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도대체 무슨 일이람.
“어제 저녁이었네.”
취운개가 말을 이었다.
“백리진풍인지, 백리진상인지 그 미친 새끼가 갑자기 모용진에게 시비를 털어버린 거야. 지놈을 무시했다나 뭐라나. 급기야 검까지 빼들고 설쳐대니 다들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지. 캬아, 근데 그 과정에서 모용진 녀석 솜씨가 아주 볼 만했다네. 공수탈백인이 얼마나 능숙한지, 맨손으로 검을 상대하던 중에 몇 번 응수하고 보니 놈의 검이 어느샌가 모용진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는 걸세. 하하하하, 깔끔하더라고. 괜히 그 녀석이 이번 천룡대전의 유력한 우승 후보로 꼽히는 게 아니었어.”
취운개의 마무리는 이상하게 끝나버렸지만, 요점은 그 일을 빌미삼아 백리세가가 떠났다는 것이었다.
후공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천룡 안에 하나가 있다고 하여 알곡과 쭉정이를 어찌 구별해야 좋을지 고심하고 있었거늘, ‘내가 바로 쭉정이다’라면서 알아서 튀어나간 꼴이니 수고가 덜어졌다.
백리세가가 아닐 수도 있을까?
그럴 리가.
애초에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백번 양보해 아들이 소란을 피운 것까지는 어찌 이해한다 쳐도, 백리가주가 천룡대전을 떠나는 건 갑자기 미쳐버렸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소란의 규모는 지극히 사소하고, 대회가 다름아닌 천룡대전이다. 어른의 면모인가 아닌가를 따져 물을 가치도 없었다. 백리세가는 쓸려나갈 걸 알고 있고, 쓸려나가기 전에 빠져나간 것이다.
‘하지만 빠져나갈 수 있을 리가. 너흰 벗어날 수 없다.’
*남궁세가.
집무실에서 후공은 남궁학과 마주했다.
후공은 화골산이며, 귀오령의 무공이며, 잔가지는 모두 쳐내고 핵심 내용으로만 빠짐없이 전달했다.
“흐음…….”
남궁학이 깊은 침음성을 흘렸다.
들었지만 그 어느 것 하나 이해되는 것이 없으니 머리가 한없이 복잡해졌다. 잠에서 이제 깨어나 불려나온 것도 있지만, 한마디 한마디 의미가 엄청나기도 해서 쉽게 정리가 되지 않았다.
사황천, 혈음곡, 대군, 엄 부인, 귀령주, 백리세가…….
“내가 어떻게 하면 되나?”
그래서 남궁학은 빠른 길을 택했다.
대공자가 바로 자신에게 달려왔다는 건 단순히 보고 차원은 아니리라. 그리 판단했다. 이미 정리된 생각이 있을 것이고, 바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후공이 미소를 띠었다.
남궁학이 보인 반응이 흡족한 탓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되묻지 않으니 신뢰하고 있음을 보인 것이며, 자신이 경황이 없음을 인정한 건 현명한 처사였다. 또한 아비로서 아들 남궁연의 신변이 궁금할 텐데도 묻지 않는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 것을 알기에 후공은 만족했다.
“최우선해야 할 일은 백리가주를 잡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를 통해 부족한 정보를 메꿔야 합니다. 백리세가의 이동경로는 서쪽. 그가 마차를 이용했다면 멀리 가지 못했을 테고, 도중에 지난밤을 객방에서 묵었다면 거리는 더욱 가까울 겁니다. 백리가주를 압도적으로 제압하여 생포할 수 있는 규모의 무력대를 보내셔야 합니다.”
“그리하겠네.”
남궁학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변수도 차단해야 합니다. 백리가주와 그 일행이 마차를 버리고 경공을 펼쳐 멀어졌을 경우도 대비해야 합니다.”
“설마 그렇게까지?”
“이미 상식 밖의 상황입니다.”
