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허락이 없이는 죽을 수 없다.
‘난 도대체 왜…….’
피를 울컥대면서 귀오령은 스스로를 자책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고, 벗어날 수 없을 줄 알았기에 밖으로 나오면 안 되었다. 하지만 호기심을 떨쳐내지 못했다. 미련하게도, 어제 느낀 대공자의 스산함을 다시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을 떨쳐내지 못했다. 나는 왜 이런 선택을 한 건가.
마치 이끌린 것처럼 나오고 말았다.
‘나는 만나고 싶었던 걸까. 죽고 싶었던 건가.’
복부에 틀어박힌 검날을 내려다보고 다시 고개를 들어 대공자를 바라보았다. 표정이 평온하기 짝이 없어 귀오령은 웃고 말았다. 다리를 자르고 복부에 칼을 박아 넣은 사람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고요함이라니.
그래, 언젠가 들었다.
정파의 절세기인들은 악귀보다 무섭다고.
어떤 광기에도, 귀기에도 흔들리지 않는 극한의 평정심 속 관조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영혼까지 떨려온다고 했다.
그런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멋지네.’
파파팟.
그 사이 점혈되었다.
이십여 군데가 넘었다. 빨리 끝났다. 짧았는데, 귀오령은 이 점혈로 많은 것이 달라졌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다시 웃음이 났다.
잘려나간 한쪽 다리에서 쏟아지던 피는 지혈되었고, 단전의 감각은 둔감해졌다가 아예 사라졌다. 운기는 물론이고 경맥의 운용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그리고 일곱 개의 낯선 기운이 들어섰다. 그것들이 몸 안에 야수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뭘까? 심장이 내려앉는다. 만약 이 야수들이 날뛰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걸까?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선택할 수 있다. 대답이 빠르고 성의 있다면 빠르게 죽을 수 있고, 시간을 끌면 오래 살게 된다. 알아들었겠지?”
“끄으으…….”
귀오령은 알아들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 제어할 여력은 빼앗겼다. 이제부터 죽음은 허락이 떨어져야 한다. 이는 사실 검에 꿰뚫리면서 이미 알고 있었다.
몸을 꿰뚫고 지나간 검날은,
내부 장기 그 무엇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찰나였는데 대공자는 모두 비껴 찔러넣었다. 그러니까 마지막 검격은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관통시켜 그저 자신을 나무에 꽂아두기 위함이었다.
눈높이를 맞춰두고 편하게 대화하려는 것뿐이었다.
과연 이 사람은 서생이 맞는 걸까? 도대체 언제부터 검을 든 걸까? 검에 대한 이해가, 사람의 신체구조에 대한 이해가 그야말로 차원이 다르다.
그러니 시간을 끌면 단순히 오래 사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일곱 개의 낯선 기운도 자신에게 지옥을 선사할 듯하고.
“이름.”
“귀……오령…….”
“이름.”
다시 나직이 들려온 물음에 귀오령은 의아해졌다.
방금 말했다. 분명히 제대로 말했는데 왜 다시 묻는지 귀오령은 알 수 없었다. 괜한 트집일 리는 없는데…….
그러다 퍼뜩 알아차렸다.
아! 이름.
잊고 있었다. 불러줘야 이름인데, 언제부터인가 불리지 않아서 잊고 있었다. 아무도 물어보지 않아서 말해줄 기회가 없었다. 누가 언제 물어볼까 궁금해하던 적도 있었는데, 그조차 잊어버렸다.
그런데 하필 이때…… 죽을 때가 되어 죽음을 선사하는 이가 물어주니…… 귀오령은 웃음이 났다. 미칠 듯이 웃고 싶어졌다.
“끄으…… 그렇네……. 흐흐……. 내게도 이름이…… 있었네. 귀오령이 아닐 때가…… 있었네.”
귀오령, 아니 방유겸은 울었다.
삶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한 어린아이였다. 겁 많고 배고픈 아이는 혈음곡에 거둬지면서 방유겸에서 귀령이 되었다. 섭혈공(攝血功)을 익히면서 귀오령이 되었고, 피를 갈구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갈증과 식욕은 피로서만 해결되었다. 피를 마시지 않으면 미쳤고, 피를 마시고 나면 미칠 것 같았다. 피를 마시면 강해졌지만, 강해진 미친 자가 되어갈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미치지 않고는 살 수 없어서 아예 미쳐버린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방……유겸. 근데…… 너 말이야……. 범항……. 아, 이렇게…… 불러도 되나? 흐흐…… 우습네. 근데…… 이거…… 다…… 소용없어. 결국 다 죽게 될 거거든. 그런다고…… 했어. 엄 부인이 오거든……. 그리고 대군이……. 천룡대전의…… 모두…… 죽게 된다고 했어……. 그러니까 범항…….”
