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94화 (94/460)

94화. 보물찾기.

그렇게 후공이 나서고,

취운개와 몽연몽 등이 내심의 긴장을 태연한 표정으로 감춘 채 각기 역용자들을 지켜보고 있을 때.

- 남궁가주.

연회장의 앞쪽.

환담 중인 가주 무리 속에서 은밀하게 전음이 흘렀다.

남궁학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전음을 발한 옆 자리, 모용가주 모용군을 바라봤다.

- 말씀하십시오.

- 천화서고 대공자 말이외다.

- 아…… 네.

- 가주께서 각별히 대하는 듯 보이오만, 이전부터 친분이 있었소이까?

- 따로 친분은 없었습니다만…… 제가 각별히 대하는 건 맞습니다.

남궁학이 미소 지었다.

갑자기 전음을 발하기에 뭔가 심각한 내용인가 싶었는데, 그저 호기심 차원으로 보여 마음이 풀어졌다. 아마도 모용가주는 동쪽 후원에 천화서고 일행의 거처를 마련해준 것이 의아했던 모양이리라.

반면 대답을 들은 모용군은 내심 갸웃했다.

‘교류나 친분이 없었는데 각별하다라.’

그로선 슬쩍 던져본 말이었는데 남궁가주가 둘러대지 않고 바로 인정하니 호기심이 더 커졌다.

그가 아는 남궁가주는 심계가 깊고 냉철한 인물이었다. 말 몇 마디에 현혹되거나 정에 이끌리는 이도 아니거늘, 어찌 처음 대한 천화서고 대공자를 각별히 여기게 된 건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는 건,

- 우리가 모르는 뭔가를 보셨나 보외다.

천화서고 대공자에 관해 드러난 바라면,

서문세가와 맞서 그 음모를 분쇄하고 압도적인 승리를 이루었다는 것과, 그 일이 계기가 되어 개방과 무림맹 지부장의 신뢰를 받고 있다는 정도였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일이긴 하다.

하지만 사람 속은 모르는 것이 아닌가.

직접 겪어보지 않은 바에야 본질을 알 수 없다. 한 사람을 온전히 평가하기엔, 표면으로 드러난 바는 언제나 단편적일 뿐이니까. 그걸 모를 리 없는 남궁가주가 망설임 없이 ‘각별’하다는 표현을 썼다는 건, 역으로 생각해보면 이미 겪어봤다는 뜻이었다.

- 허허……. 제가 살펴볼 기회나 있었겠습니까. 저는 그저 개방 분타주의 안목을 믿을 뿐입니다.

- …….

- 취운개가 예전부터 마음에 악취를 풍기는 자를 잘 알아보는 데다, 그런 자들에겐 눈길도 주지 않는 걸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가 가까이하는 사람이면 저도 가까이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맞는 말이긴 해도,

이것이 둘러대는 말임은 서로가 잘 안다.

- 그야 그렇소만, 어찌 궁금함만 더 커지는 듯하외다.

- 오늘 저녁쯤 대공자를 불러 여러 가주분들과 자리를 만들 생각이니, 그때 한번 지켜보시지요.

- 허허……. 그거 좋은 생각이오.

남궁가주가 말하길 꺼려하는 듯하니 모용군도 더 채근하지 않고 웃어넘겼다.

대화가 끊기며 잠시 어색함이 감돌았다.

모용군이 화제를 돌렸다.

- 그나저나 역용자들의 역용 수준이 놀랍소이다. 은영문의 장로들이 이 정도였소이까?

- 저도 새삼 놀랐습니다.

- 이 노부조차 사전에 정보가 없었다면 전혀 모르고 지나쳤을 것이외다.

이번 천룡대전에는 새로운 경연이 추가되었다.

역용자를 찾아내야 한다.

일명 보물찾기.

안법의 경쟁이었다.

대상은 비무 참가자들.

이들은 4일간의 천룡대전 일정 속에서 역용자들을 누가 얼마나 빠르게 찾느냐로 평가될 터였다. 그리하여 지금 이 연회장과 주변에는 역용자들이 활보하고 있음이었다.

- 가주께선 엄살이 심하십니다. 제 아무리 대단한 역용이라도 모용세가의 눈을 벗어날 수 있을 리가요.

- 아니오. 전체를 둘러본 건 아니긴 해도, 나도 여기선 고작 두 사람만 찾았을 뿐이라오.

