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97화 (97/460)

97화. 그 밤 모두가.

그밤.

남궁세가의 모처에서는 비난이 쏟아졌다.

비난의 대상은 천화서고 대공자였다.

곧장 남궁세가를 떠난 것이 빌미가 되었다.

“어찌 사람이 그리 제멋대로일 수 있단 말입니까.”

“아니 천재라면서 예법은 예 자도 배우지 않았나 봅니다!”

“남궁세가에서 그를 특별히 대한 걸 그도 알 텐데 저 잘난 척만 하고 떠나버렸으니, 정녕 안하무인도 이런 안하무인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격이었다.

여러 후기지수들은 서로 앞 다퉈 성토하기 바빴다.

그들 입장도 타당성은 있었다.

오늘 일이 단순한 소동은 아닌 것이다. 고요해도 소용돌이치는 밤이다. 한데 천화서고 대공자는 천룡대전을 뒤흔들고는 홀연히 떠나버렸다.

남겨진 십대세가가 안은 건 큰 상처뿐.

다섯 번째 역용자는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고, 이후 찾지 못하였으며,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또한 은영문 장로들조차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돌아갔으니 천룡대전의 계획도 어그러졌다. 이래저래 천룡의 명성에 크게 흠집이 난 것이다.

비웃음을 지어야 비웃음인가.

그의 행동은 어떤 비웃음소리보다 크다 여겼다.

하지만 사람이 다 같을 수 없고, 마음의 그릇도 다 제각각이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생각한다. 일부 후기지수들이 천화서고 대공자가 이해된다는 식으로 옹호하니, 진영이 갈려 언성이 높아졌다.

“천화서고의 행태가 배려일 수도 있다니, 기도 안 차는군. 모용 형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어디 한번 들어봅시다.”

불쑥 모용진이 지목되었다. 모용진은 여태 이쪽이든 저쪽이든 편 들지 않고 말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지목된 이유라면 또 있었다.

모용진은 금번 천룡대전 비무에서 우승자로 유력한 인물이어서, 말의 무게가 다른 터.

“저도 그리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모용진이 어두운 낯빛으로 나직이 뜻을 내비쳤다. 그러자 그 말이 다시 도화선이 되면서 성토와 비난이 쏟아졌다.

모용진은 그 광경을 잠시 지켜보다 이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오며 진저리를 쳤다. 모처로 향하면서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멍청이들.”

친구가 보고 싶은 밤이었다.

이런 날엔 역시 친구다. 아무 말이나 시시콜콜 떠들어도 좋은 친구와 있어야 한다.

털썩.

“힘들어. 너무 너무 힘들어!”

모용진은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철퍼덕 몸을 던졌다. 창가에 서 있던 묵영이 돌아서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 모용 대협께선 무엇이 그리 짜증나십니까.”

“전부! 다! 모든 게!”

묵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왜 천화서고 대공자 때문이란 말을 못하는 거냐.”

“그래, 맞아. 솔직해져야지. 천화서고 대공자 때문이야.”

난화서원과 모용세가는 오래전부터 교류가 있어, 두 사람의 친분은 어릴 때부터 쌓아온 것이었다. 천화서고 천재의 불참의사를 듣고도 묵영이 천룡대전에 참석한 건 순전히 모용진을 보기 위함이었다.

둘 사이는 욕이 오가도 좋았고,

꾸밀 필요도 없었으며,

허물이 드러나도 상관없었다.

“지금 분위기 어때?”

“지금? 난리도 아니지.”

“천화서고 성토 대회?”

“그래. 일부는 옹호하고.”

“넌 어느 쪽이야?”

“나?”

“그래. 천룡대전의 주인공이 네가 아니라 범 형이 되었잖아.”

모용진이 상체를 벌떡 일으켜 앉았다.

“장난해?”

매섭게 노려보자,

묵영이 바로 손을 들어 항복했다.

“농담, 농담.”

“넌 그런 말하면 안 되지. 이야기해준 게 너잖아. 천하의 금적선생과 항마삼협, 무산쌍웅을 수하 부리듯 하는 사람이라고 말이야. 그게 무슨 뜻이겠어? 애초에 천화서고 대공자는 우리와는 비교 대상이 아니란 말씀이야. 오늘 일만도 엄청났고. 게다가 숙소는 동쪽 후원이야. 그럼 말 다 했지. 한데 고마움은커녕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저 멍청이들은 밤새 떠들고 있으니 내가 짜증이 나겠어, 안 나겠어?”

“나지요, 아무렴.”

묵영이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진이 인상을 찡그렸다.

