잘 통했다. 별말 아닌데도 여자가 웃어준다. 웃어준다는 건 호감의 표시다. 잘하면 오늘 끝내주는 밤을 보낼 수도 있을 것 같다. 운이 좋은 날이다.
운이 없는 날이다.
그녀가 말했다. 오늘은 그만 일어나야겠군요. 그래, 이런 날도 있지. 세상일이라는 것이 어디 뜻대로만 될까. 이거 아쉽습니다. 다음에 언제 만날 수 있을지.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했다. 만나면 좋겠다만, 아니면 말지. 술값만 날렸네, 쌍년.
운이 좋은 날이다.
돌아설 때였다. 여인이 나직이 불렀다. 오늘 밤 같이 있어줄래요? 그는 웃었다. 물론입니다.
운이 좋은 날이다.
뜨거운 밤을 보냈다.
짜릿하고 황홀한 시간이었다.
열기가 지난 후 여인은 옷을 챙겨 입었다. 여인은 만족했다. 남자가 묻지 않았는데 먼저 말을 꺼냈다. 오늘 너무 좋았어. 자기 제법이네. 그는 대답 없이 침대에 누워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여인이 한숨 쉬듯 말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서 아쉬워.”
그는 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바빴다.
자신의 목을 움켜쥐고 있느라 바빴다.
그어진 목에서 새어나오는 피를 막으려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래도 피는 계속 손가락 사이로 뿜어져 나왔다. 여인을 향해 누구냐고, 내게 왜 이런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입이 안 떨어졌다. 흥건하게 피로 젖어가는 침대 위에서 남자는 눈이 흐릿해져 갔다. 죽어 갔다.
여인은 그 마음을 헤아렸다.
내가 누구냐고?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귀사령.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야.
그런 뒤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계속 말했다. 있잖아, 자기. 생의 마지막에 날 안아봤으니 된 거잖아. 날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
남자의 흐릿한 눈이 감길 무렵,
그의 귓속으로 마지막 한마디가 들려왔다.
“사랑해.”
*안휘 남부의 밤이 고요하게 깊어 갔다.
후공이 남궁세가에 도착한 이후 두 번째 밤이었다.
**
다음 날.
둥둥둥, 북소리와 함께 천룡대전이 열렸다.
남궁세가의 대연무장은 연회석이 되었고, 초빙된 강호인사들과 안휘 남부의 군소문파, 그리고 부근 명문가들도 참석하여 장내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한바탕 연설이 이어졌다.
천하제일인이자 맹주 사후임이 강조되었다. 혼란의 우려가 있는 시기에 십대세가 연합의 의미와 가치, 향후 굳건한 결속에 관한 내용이 줄을 이었다. 그때마다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형식적인 행사 절차가 끝나자, 아름다운 선율을 타고 세가 전역에 음률이 흘렀다. 둥그런 연회 탁자들마다 삼삼오오 둘러앉아 오찬을 즐겼고 이야기가 오갔다.
그 가운데,
‘크흠……. 정신 사납구만.’
후공은 자신이 나이가 들었음을 실감했다.
사람이 너무 많아!
번잡하다 느꼈다.
어째 점점 더 단출한 게 좋아진다. 아침부터 거의 한 시진이 넘게 연회장의 많은 인원 속에 있다 보니, 선율이 곱든 어떻든 그저 뚱해졌다.
곁에 사람들이 계속 바뀌는 것도 정신 사나움을 부추기는 요인이 되었다. 천공단의 아이들이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왔다 갔다 하는 데다, 자리가 비면 묵영이 오고 또 자리가 비었다 싶으면 용선각에서 안면을 튼 후기지수들이 말을 걸어오는 통에 정신이 여간 사나운 것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녀석들은 안 오나.’
모처럼 주변에 사람이 없이 혼자 있게 되면서 후공은 담장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아예 멀리 간 건가.
아니 사백여 장 그 언저리에 있을지도 모른다.
범위 안에 들어온다면 반가울 것 같았다.
“대공자, 누굴 기다리나?”
무림맹 안휘지부장 몽연몽이 맞은편 의자에 털썩 앉으며 물었다.
후공의 모습은 어떻게 봐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후공은 왔냐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답했다.
“참새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참새?”
난데없이 뭔 참새인가 싶어 몽연몽이 미간을 좁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후공은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근데 어쩐지 오지 않으려나 봅니다.”