“그렇지. 맞는 말이네.”
남궁학이 바로 수긍했다.
후공이 방향을 제시했다.
“제가 아는 바 서쪽에서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문파나 세력 중 가장 큰 힘을 갖춘 곳은 약왕문이 있습니다. 그 외 문파는 전서매를 띄워 도움을 청한다 해도 백리가주를 감당할 수 없으니 의미가 없을 겁니다.”
남궁학의 눈이 잠깐 커졌다.
천화서고의 천재가 문파나 세력까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어떻게 그런 부분까지? 하지만 의문은 미뤄뒀다.
“문제가 있네. 약왕문의 힘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그들의 도움을 기대하긴 힘들 걸세. 본가가 약왕문과의 관계가 좋은 편이긴 해도, 약왕문은 일의 옳고 그름을 떠나 강호의 분란에 끼어들기를 꺼려하고 늘 중립을 지키기 때문이라네.”
“그 부분은 걱정 마십시오. 제가 약왕문과 작은 인연이 있으니 나서줄 것입니다. 약왕문 부문주 앞으로 서신을 작성해 드릴 테니, 그대로 전서매 편에 띄우시면 됩니다.”
“그렇게 하지.”
남궁학도 그제야 인연에 대해 감을 잡았다. 약왕문이 대공자를 특별히 여기는 것 같다던 칠비단혼의 보고가 떠오른 것이다.
후공은 지필묵을 끌어와 서신을 작성했고, 그 사이 남궁학은 심복을 불러 무력대 파견을 지시하고, 전서매를 띄울 준비를 하라 명했다.
이윽고 전서매가 약왕문을 향해 힘차게 날아올랐다.
급한 불은 껐기에 후공은 여유를 찾았다.
이제는 가용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여 전반적인 대응을 마련해야 할 시점이었다.
내내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취운개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분타주께선 ‘대군’에 대해 알아봐 주십시오. 귀오령이 잘못 알고 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맞이하는 입장인 우리는 ‘대군’을 맞이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어야 합니다.”
“맡겨두게. 안휘 구석구석을 빗자루로 쓸듯 들여다보겠네. 100명도 대군이란 생각으로다가.”
취운개가 당차게 답했다.
후공은 미소를 지어보이곤 보충해주었다.
“대군의 뜻이 다른 의미일 수도 있으니, 사람의 많고 적음으로 한정하여 살피는 점은 경계되어야 합니다. 하나로 많은 인원을 한꺼번에 섬멸할 수단일 수도 있습니다. 그건 진천뢰와 같은 폭약일 수도, 장대비처럼 쏟아져내릴 독화살일 수도, 당문의 만천화우처럼 하늘을 뒤덮는 암기일 수도 있으니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고 살펴주십시오.”
수천 개의 강궁이 쏟아진다면 그도 대군이다. 취운개는 미처 생각지 못했기에 잠시 안색이 굳어졌다. 하지만 이내 언제 그랬냐 싶게 바로 웃음을 흘렸다.
“흐흐,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그럼 이 거지는 먼저 갑니다.”
취운개가 나가고,
후공은 다시 남궁학을 바라봤다.
“끝으로 가주께 부탁드릴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듣고 있네.”
“서문가주였던 서문추의 직계와 인맥을 모두 파헤칠 필요가 있습니다. 맹의 지부장에게 설명하고 맡기십시오. 서문추의 외가를 포함, 부인의 가문 쪽도 세밀히 들여다보라고 하십시오. 또한 현 서문세가를 이끄는 이는 서문봉 장로이니, 그에게 전서를 띄운다면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또한 절강 남부에 위치한 태음장도 알아보는 게 좋겠습니다.”
이어 다른 가주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고 마음의 대비를 하도록 하되, 동요할 수 있으니 후기지수들에게는 당장 밝히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전했다.
남궁학은 모두 받아들이고 그러겠노라 확답했다.
그 와중 내심으로는 놀라움과 감탄을 금할 길이 없었다.
