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한 사람이 빛났다.
천룡대전의 비무 참가자는 8명이었다.
십대세가 중 서문세가는 불참하였고, 제갈세가에서는 두 장로만 참석한 탓이었다.
그 면면은,
모용세가의 모용진, 황보세가의 황보강, 하북팽가의 팽무결, 진주언가의 언교운, 산동악가의 악번, 사마세가의 사마공, 백리세가의 백리진풍, 남궁세가의 남궁우.
그리고 지금 그들은 남궁가주의 부름에 빙 둘러앉은 채 눈을 빛내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어느덧 남궁가주의 설명은 끝을 향해 달려갔다.
“……오늘을 포함하여 4일. 역용 분별에 도움을 주실 분들은 은영문 장로들이다. 이 경연은 단순한 평가를 넘어 너희 각자에게 의미있는 시간이 될 테지. 우리의 기대도 크다는 걸 기억해라. 자, 그럼 추가로 묻고 싶은 것이 있다면 말해 보아라.”
“은영문에서 총 몇 분이 참여했는지 궁금합니다.”
모용세가의 모용진이었다.
“그 질문에는 답해줄 수 없다. 이유는 짐작이 가능하리라 믿는다. 다음 질문.”
모용진은 토를 달지 않았다.
다른 이들도 바로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숫자의 모호함은 방심의 기회를 차단하고 오류의 확률을 높이며 분별을 어렵게 하니, 평가의 정확성은 높아지는 것이다.
“역용의 수준은 첫날과 마지막 날까지 동일한 것인지요.”
이번에 물은 건 사마세가의 사마공이었다.
남궁학이 희미하게 미소를 띠었다.
“좋은 질문이다. 답을 먼저 말하자면, 동일하지 않다. 첫날인 오늘은 극상 수준, 내일은 상급, 비무가 있는 마지막 4일 째는 최하 수준이 된다. 그렇게 4일에 걸쳐 하루하루 순차적으로 역용 수준은 낮춰질 것이다.”
순간 후기지수들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대비가 너무도 분명해진 탓이다.
가장 빠르게 찾는다면 큰 영광을 얻게 될 터. 하지만 마지막 4일째에 가서야 알아낸다면? 커다란 오점이 된다. 어쩌면 또 다른 별호인 양 꼬리표가 되어 따라 붙게 될 것이다.
의미가 실감나, 후기지수들은 비무보다 더한 무게감을 느꼈다.
천룡대전의 비무 우승이 두고두고 강호에 회자되는 측면에서 그 영광이 말할 것이 없긴 하나, 실전성으로 보자면 진정한 실력을 논하기엔 아쉬움이 남는다는 건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비무에는 절초가 없고, 살인적인 초식도 없다. 우호와 결속이 기본 바탕이 된 터라 피를 보는 일은 지양됨이다.
하지만 강호가 어떤 곳인가.
강호의 삶과 죽음은 단 일격에 갈린다. 내공 수위와 경지의 고하조차 승리를 장담하지 못한다. 실력이 낮은 자라도 경험에 따라 갈리고, 은밀한 암수와 비장의 한 수로 생사가 뒤바뀌는 일은 허다한 것이다.
생사결에는 예법이 없으며, 정면승부를 고집하는 건 어린아이의 칭얼거림에 불과할 뿐이다. 불의의 일격에 스러지는 자는 패배자로 기억되었다가 잊혀지고, 살아남은 자는 두려운 상대로 각인된다.
그런 점에서,
역용을 간파함은 이미 강호.
사랑하는 이가, 가족이, 친구가 돌연 등을 찔러온다면, 그가 역용자임을 못 알아보아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 허무함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강호다.
그렇기에 후기지수들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강렬해졌고 열망으로 불타올랐다.
‘후후…….’
남궁학이 내심 미소 지었다.
후기지수들의 눈빛만으로도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와 가주들이 원하던 ‘자각’에 이른 듯한 모습을 보니 남궁학은 흡족해졌다.
하지만 이야기는 아직 남아있다.
연회가 이루어지는 동안 은영문 장로들이 이미 활보하였노라는 말을 꺼낼 시간이었다. 경악할 테지.
아이들의 표정 변화를 기대하며 남궁학이 입을 열었다.
“너희에게 한 가지 말하지 않은 내용이 있다. 모두 듣게 되면 꽤 놀랄 일이다. 그건 바로…….”
“가주님!”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남궁학이 말을 멈췄다.
문 쪽을 바라봤다.