몽연몽이 잠시 심각해졌다.
그러나 이내 코를 찡긋하더니 등을 의자에 한껏 기댔다.
“흐음……. 오늘 오기로 서로 이야기가 된 건가?”
“따로 약속한 건 아닙니다.”
“친한가 보구만.”
“그냥 뭐…… 서로 얼굴만 익혀두었습니다.”
“언제 소개 한번 시켜주게.”
“장담은 못 드립니다만, 이야기는 해보죠.”
“고맙네. 자네뿐이야.”
그 말을 끝으로 둘 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후공은 몽연몽이 장단을 맞추는 모습에서 제법이다 싶었고, 몽연몽은 대공자와 농담을 나누게 된 것이 좋았다.
‘호호검 녀석, 제법이군.’
후공은 문득 칠비단혼이 떠올랐다.
그놈이라면 어땠을까?
참새라는 말을 듣자마자 정색하고 아직까지 고민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세상 진지한 놈 같으니. 뭐 그 점이 녀석의 장점이자 나름 재미있는 면모이긴 하다.
“지부장께선 포기를 모르는 남자로군요.”
몽연몽이 왔다는 건 다른 이유일 리 없다.
무림맹. 인재 영입. 암호해독부.
후공은 새삼 인정하게 되었다.
이렇게 맹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놈이었을 줄이야.
“지금의 시기야말로 무림맹에 자네 같은 인재가 꼭 필요하기 때문이네.”
지금의 시기?
특이한 사건이라도 발생했던 것일까.
후공은 관심이 생겼다.
“강호에 분란이 있는 겁니까?”
“최근 크다면 큰 몇몇 사건이 있었네. 슬슬 시작되는 느낌이야. 성격 급한 놈들에게 반년은 긴 시간이니까.”
반년의 시작점이야 뻔했지만 후공은 짐짓 모르는 척 물었다.
“반년이라면?”
“후공이 떠난 후 말이네.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지만 3년이야 폭삭 망하는 걸 말하는 거고, 그 이전부터 서서히 좀 먹어 들어가는 거 아니겠나. 현 강호도 그렇네. 후공의 죽음이 확실하다 싶으니 잔뜩 웅크리고 있던 놈들이 기지개를 켜고 있달까. 더 이상 분노 조절을 하고 있을 필요가 없어진 거지. 살인귀들이 튀어나오고, 문파간의 분쟁도 빈도가 커졌네. 그중엔 영뢰각 같은 황당무계한 놈들도 있고.”
영뢰각이라. 후공은 오랜만에 떠올리는 이름이었다.
진천뢰라든지, 폭약 전문이다.
‘흠……. 얌전한 녀석들인데 무슨 일인 걸까.’
몽연몽이 말을 이었다.
“영뢰각이란 이름은 들어봤나?”
“전혀.”
“험험……. 그 사람들 말이네. 사람들이 늘 화가 나 있다네. 왜 그러는지 사람들이 아주 폭급해.”
“…….”
“거기엔 여러 설이 있는데 그중 신빙성이 높은 걸로 치면, 원래 폭죽 만들던 놈들이 폭약류를 제작하면서부터 이상해졌다는 것이 거의 강호의 정설이지.”
후공은 살짝 갸웃하면서 뚱하니 입을 내밀었다.
듣도 보도 못한 정설이었다.
“어쨌든 그놈들이 무당파에 뭔가 서운했던 건지 아니면 원한이 있었는지, 이제 후공도 없겠다 무당파를 날려버려야겠다고 생각을 한 모양이야.”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는지 모르겠군요.”
“들어보게. 이거 굉장한 이야기거든.”
몽연몽이 심각한 낯빛을 하고 말을 이었다.
“영뢰각이 무당을 날려버리겠다고 한 방법은 무당산 아래쪽부터 땅을 파는 거였다네. 산 밑에서부터 위로 뚫고 들어가 진천뢰든 뭐든 폭약류를 대량으로 매설해서 무당파를 산봉우리째 날려버리려 한 거지.”