“……?”
“너도…… 죽게 되겠지. 도망치지 않는다면…….”
후공의 표정이 바뀌었다.
갸웃하며 웃음을 머금었다. 웃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놈의 본명을 물은 건, 이성을 흔들고 심약해진 마음에 더욱 감성적인 자극을 더하기 위함이었다.
바로 튀어나온 건 이해했는데, 답변이 예상 범위를 훌쩍 뛰어넘었다. 남궁세가를 휘젓고 다니는 녀석이기에 이 패거리가 무언가 도모하는 일이 있겠다 싶었지만, 계획과 규모가 엄청나 헛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천룡대전의 몰살이라니, 거창하군.’
난데없이 언급된 엄 부인은 누구인가? 또 대군은 무엇이고?
동기는? 이들의 뿌리는? 실행 일자는? 실행 방법은? 대군의 규모는? 아니, 방금 한 말 모두 거짓일 수도 있다.
알아봐야 할 때다.
“넌 재밌는 말을 하는구나. 재밌으니 시간을 앞당겨 들어보자.”
후공은 귀오령의 품에서 옥병을 찾아 꺼냈다.
화골산이었다.
귀오령이 히죽 웃으며 ‘지독하구만’이라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오해다.
후공은 화골산을 뿌려 자백받을 생각 같은 건 없었다.
대신 귀오령의 백회혈에 손을 올렸다.
기운을 불어넣는 순간, 미리 잠복시켜 둔 교릉이 발동되었다.
몸 안 일곱 야수가 꿈틀했다. 그 느낌에 귀오령의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두려움에 질려 동공이 확장되었고, 야수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뚜드드드드드드드드득! 귀오령의 몸이 구겨지고 오그라들었다. 귀오령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토지묘의 밤을 찢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
화골산은 뒤처리 때 쓰였다.
말끔히 정리한 후 귀오령이 그동안 머물렀다는 임시 거처를 살폈지만, 가옥은 이미 비어 있었다.
후공이 실망한 건 아니었다.
비어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밤의 비명 소리는 멀리 퍼진다. 패거리라면 그것이 귀오령의 비명이란 걸 모를 리 없다. 이미 자백했다는 것도 알고 있으리라. 더불어 누가 귀오령을 죽였는지도.
그들의 그러한 인지는 후공에겐 수확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천화서고 대공자’를 먼저 처리하고 싶어 할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다고 후공은 생각했다.
돌아가는 길.
동이 트려면 아직 멀었다. 신법을 펼쳐 어둠을 헤치며 후공은 생각을 정리했다.
‘혈음곡이라…….’
귀오령은 혈음곡이 사황천의 팔대세력 중 하나이며, 대외적으로는 태음장으로 위장한 채 명맥을 이어왔다고 자백했다.
그 혈음곡주의 딸이 엄 부인이자, 혈주요희.
서문가주였던 서문추의 부인이며, 나이는 오십 대.
서문추가 그 사실을 알고 혼인한 건지, 혼인 후 알게 된 것인지는 모른다고 했다.
중요한 건 아니다.
핵심은 혈음곡이 서문세가를 암중으로 집어삼켜가던 과정이었다는 점이다. 서문추도 잠식당하였고, 그 와중에 ‘천화서고’에 의해 어그러졌다.
그로 인해 엄 부인은 분노하였고, 분노의 대상은 천룡대전이 되었다.
십대세가 중 하나인 서문세가는 몰락하였거늘 천룡의 회합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대로이니 더욱 분노했다. 더불어 금번 천룡대전의 초대명단에 ‘천화서고 대공자’가 있으니, 일거에 쓸어버릴 기회라고 여겼다.
여기까지는 이해되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실행에서 모호해진 것이다.
귀오령은 ‘대군’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온댔어. 들었어. 쓸어버린다고 했어.
귀오령의 말은 끝까지 이런 식이었다. 건너 들었을 뿐이었다. 대군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대군이 어디에서 출발하는지, 그들의 수준이 어떠한지, 그 무엇도 아는 것이 없었다.
거짓은 아니었다.
교릉 상태의 자백이고, 몇 번을 확인했다.
또한 대군을 제외한 부분은 명확했다.
엄 부인, 귀령주, 그리고 귀일령부터 귀사령, 귀령주에 따로 속한 십이귀살.
심지어 천룡 내부의 연루자에 관해서도 말했다.