미간이 절로 좁혀졌다.
‘비류검?’
자신의 최측근 심복인 비류검이 자신의 말을 끊는 무례를 범하다니.
그것이 무례라는 걸 모를 비류검이 아님을 알기에, 남궁학은 중요한 사안이라 확신했다.
“들어오라.”
비류검이 다가왔고, 몸을 낮춰 입술을 달싹였다.
“뭐?”
남궁학은 경악에 찬 나머지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그게 무슨 말이냐? 은영문 장로들을 모두 찾아냈다고?”
“네, 천화서고 대공자입니다.”
“아니 대체 무슨…….”
아이들의 경악을 기대하던 남궁학이 경악했다.
시작을 알리지도 않았거늘.
하지만 남궁학은 그나마 양호했다.
8명의 후기지수들.
은영문 장로들을 찾았다는 뜻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에, 누구 할 것 없이 이미 잿빛 얼굴이 되었다.
시작도 하기 전,
누군가 영광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
이내 남궁학은 구환과 마주하였고,
구환이 쏟아내는 비난을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다.
“가주, 왜 그러셨소이까? 왜 천화서고 대공자에게 미리 말하지 않은 겁니까?”
“…….”
거의 호통이었다.
남궁세가와 은영문의 위상 차이는 크다.
그걸 감안해볼 때 장로 구환의 언동은 선을 넘고 있었다.
만약 누군가 보았다면 구환이 남궁가주라고 착각했으리라. 하지만 남궁학은 담담하게 귀를 기울였다. 구환의 머리에 붕대가 감겨있어서만은 아니었다.
놓쳤던 부분이며,
틀린 말이 없지 않는가.
“그에게 언질만 주었어도 그가 나설 일이 없었을 것 아닙니까! 그럼 제가 이리 험악하게 당하는 일도 없었을 테지요.”
중간 중간 남궁학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최소한 사전에 천화서고 대공자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높은 무공의 경지를 지녔다는 정보라도 주셨어야 했습니다. 애초에 본문이며 제가 감당이 안 되는 수준인 걸 알았다면, 저는 도발하지 않고 그와 마주치자마자 내막을 알렸을 것입니다. 그럼 제가 날아가지도 않았을 테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남궁학은 반박하는 대신 고개를 숙였다.
“말씀이 옳습니다. 저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정중히 사과했다.
그 태도가 너무도 진지하였기에 도리어 구환이 어찌할 바 몰라 하며 얼떨떨해했다.
“어…… 아니 뭐…….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천하의 남궁세가 가주가 한마디 변명조차 없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울분에 차 호통 칠 때는 뒷생각이 없었는데, 사과를 받고 보니 눈앞에 있는 이가 남궁가주란 자각에 이르러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혹여 장로님께선 하실 말씀이 더 없으십니까? 제가 보기엔 있으실 듯합니다만.”
“네?”
구환은 영문을 몰라 눈을 연신 깜박였다.
모조리 쏟아내버려 속이 후련할 정도인데, 무슨 말일까? 무엇이 남아 있나 떠올려 봐도 더 몰아붙일 말은 생각나지 않았다.
“가주……. 저는 하고자 한 말은 다한 듯하여…….”
구환의 불안한 마음이 느릿한 어투로 드러났다. 혹시 방금 전 남궁가주의 사과는 사과가 아니라 빈정거림이었을까. ‘어디 더 떠들어보시지’라는 뜻을 담고 있던 걸 눈치 없이 진짜 사과라고 생각했던 건가 싶어 입술도 바짝 말라갔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깔끔했다.
남궁학은 처음부터 빈정거릴 마음이 없었고, 그저 궁금했을 따름인 것이다.
그가 할 말이 더 있냐 물은 건,
이번이 두 번째인 까닭이다.
한 번은 칠비단혼이었고, 지금은 장로 구환이다.
어찌된 일인지 모를 일이었다. 칠비가 그랬던 것처럼 구환의 말 어디에도 당연히 나와야 할 말이 빠져 있는 것이다.
당했으면서,
천화서고 대공자에 대한 원망이 없다.
이쯤엔 내뱉겠지, 이쯤에선 분통을 터뜨리겠지 기다렸는데, 끝까지 모든 비난의 화살은 남궁세가와 자신을 향하고 있을 뿐이라니.
그래서 넌지시 운을 띄워 연상시켜 보려 했던 것인데, 구환은 뭘 빠뜨렸는지 생각조차 못하는 모습만 보였다.