“…….”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네. 파다 보니 암석이 너무 많은 거야. 파도 파도 잘 안 파져. 암석이 안 뚫려. 근데 또 어떡해. 이왕 시작했는데 관두기도 그렇잖아. 아깝잖나. 그니까 계속 판 거야. 근데 진짜 잘 안 파져. 암벽이 나와버리고. 시발 이거 왜 이렇게 안 파지냐? 아, 욕해서 미안하네. 어쨌든 그러다 보니 지치고 신경이 예민해져서 지들끼리 싸움이 난 거네.”
“…….”
“난 이만큼 팠는데 넌 왜 저만큼밖에 못 팠냐, 뭐 이런 식이었겠지. 그러다 무당이고 뭐고 너부터 죽여버리겠다고 하다가 그래 다 같이 죽자가 되버려서 굴 안에서 터뜨려버렸다더군. 얼마 파지도 않고 말이네. 산이 흔들리긴 한 터라 그제야 무당파도 전후 사정을 파악했는데, 화도 나고 황당무계하기도 했지만 일단은 영뢰각 놈들을 구하긴 해야 할 것 같아 고생 좀 했다더라고.”
“…….”
“들어보니 어떤가. 강호가 이 지경이라면 응당 자네 같은 인재가 맹에…….”
“있잖습니까.”
“왜 그러나?”
말이 잘리면서 몽연몽이 눈을 깜박거렸다.
“어디 아픈 겁니까?”
“……어?”
“적당히 했으면 좋겠군요.”
몽연몽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으헤헤 헤실거렸다.
“헤헤헤……. 어떻게 알았나?”
개소리인걸, 이란 말이 나직이 따라왔다.
후공은 미간을 꿈틀했다.
‘미친 새끼인가.’
어떻게 알긴,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내가 영뢰각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또 무당이 뭐가 어째? 이제 보니 몽연몽 이놈, 호호검이 아니라 완전 사기꾼이었다.
“에헴~. 난 만날 사람이 있어서 이만……. 나중에 또 보세.”
몽연몽은 있어봐야 구박만 받을 것 같은지 슬그머니 일어나 자리를 떴다. 후공은 그런 몽연몽의 뒷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다가 문득 하나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아리따운 여인이었다.
노여움과 새침함이 반반씩 묻어나는 눈빛으로 색황조처럼 매섭게 바라보고 있었다.
여인이 소예였기에,
“풋!”
후공은 차를 머금다 터져버렸다. 거지들의 가르마가 떠오르고, 원망스럽게 쏘아보는 모습에서 어째 색황조가 생각나버린 탓이었다.
‘뭐야, 저 사람!’
소예가 황급히 시선을 거뒀다.
그녀로선 눈이 마주치자마자 웃어버릴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저리 뻔뻔할 수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미안한 기색도 없이 싱글거리다니. 어제 아침 상황도 떠오르면서 그녀는 다시금 얼굴이 화끈거렸다.
- 언니, 괜찮아요?
곁에서 악영산이 전음을 발했다.
전후사정을 알고 방금 시선이 누구와 오갔는지 보았기에 영산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또한 이 좌석에는 사마희연, 황보약이 함께 자리했기에 전음을 사용했다.
- 엉망이야. 밖으로 잠깐 바람 쐬러 나갈래?
- 그래요.
소예가 찬바람을 내며 자리를 뜨는 모습에 후공은 코를 찡긋하고는 입을 다셨다.
‘크흠……. 웃으려던 게 아니었는데.’
이내 별 생각 없이 연회장을 쭈욱 둘러봤다.
천공단을 시선에 담고,
요리를 나르는 이들도 무심히 바라봤다.
빈 접시를 치우는 이들과 멀리 외곽 쪽의 무인들, 화단이며 주변을 틈틈이 정리하는 일꾼들의 모습까지 다들 열심…….
‘……?’
위화감이 스쳐 후공은 지나쳐온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거슬린 원인을 찾았다.
멀리 연회석 너머 화단 쪽에 있는 이.
사십 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사내였다.
후공은 안법인 자령안을 전개했다.
멀리 칠십여 장 너머.
자령안에 중년 일꾼의 얼굴은 순식간에 눈앞으로 끌려왔다.
사성에 이른 자령안이다.
중년 일꾼의 눈 밑 주름이며 모공까지 눈앞에 있는 것처럼 후공의 시야에 선명히 들어찼다.
얼굴은 평범하다.
온화한 미소가 맴돌고 있다.
하지만 그건,
가짜 얼굴. 역용이었다.
후공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허……. 재밌는 놈이 기어들어왔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