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95화 (95/460)

95화. 넷, 다섯.

그럴 테지.

구환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천룡대전의 수뇌부들이 후기지수들에게 기대했던 모습이 눈앞에 있었다. 아무 정보도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천화서고 대공자처럼 대처하길 바랐으리라.

역용을 간파하고,

은밀히 추적하고,

상대를 제압해 정체와 목적을 캐내고,

그에 맞춰 다음 대응을 준비하는 것.

하지만 정작 이를 실현한 자는 엉뚱하게도 명문가의 후기지수들이 아닌, 먹물 냄새를 풍기는 젊은 서생이었다.

“겁먹은 것이 아니라면 들어와라.”

여유를 찾은 터다.

장로 구환은 짐짓 근엄한 목소리를 냈다.

당연히 겁먹은 적이 없는 후공은 태연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서며 입을 열었다.

“내가 시간 끄는 걸 좋아하지 않아.”

“……?”

“쉽게 가자. 너희들 뭐하는 놈들이냐?”

“오호……. 이런 이런……. 허허허…….”

구환이 갸웃했다가 감탄했고, 다시 너털거렸다. 나이도 어리거늘 대뜸 반말을 해서 잠시 언짢았다.

하지만 이어진 뒷말.

분명히 ‘너’가 아니라 ‘너희’라고 부른 것이다. 이는 이 애송이가 최소한 둘 이상을 찾아냈다는 뜻이 아닌가.

‘정녕 놀라운 재능이 세상에 나왔구나.’

그런 생각의 끝에 구환은 계획을 바꿨다.

일단 정체를 숨기기로 했다.

그는 이제 천화서고 대공자의 무공 수준을 알아보고 싶어졌다.

과연 안법과 신법만큼 무공에 있어서도 놀라움을 줄 것인지. 그리고 그는 결과가 기대되었다.

구환이 물었다.

“혼자 온 것이냐?”

“방금 기회가 한 번 지났다.”

장로 구환은 그 모습이 또 마음에 들어 껄껄거리고 말았다.

“너의 패기가 이 노부를 기쁘게 하는구나. 그래, 젊음은 이런 맛이 있어야지. 너는 내게 궁금한 것이 많을 테지?”

구환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면서 한 손은 뒷짐을 지고 다른 한 손은 부드럽게 앞으로 내밀며 기수식을 취했다.

그 모습에는 강호의 풍취가 물씬 풍겼고,

고수의 면모가 엿보였다.

“내 너에게 삼십 초를 허락하마.”

“…….”

“노부는 한 손만 사용하겠다. 한번 혼신의 힘을 다해 보거라. 삼십 초 안에 네가 나의 옷깃이라도 건드릴 수 있다면 그땐 무엇이든 네가 원하는 답을 들려주겠다. 물론 처음 삼 초식은 이 노부가 양보…….”

순간, 후공이 움직였다.

스윽.

*파장창!

3층 창이 박살났다.

파편과 함께 튕겨 나온 구환은 하늘을 날았다.

날개도 없는데 날았다.

그저 눈앞에 뭔가 번쩍였다 싶었는데 어느샌가 자신이 창밖을 날고 있었기에.

‘시발, 이게 어떻게 된…….’

욕이 나와버렸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어떻게 당한 거였지?

발이었나, 손이었나. 마지막 일격이 뭐였지?

훅, 하고 옆구리를 파고드는 좌장은 허초였다. 신형이 어지러워진 사이 공중에 둥실 떠오른 대공자가 기이하게 회전한 것까지만 보았는데 얼굴이 화끈해졌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창밖이다.

아니 그보다, 지금 눈앞에 뭔가 보인다.

극한 상황에선 원래 모든 게 느려지는 걸까.

바로 눈앞에서 자신의 치아 하나가 핏방울과 함께 조금씩 멀어지는 것이 보였다. 어디 가냐. 그리고 객잔 창문 안쪽에서 천화서고 대공자가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는 표정까지 어찌된 일인지 선명하게 보였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시간이 멈춘 것 같다더니, 그런 것인가.

눈물이 앞을 가려 시야가 뿌옇게 변한 순간.

쿠웅!

지면에 처박혔다.

지나던 사람들이 노인 하나가 창을 뚫고 추락한 광경에 놀라 소리치면서 소란이 일었다.

당연히 맞은편 객잔에 있던 남궁소예와 악영산도 이 광경을 목격했다.

“언니, 언니! 사람이 날아 떨어졌어요!”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저기 3층이에요, 3층. 어멋, 창가에 누가 보여요!”