“또 짜증나는 게 뭔 줄 알아?”

“아무렴, 그것도 알지.”

“그래. 난 대공자를 용선각에서도 못 봤고, 오늘 연회 때도 인사도 못 나눴어. 오늘 저녁에는 너와 함께 가서 넉넉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다고 좋아했는데, 뭐야? 가버렸네? 이게 뭐냐고 대체!”

묵영이 웃었다.

마음을 어찌 모를까.

둘은 이미 이야기를 나누었다.

천화서고 대공자는 넘볼 수 없는 사람이라고.

우린 이인자부터 시작이라고.

묵영은 약왕문에서 받아들였고, 모용진은 묵영의 말을 듣고 인정했고, 오늘 확인했다.

그래서 모용진은 서운한 것이다.

여유 부리다 한마디도 나누지 못한 것에 마음이 안 좋고 못내 아쉬운 것이다.

“후후, 그렇네. 짜증나겠네. 하지만 천화서고의 대공자는 난화서원의 천재와는 각별하다더군.”

“지금 놀리는 거지?”

“멍청해졌구나. 당연히 놀리는 거지.”

“넌 나쁜 새끼야.”

*그 시각,

남궁소예도 불편한 마음에 허둥대고 있었다.

‘도대체 아버지는 무슨 생각이신 거야?’

천화서고 대공자가 떠난 건 이해되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왜 붙잡지 않았는가에 대해서라면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떠나보내도 오늘은 아니었다.

모양새가 우습다.

마치 남궁세가가 기다렸다는 듯 그를 보낸 것 같지 않은가. 우스울 뿐 아니라 옹졸해 보이기까지 했다. 남궁세가가 감지하지 못한 걸 그가 보았다는 이유로 떠나보낸 것처럼 보인다.

그래도 그녀로선 아버지를 직접 마주할 용기 같은 건 없어 큰 오라버니를 찾아다니는데, 처소에도 연무장에도 보이지 않아 답답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때 막내 동생이 걸어오는 게 보여 서둘러 손짓했다.

“우야, 이리 와보렴.”

남궁우가 다가와 허리를 깊게 숙였다.

“누님, 왜 밖에 나와 계신지요.”

“어디 가는 길이니?”

“네, 수련을 위해 석실로 가는 길입니다.”

“그렇구나. 넌 혹시 큰 오라버니를 보았느냐?”

“아! 큰 형님께선 저녁쯤에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이 아우가 따로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습니다.”

“그래?”

“네.”

이내 막내가 자신이 찾아 나서겠다고 하는 걸, 소예는 괜찮다며 돌려보냈다.

‘아니……. 오늘 같은 날 큰 오라버니는 어디 가신 거야?’

이리되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천천히 내뱉길 몇 번이나 한 다음 아버지를 찾아갔다.

“네가 이 밤에 무슨 일이냐?”

“여쭐 말씀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그래? 들어보자.”

“오늘 아버지께서 천화서고 대공자를 왜 붙잡지 않으셨는지, 이 소녀는 그 이유가 궁금합…….”

“소예야.”

“네, 아버님.”

나직한 음성에 소예가 공손히 기다렸다.

“나가거라.”

“네?”

소예가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너무 놀라고 당황스러워 벌써 눈물이 그렁거렸다.

“나가.”

“……네.”

눈물을 참느라 입술을 앙다문 채 소예가 나가자, 내내 굳어 있던 남궁학이 피식 웃었다.

‘귀여운 녀석.’

**

그 밤,

후공은 용선각 부근 객방을 잡았다.

이곳은 이제 거점이 되었다.

남궁세가에서 남쪽으로 이천여 장 너머이며, 마지막 천향의 향취가 옅게 머물렀던 지점이다. 이곳을 중심에 두면 찾아 나서기도 적당하고, 놈이 이 부근을 지날 확률도 높았다.

놈은 올까? 올 것이다.

후공은 확신했다.

오늘의 정찰이 단순할 리 없다.

필요에 따른 것이든, 그 필요 속에 미친 유희이든, 성향이 말해준다. 놈은 두려움이 없는 자이며, 역용에 대한 자부심이 드높다.

오늘의 희열은 컸을 테지. 무려 남궁세가를 휘돌다 유유히 빠져나갔으니. 그런 희열은 사람을 중독시키는 법이다. 방심의 틈은 그렇게 생겨난다.

“이야~. 밤에 보니까 꽃게 형님 너무 멋지잖아.”

“문어 형님은 어떻냐. 눈알 대게 무섭다야.”