그 말에 남궁학이 빙긋 웃었다.

모용가주는 과하게 겸손을 보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듣기 싫진 않았다. 이번 역용 평가는 자신의 제안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은영문주에게 부탁했고, 흔쾌히 응해주었다.

은영문의 장로들을 보내주었다.

그리고 지금

역용자들은 시녀일 수도,

하인일 수도,

검수들일 수도 있었다.

- 아직까진 아무도 역용을 파악하지 못한 듯하구려.

- 알아차린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긴 합니다.

- 허허……. 그렇긴 하오.

- 슬슬 이쯤에서 후기지수들을 따로 불러 보물찾기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야겠습니다. 아이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벌써부터 궁금해지는군요.

- 하하, 동감이외다.

후기지수들에게 아직은 알리지 않았다.

그건 가주들이 원한 것이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과연 공식적으로 ‘역용자를 찾아라’라는 문제 제시를 듣기 전에 사전 정보 없이 역용을 파악하는 후기지수들이 나올 것인지 궁금해했다. 그랬으면 좋겠다고 다들 바랐다.

그런 일환으로,

은영문 장로들은 의도적으로 비무에 참가하는 후기지수들의 주변을 한 번씩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였다.

누구도 이상징후를 발견한 모습이 아니었다.

발견했다면 이미 달려왔으리라.

실력이 부족하다고 탓할 순 없었다.

그만큼 은영문의 역용이 훌륭한 데다, 문제를 인지한 다음 찾는 것과 아예 영문을 모르는 상태에서 알아내는 건 차원이 다른 것이다.

‘후후……. 저들조차 태평하지 않는가.’

남궁학이 시선을 돌려 두 사람을 바라봤다.

취운개와 몽연몽.

취운개는 양손에 닭다리 하나씩을 들고 게걸스럽게 뜯으며 서성이고 있었고, 몽연몽도 저만치 다른 한쪽에서 지루한 듯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건 어떻게 봐도 눈치는커녕 아무 것도 모르는 모습이었기에 남궁학은 옅게 미소를 머금었다.

‘하긴 누가 짐작이나 할까. 이곳이 남궁세가요, 어떤 정보도 주어지지 않았으니.’

듣게 되면 놀랄 것이다.

그건 후기지수들도 마찬가지일 테지. 이 일로 모두들 자신이 강호에 몸담고 있음을 자각하고, 경각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남궁학은 생각했다.

언제,

어느 곳에 있든,

그곳이 가장 안전해 보이는 곳이라도

언제나 강호라는 것.

암계와 모략은 멀리 있지 않다는 것.

그래서 늘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을, 후기지수들이 한 번쯤 떠올려보는 계기가 되길 바랐다.

- 두 사람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긴 해야겠습니다만…….

- 두 사람이라니요?

모용군이 갸웃했다.

남궁학이 미소 지었다.

- 취운개와 호호검 말입니다. 꽤나 놀라겠지요?

- 하하하, 그 말씀이었소이까. 난 두 사람의 표정은 보고 싶지 않구려.

**

그 시각,

남궁세가를 벗어난 은영문 장로는 번화가로 접어들었다.

천천히 걸었다.

왕래하는 인파 속에 섞여 들어갔다.

그 안에서 그의 모습은 서서히 바뀌어갔다.

등이 굽고 어수룩한 중년 일꾼의 모습이었던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변해갔다.

굽은 등이 서서히 꼿꼿이 펴지고, 어눌한 걸음걸이도 점차 힘차졌다. 얼굴에도 주름이 한 겹 한 겹 늘어갔다. 흑발은 반백이 되었다가 점차 완연히 백발로 물들어갔다.

이십여 장을 나아가면서는

중년에서 노중년으로,

오십여 장을 걸으면서는 어느덧 노인이 되었다.

오고가는 사람들 틈 속에서 그의 변모는 매우 느리고 교묘하기 이를 데 없어 곁을 지나가는 사람도, 마주 오는 사람도 그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건 그 부근에 있던,

남궁소예와 악영산도 마찬가지였다.

“천화서고 대공자는 대체 왜 날 보자마자 웃어버린 걸까?”

“언니, 답이 어딨겠어요. 그냥 사람이 이상한 거잖아요. 사람이 못됐어요, 아주.”

“역시 그런 것이겠지?”

“아무렴요. 언니가 선의를 베풀 땐 거절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지들과 함께 색황조를 보러 간 걸 생각해봐요.”