“이게 다 무슨 일이지? 본가가 지척인데 감히 이런 행패를 부리는 자라니.”

심지어 지금은 천룡대전의 기간.

남궁소예가 고운 미간을 찡그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호위 검호가 머리를 숙여 보이며 명을 기다렸다.

“검호, 너는 당장 저자를…….”

“언니, 잠깐만요!”

“어? 왜?”

“그 사람이에요, 그 사람.”

“그 사람이라니 누구…… 어?”

맞은편 3층 창가로 시선을 돌린 남궁소예의 입이 쩍 벌어졌다.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눈을 마구 비벼봤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왜 천화서고 대공자가 저기 서 있는 거야?”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대공자가 창가에 발 하나를 올려놓고 뚱하니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여긴 또 언제 온 거죠?”

“아니 그보다 뭐하는 사람이길래 사람을 패고 다니는데!”

“어어…… 뛰어내려요.”

악영산과 남궁소예가 목을 길게 빼고 바라봤다.

대공자가 옷자락을 휘날리며 3층에서 훌쩍 뛰어내리는데, 몸놀림이 가볍기 그지없었다. 그러다 이내 노인의 뒷덜미를 잡아채고는 그대로 솟구쳤다.

거의 4층 높이의 지붕을 단번에 솟구쳐 올라 지붕을 딛더니 다시 몇 번 더 도약해 다른 건물의 지붕을 연달아 밟아가면서 어느샌가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신법의 경쾌함에 놀라 남궁소예와 악영산은 성토하는 것도 잊고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뭐, 뭐죠…….”

“엄청난 신법…….”

심지어 대공자는 혼자도 아니었다.

사람 하나를 한 손으로 든 채였다. 한데 도약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라짐까지 표홀하기 그지없으니, 눈으로 보았음에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

인적이 드문 골목.

처억.

짐짝 던져지듯 구환은 내려졌다.

구환이 대자로 누워 대공자를 원망스럽게 노려봤다.

오해에서 비롯되었다.

또 자신의 방심과 오만이 낳은 참극이었다.

그런 점에서 대공자의 손속이 심히 과하다 싶으니 구환으로서는 이가 갈렸다. 잘 갈리지 않아 치아가 나간 것을 떠올리니 더욱 분통이 터졌다.

하지만 후공으로선 오해고 뭐고 이제 시작이었다.

“자, 그럼 이야기를 해보자. 너는 누구?”

“이노옴! 먼저 사과부터 하거라!”

“크흠…….”

후공이 침음성을 흘렸다.

서로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실질적인 나이로 따지자면 한참 어린 녀석이 이놈이라니. 대화의 자세가 안 되어 있다.

후공은 발을 들어 구환의 가슴을 지그시 밟았다.

“끄아아아악!”

고통이 극대화되는 통점(痛點)인 탓에 구환이 지렁이처럼 발버둥치며 신음을 흘렸다.

“함부로 입을 놀리면 곤란해.”

“끄으으으으으으……. 그만, 그만. 잘못했습니다. 제발…… 그만하십쇼. 선생님, 제발요!”

이 신기는 무엇인가.

구환은 발이 아니라 송곳에 찔렸다. 송곳에 가슴이 뚫리고 휘저어지는 듯했다. 분명 그저 발을 올려놓은 것에 불과하거늘, 고통이 이루 말로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대공자의 음성이 스산하기 이를 데 없으니, 그로선 어쩔 수 없이 있는 말 없는 말 모조리 꺼내 비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그제야 발이 떨어졌고,

다시금 스산한 음성이 이어졌다.

“기회는 여기까지. 지금부터 엉뚱한 소리를 내뱉으면 구겨버린다.”

“네, 네! 물론입니다.”

구환이 황급히 대답했다.

어째서인지 구환은 더 이상 대공자가 어리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것이 일격에 날아가버려서인지, 스산한 목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대공자의 차분히 가라앉은 눈빛을 보아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몸이 그저 움츠러들었다.

죽을 수도 있다. 그런 생각도 들었다.

고집 부려 좋을 게 없었고, 구겨버린단 것도 말로 끝날 성싶지 않았다.

“자, 그래서?”

대화 준비는 제대로 된 듯하여,

후공이 물었다.

“저, 저는…… 그러니까 은영문의 장로입니다. 역용을 한 건…… 사실 남궁가주의 요청 때문에…….”

“은영문?”

“아, 아십니까? 들어보셨습니까?”

“크흠……. 그랬구나.”

“네?”