너희 안에도 하나가 있다고 귀오령은 고해왔다.
‘사마세가일까? 백리세가일까? 그도 아니면?’
하나라는 뜻이 한 가문일 수도, 한 놈일 수도 있으니 어떻게 가려내야 할지 난감해졌고, 고민이 필요한 지점이었다.
“남궁 형.”
뒤쪽에서 남궁연이 버거운 듯 거친 숨소리를 내며 따라오고 있었다. 이제 용선각까진 얼마 남지 않았다. 어느덧 이 속도로도 일식경 정도면 도착이다.
“네? ……네.”
“먼저 갑니다.”
후공은 그 말만 남기고 신형을 뽑아 올렸다.
이제껏 속도를 맞춰 함께 나아간 건 남궁연을 호위하는 차원이었다. 혹시 모를 추적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추적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용선각이 가까워지고 있으니 후공으로선 더 이상 보조를 맞춰줄 이유가 없었다.
“어어?”
남궁연이 바보같이 입을 벌렸다. 대공자의 신형이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러다 대충 이유가 짐작된 탓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여태 자신이 짐짝처럼 방해가 되었다 싶으니 오기가 생겼다.
‘젠장.’
싸움에 나서고 공력을 소모했을 대공자에 비하면 자신은 구경꾼에 불과했거늘 이 꼴이라니. 스스로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나라고 못할 성싶은가! 바닥 난 기운을 끌어모아 속도를 일시에 높였다.
그 결과,
우당당탕.
몸이 마음을 따라오지 못해 앞으로 고꾸라졌고, 수십 바퀴를 데굴데굴 굴렀다가 겨우 멈춰 대자로 뻗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수많은 별들이 쏟아져내릴 듯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깔깔대며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에 외쳐주었다.
“야, 이거 내가 의도한 거야. 처음부터 누우려고 했던 거라고!”
개소리를 내뱉었다.
평소에는 결코 해 본 적 없는 개소리였다.
하지만 오늘은 괜찮지 않을까.
오늘은 평소와는 다른 날이니까.
미친 날이니까.
광기에 찬 웃음소리를 보았고, 그 광기 앞에 초연한 검객이 있었다. 처음에는 광기에 젖은 귀오령이 무서웠는데, 나중에는 대공자가 무서워져 질려버렸다. 귀오령이 왜 대공자를 무서워했는지 뒤늦게 알게 되었다. 지켜보는 중에 구겨져버린 귀오령의 모습에 숨이 멎었고, 마지막으로 화골산에 귀오령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덜덜 떨었다.
여태 내가 알고 있던 강호는 무엇이었지?
강호를 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강호는 훨씬 더 잔혹했고 미쳐 있었다.
귀오령과 마주한 것이 대공자가 아니라 자신이었다면 어땠을까? 찢겨나갔을 것이다.
그러다 떠올려봤다.
만약 대공자가 적이라면,
내가 대공자를 적으로 마주한다면 어떤 느낌일까?
“하아…….”
별들이 다시 깔깔대며 웃는 것 같았지만, 이번에는 개소리를 내뱉지 못했다.
**
후공은 용선각 부근에 도착하면서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거점으로 잡아둔 객방 앞, 길바닥에 취운개가 퍼질러 자고 있었다.
‘이놈은 왜 멀쩡한 지붕 놔두고 길바닥에서 처 자는 건지.’
“따라오십시오.”
곁을 지나치며 한마디 던져놓았다.
뒤에서 취운개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쫌! 잠 좀 자자고. 제발 쪼오옴!”
투덜거리는 취운개의 목소리는 이내 옆에서 들려왔다.
“대공자, 난 자네랑 달라. 잠이 많다네. 잠을 못자면 내 고운 피부도 상하고 말이야. 듣고 있나? 아니 그보다 어디 가는 건가?”
“남궁세가.”
“으잉? 설마…… 다섯 번째 놈을 잡았다든지 그런 건 아니겠…….”
“잡았습니다.”
바로 대략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자, 충격을 받은 취운개가 신법이 꼬이면서 구를 뻔했다가 겨우 자세를 잡았다.
“아니 이게 대체 뭔 일인가. 사황천이며, 혈음곡이라니!”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까?”
“있었네. 사실 그 이야기를 해주려고 내가 거기서 기다리다가 깜박 잠이 든 걸세. 솔직히 너무 느닷없고 황당하다 싶었는데, 자네 말을 듣고 보니 이해가 되는군.”
후공은 바라보는 것으로 재촉했다.
취운개가 코를 찡긋했다.
“지난밤에 백리세가가 떠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