“맞아, 정말 가까이 해선 안 될 사람이야. 아버지는 대체 뭘 보고 마음이 동하신 건지.”

번화가 주루의 2층 창가.

두 여인은 창밖을 한 번씩 내려다보긴 했어도, ‘천화서고 대공자’를 성토하느라 은영문 장로 구환이 역용을 해제하며 그녀들의 바로 아래쪽으로 걸어오고 있음에도 변화를 알아보지 못했다.

곧 은영문 장로는 객잔으로 들어갔다.

소예와 영산의 맞은편 건물이었다.

점소이가 구환을 알아봤다. 3층에 묵고 있는 객방 손님인 걸 떠올리고는 인사를 건넸다. 장로 구환은 그저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자신의 객방으로 향했다.

‘일 식경 정도면 되겠지.’

구환은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가부좌를 틀었고, 운기행공에 들어갔다.

남궁세가에서 오늘 요구한 건 극상의 역용 유지.

역용 수준을 극상으로 유지하는 데는 내공 소모가 크고, 피로도가 극심해진다.

극상 상태에서는 한 시진(약 2시간)이 한계.

그렇기에 기운을 회복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자신이 서둘러 회복한 다음 되돌아가야 다른 장로들도 회복 시간을 갖게 될 터였다.

그렇게 구환이 운기에 들었다.

겨우 반각이 지났을까.

구환의 객방 문 앞에는 한 청년이 서 있었다.

천향을 따라온 후공이었다.

후공은 문의 틈새로 빗장이 채워진 것을 보며 검결지를 맺어 그 틈새를 위에서 아래로 그었다.

서걱.

나무 빗장이 매끈하게 두 동강나며 덜렁거렸다.

그 즉시 안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옷자락을 파라락 펄럭이며 은영문 장로 구환이 튕겨지듯 몸을 일으켜갔다.

“웨, 웬 놈이냐!”

“……?”

후공은 문을 열려다 말고 미간을 좁혔다.

‘뭐지?’

상대의 반응이 당혹스러웠다.

파라락 허둥대는 소리,

그리고 겁먹은 목소리.

허둥댐은 이제야 알아차렸다는 뜻이며, 겁먹은 목소리는 심약하다는 고백이었다. 문밖에서도 상대의 허접함이 고스란히 느껴진 탓에 후공은 뚱해지고 말았다.

‘뭘까……? 고작 이 정도의 배짱과 실력으로 남궁세가에 스며들었다고?’

말이 안 된다.

실력과 상황이 어긋나 있었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힘의 불균형. 그로 인해 발생한 간극이 너무 크다. 그 여백을 메꾸고 있는 건 무엇일까. 이놈들의 뒤에 무엇이 있는 건가.

후공은 의문을 갈무리하고 문을 열었다.

드르륵.

바로 노인이 보였다.

남궁세가에서 보았던 외모는 아니었다.

하지만 천향은 그대로였기에, 이 모습이 본래의 모습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노인은 문 쪽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한껏 경계하는 눈빛이었기에 후공은 상대의 소심함에 다시 놀라버렸다.

반면,

장로 구환은 비로소 알아보고 눈이 커졌다.

“너, 너는…… 천화서고 대공자?”

“…….”

구환은 알아본 후에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진정했고 여유를 찾았다. 상대는 불청객이긴 해도 불청객이 아닌 것이다.

천화서고 대공자와 따로 인사를 나눈 건 아니었지만 얼굴은 멀리서나마 익혀둔 터였다. 투입되기 전 은영문 장로들은 세가의 후기지수들은 물론이고 그 외의 인물들까지 알아두었다. 그리고 연회장 곁길에서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서로 마주치기도 했고.

“허허허……. 이거 놀랍군. 역용을 알아차린 게 천화서고의 백면서생이라니. 천화서고에 대한 강호의 소문이 과하다 싶었거늘, 이제 보니 오히려 축소되었군.”

구환의 놀람은 진심이었다.

역용을 간파한 것도 놀라운데, 거기에 이곳까지 미행해 온 것이 아닌가.

그걸 자신은 문의 빗장이 잘려나가기까지 인기척조차 느끼지 못했으니, 신법이며 기척을 지우는 재주가 실로 경탄을 금치 못할 수준이었다.

‘이런 모습이려나. 오늘 가주들이 후기지수들에게 바랐을 모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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