후공은 들어봤다.

그리고 바로 상황이 이해되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래서 그랬던 거구나. 쯧쯧……. 그래서 허접했던 거였어.”

구환이 퀭해지고 말았지만,

후공은 그제야 자신이 느낀 간극을 이해했다.

역용수준과 달리 무공 수준이 왜 그리 저급했는지, 왜 허둥댄 건지, 또한 그 실력으로 어찌 남궁세가를 활보한 건지 비로소 이해되었다.

그래, 은영문은 들어보았다.

은영문은 원래 그렇다고 했다.

맹의 십객 중 하나인 소향객이 했던 말도 떠올랐다.

강호의 정보를 다루는 문파 중 하나인 은영문은 역용이며 기타 잡기에 힘을 다 쏟아붓느라 무공은 형편없다며, ‘맹주, 아주 이상한 놈들이지 않습니까’라며 떠들었었다.

당시 그 말에 니놈이 더 이상하다고 말해주자, 소향객이 시무룩하니 입을 다물었던 모습도 떠올랐다.

“남궁가주의 요청이라 함은?”

“그러니까 그게 이번 천룡대전에서 후기지수들을 평가하는…….”

구환이 공손하게 모든 설명을 마쳤다.

당연하게도 후공은 입을 쓰게 다실 수밖에 없었다.

‘이런……. 그저 아이들을 평가하려는 의도였거늘…….’

물론 내막을 몰랐으니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긴 해도, 결과적으로는 판을 깨버린 꼴이었다.

그런 후공의 모습이 심각해보였고 고민하는 것처럼 보인 탓에, 구환이 오해했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저, 저기…….”

이대로 누운 채로 말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고 진실성이 전해지지 않는다 싶어, 구환은 끙끙대며 일어나 힘겹게 무릎을 꿇고 입을 열었다.

“왜 그러십니까? 정말입니다. 모두 사실입니다. 다른 음모 같은 건 없습니다. 믿어주셔야 합니다.”

“크흠…….”

이미 흥미를 잃은 후공이 툭 내뱉었다.

“믿고 있다. 한데 하나 묻자.”

“네.”

“내가 다섯 명까진 찾았다만…… 너희는 총 몇 명이 투입되었지?”

“네?”

구환이 갸웃하며 눈을 연신 깜박여댔다.

후공도 갸웃했다.

구환이 고민되는지 입술만 깨물어댄다.

“왜?”

“그러니까 그게…… 네 명입니다만.”

“응?”

“혹시 한 명은 착각하신 게 아니신지.”

“…….”

순간 후공의 안광이 강렬히 빛을 발했기에, 구환이 놀라 다급히 소리쳤다.

“왜…… 왜 그러십니까. 제, 제가 여기서 거짓말을 왜 하겠습니까. 어차피 저와 함께 남궁세가로 가실 거잖습…….”

스슷.

순식간에 눈앞엔 잔상만 남았다.

구환이 멍하니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이미 눈앞에서 천화서고 대공자의 모습은 사라진 뒤였다.

“…….”

***

남궁세가 부근.

후공은 신형을 잠시 멈췄다.

천향의 연계를 신중히 들여다봤다.

‘안에 남아있는 건 셋?’

아직 남궁세가에 남겨진 참새는 세 마리였다.

그리고 한 마리가 사라졌다.

방향은 진행해 온 방향과는 반대쪽인 남쪽.

은영문 장로일 가능성은?

없다. 장로라면 구환이 머문 북쪽 임시 숙소 쪽으로 방향을 잡았을 것이다.

남쪽의 무향은 연계가 옅어질 대로 옅어져 미세하게 느껴지는 상황. 조만간 의식 너머로 완전히 자취를 감출 터였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후공은 다시 신형을 날렸다. 이쪽에서 거리를 좁히고 들어가면 다시 의식의 연계는 뚜렷해질 것이다.

반시진 후.

후공은 용선각 부근에 있었다.

천향의 연계가 마지막으로 흐릿하게 남은 지점이 이곳이었다.

이미 용선각을 기점으로,

남쪽의 합주, 동남쪽의 합헌, 서남쪽의 하군 지역까지 관통하며 훑었다가 다시 돌아온 터였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운이 없다고 해야 할지…….’

달아난 놈의 무향은 포착되지 않았다. 이미 천향삼주의 범위 밖으로 사라진 뒤. 운이 좋다고도 볼 수 있지만, 다시 오면 운이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후공이 희미하게 웃었다.

“어쩐지 넌 다시 만나게 될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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