“거북이는 안 보이는 거야? 대왕 거북이라고.”

2층의 주루로 내려오니, 맞은편 건물이 용선각인 터라 풍경이 남달랐다. 낮에 바라보는 조형물도 훌륭하지만, 홍등이 곳곳에 걸려 어우러진 대형 조형물은 또 다른 볼거리여서 거지들과 묘빙빙이 창가에서 즐거워하고 있었다.

함께 나선 일행은 총 일곱.

천공단 셋과 양소와 송화. 거기에 하나가 추가되었다.

일명 꿔다놓은 보릿자루.

보릿자루처럼 얌전했고 말 한마디 없이 과묵했다.

술이 나왔기에 후공은 보릿자루에게 잔을 권했다.

“남궁 형, 한잔 받으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보릿자루, 아니 남궁가주의 첫째 아들이 공손히 잔을 받는다.

이름은 남궁연.

6년 전 천룡대전의 우승자이자, 장차 남궁세가를 이어갈 후계자가 일행에 합류했다.

남궁가주와 이런 대화가 오간 후였다.

[찾아낼 수 있겠나?]

[놈이 바꿀 얼굴은 몰라도, 기운은 알아볼 수 있습니다.]

[흠, 그렇다면 자네 말대로 바깥에 머무는 것이 낫긴 하겠군.]

천향은 에둘러 표현되었고, 남궁가주는 수긍했다.

그렇게 잘 마무리되나 싶을 때 남궁가주가 추가적인 제의를 해왔다.

[우리 쪽에서 연락하는 것은 별 문제 아니겠으나, 자네 쪽에서 본가와 급히 연락을 취하려면 사람이 하나 필요하다 싶군. 연락책이면서 잡일도 도울 겸, 겸사겸사 한 사람을 붙여주겠네.]

[괜찮군요. 그렇게 하시죠.]

거리가 가까우면 일반 전서구보단 인간 전서구가 낫다. 거기다 주변 지역 상황을 잘 알 테니 도움이 되겠다 싶었는데…….

남궁가의 후계자가 떡하니 딸려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들을 전서구 취급이라니.

소예에 관해선 접은 듯하여 그건 마음에 들었다만, 이제 딸은 관두고 아들이었다.

후공이 뚱해져 있자니 목소리가 들렸다.

“두목, 다녀올게.”

“다녀와라.”

은앙개였다.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형아, 나도 다녀올게.”

“두목 형님, 저도요.”

소천개와 묘빙빙까지 은앙개를 따라가면서 남궁연과 단둘만 남게 되니, 남궁연이 눈치를 살피다 입을 열었다.

“다들 어디 가는 것인지요?”

아버지의 명을 떠올리니 자신도 따라가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진 탓이었다.

아버지의 명은 단순했다. 대공자 곁에서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그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따르라는 것.

“남궁 형까지 움직일 일은 아닙니다. 개방은 잠시 건달들을 만나러 간 것이라, 곧 돌아올 겁니다.”

“네?”

건달이라니? 무슨 소리인가 싶어 남궁연이 눈을 깜박여댔다.

후공은 그저 웃어주었다.

오늘 이 밤은 고요하나, 실상은 다르다.

이미 다각도로 추적과 정보 수집이 이루어지고 있다. 남궁세가의 정보대와 무력대가 움직이고 있으며, 개방 안휘분타와 무림맹 안휘지부도 정보를 수집하고 있는 상황이다.

거기에 건달이라 함은,

밑바닥까지 훑는 의미로 후공은 은앙개에게 지시를 내려놓았던 터.

건달의 세계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이 장점이 될 수 있다. 의외로 평범한 곳에서 예기치 않은 단서를 찾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건달들에게 개방은 거의 신의 영역. 은앙개 정도면 절대자인 탓에, 사소한 것들도 은앙개의 귀에 들어오게 될 터였다.

...자정이 되기 전,

후공이 머무는 객방으로 그림자가 날아들었다.

칠비단혼이었다.

대강의 상황을 보고한 다음, 올 때처럼 소리 없이 사라졌다.

보고에 특이사항은 없었고, 후공은 좌정에 들었다.

그로부터 한 시진.

다시 인기척이 들려왔고, 그때는 후공이 천향삼주의 공법 운용을 막 거둬들인 후였다.

문 쪽.

발걸음은 기척을 최대한 줄이려 노력하고 있었다. 이어 천천히 방문이 열렸다. 들어오진 않는다. 눈길이 머무는지 정적이 일었고, 이내 문을 닫으려 했다. 방은 온통 어두웠지만 후공은 낮처럼 상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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