한 명은 묻혔고, 한 명은 창밖으로 날아가버렸는데도 탓하지 않는다라……. 도리어 크게 감복한 듯 보이고, 그저 아쉬움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사람을 홀리는 건가?’
그 생각이 떠오르자 남궁학은 웃고 말았다.
그런 것이라면 자신도 홀린 것이 되는 것이다. 소예와 엮어보려 했으니.
그때였다.
구환이 입을 열었다.
“아, 가주! 그러고 보니 생각났습니다. 제가 한 가지 말씀드리지 않은 부분이 있었군요.”
혹시 이제라도 말하려나 싶은 생각에 남궁학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심탄회하게 말씀해 보십시오.”
“그러니까…… 그게…… 대공자가 이상한 말을 했습니다.”
“이상한 말이라니요?”
“이게 너무나 황당한 말이라서……. 대공자가 본문의 투입 인원이 몇 명이냐며 묻더군요. 그러면서 자신은 다섯 명을 찾았다고 말하지 뭐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오?”
순간 남궁학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안광을 매섭게 빛내니 구환이 다급해졌다.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소리거늘 괜히 말을 꺼냈나 싶어졌다. 남궁가주도 알아보지 못한 걸 대공자가 알아봤을 리 만무하지 않는가.
“그,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말이 안 되는 소리여서 착각한 것 같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듣자마자 눈앞에서 사라져버리지 뭐겠습니까. 천하에 누가 감히 남궁세가에 역용을 하고……. 어?”
구환이 멍해졌다.
바람이 분다 싶은 순간,
눈앞에 있던 남궁가주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마치 천화서고 대공자처럼.
구환이 침을 꿀꺽 삼켰다.
‘요즘 유행인가.’
하지만 그 의미를 뒤늦게 가늠해 보다, 구환은 입을 쩍 벌렸다.
“서, 설마…….”
...남궁세가는 발칵 뒤집혔다.
외부인에 세가가 뚫린 것이다.
그것도 천룡대전 중.
비록 은영문의 의도된 역용 속에 섞여 들어온 침입자이긴 해도, 충격의 여파는 컸다.
즉시 내부 점검이 이뤄졌다. 인원 파악은 물론이거니와 사라진 물건이 있는지, 없었던 물건이 새로 생긴 건 없는지, 혹여 또 다른 역용자가 남아있는지 살피느라 분주해졌다.
물론 그 일들은 은밀히 이루어졌다.
잔잔하여 눈치챌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세가는 이미 격랑 속이었다.
그사이 십대세가의 가주들과 수뇌들은 회의에 들어갔다.
개방 안휘 분타주 취운개와 맹의 지부장 몽연몽이 자리에 동석했다.
“취운개, 처음 상황부터 설명을 해줄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취운개가 입을 열었다.
내용의 시작은 대공자가 자신을 불렀고, 자신이 투덜거렸다는 것부터였다. 그렇게 사람들이 모이고, 물밑에서 오고간 전음, 그리고 하나하나 상황이 묘사되어갔다.
이야기 속에 한 사람이 빛났다.
천화서고 대공자.
그는 보는 자였고,
지휘자였으며, 실행자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은밀한 추적자가 되기도 했다.
지시는 단순하면서도 명쾌했고, 지시 받는 이들의 면면이 맹의 지부장과 개방의 분타주라는 점은 새삼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흐르는 선율 속에 상황은 통제되었고, 위협 요소는 경계 되었다. 또한 대공자는 누구에게 떠넘기지 않고 직접 확인에 나서기까지. 이후의 상황은 이미 다들 알고 있는 바, 추적에 성공했으며 취조를 이뤄냈다.
취운개의 설명은 투박했지만
그 속의 일련의 과정은 매끄럽기 짝이 없었다.
천화서고 서생의 대처는 가히 여느 노련한 강호인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다.
취운개와 몽연몽이 자리를 떠난 뒤,
십대세가 가주들과 수뇌부만이 남았지만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맴돌던 침묵은 꽤 오랜 시간 유지되었다.
그 침묵 속에서,
누군가는 감탄하는 마음이 커져 갔고,
누군가는 십대세가의 명성에 흠집이 간 것이라 여겼으며,
또 다른 이는 천화서고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을 애써 삭였다.
후공이 돌아온 건 그쯤이었다.
저녁에는 남궁학을 만났다.
떠나겠다는 뜻을 전한 다음, 바로 실행에 옮겼다.
거기엔 머뭇거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