대공자가 예를 갖춰 말하고 있긴 하지만, 지금 상황은 자신에게 지시를 내리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대응이 물 흐르듯 매끄럽고 일목요연하며 섬세하니, 어이없게도 반발심은커녕 그저 고개를 끄덕이게 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당장은 들어야 할 말 중에 한 가지가 빠져 있어, 그 부분은 물어야 했다.
“대공자, 자네는 따로 계획이 있는 것인가?”
“네, 저는 오늘 그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만난다니? 그게 가능한 일인가?”
남궁학이 놀라 미간을 좁혔다.
후공이 미소 지었다.
“초대해볼 생각입니다. 불발될 수도 있으나, 그들이 귀오령을 잃으면서 저를 인식했다면 초대에 응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필시 함정으로 이끌고자 수를 내겠지만, 저는 그 함정 속으로 들어가볼 생각입니다.”
***
서서히 동이 터오는 새벽녘,
거점의 객잔 지붕 위에서 남궁연이 우두커니 앉아 있을 때였다.
휘이잉~.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 남궁연이 돌아보고는 기겁했다.
“으헉!”
방금까지 없던 사람이 곁에 서 있었기에 화들짝 놀라 튕겨지듯 일어나 몇 걸음 물러나기까지 했다. 그러다 누구인지 알아보고는 가슴을 쓸어내렸고, 민망해져 머리를 긁적였다.
“대공자……. 오셨습니까?”
“크흠……. 남궁 형께선 무슨 생각 중이셨기에 이리도 놀라신 겁니까? 지붕 위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지나가는 것이라도 봤나 봅니다.”
후공은 짐짓 의심스럽다는 시선을 보내주었다.
남궁연에게 있어 지난밤의 충격은 아직 채 가시지 않았을 것이기에 먼저 딴청을 피워주었다. 남궁연의 용모가 충격의 증명이었다. 늘 단정함의 표본 같던 녀석의 머리는 멋대로 헝클어져있고, 옷도 엉망인 것이다.
“하하, 그럴 리가요.”
여유를 찾은 남궁연이 말도 안 되다면서 손을 내저었다.
“아닌 겁니까?”
“네, 아닙니다.”
“오늘은, 수고하셨습니다.”
순간 남궁연이 멍해졌다가 울컥했다.
기습적으로 대공자가 활짝 웃어서인지, 지난밤이 떠올라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수고라면 대공자가 했을 뿐이고, 자신은 힘들어만 했는데……. 그런데 어쩐지 괜찮다고. 힘들 만했다며, 고생했다고 어른이 어깨를 두드려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이다. 정말 힘들었던 터라서 눈이 시려왔다.
하지만 덕분에 시선 처리가 난감해졌다. 남궁연이 애써 시선을 피하면서 연신 헛기침을 했다.
“험험……. 제가…… 한 것이 있습니까.”
“돌아가셔서 조금 쉬다 오십시오. 씻고 옷도 갈아입는 것이 좋겠습니다. 정오쯤에 오십시오. 할 일이 있습니다.”
“전 괜찮습니다. 여기서 머물면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크흠, 그게 아니고요.”
“네?”
“제가 편하게 쉬려는 겁니다. 저도 좀 쉬어야죠!”
“아……. 네…….”
남궁연이 다시 머리를 긁적이며 돌아섰다.
바보가 아닌 탓에, 말의 의미를 모를 수는 없었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거구나. 하나 또 배웠네.’
대공자의 성향이며 말하는 방식도 이제 슬슬 적응이 되기 시작했다. 완곡히 말하는 것은 어찌된 게 들을수록 좋고 편안했다.
잠시 후,
“소주를 뵙습니다!”
가문의 외곽 경비대가 예를 취하는 걸, 남궁연은 대충 손짓하여 건성으로 넘기며 안으로 들어갔다. 거처에 거의 왔을 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큰 오라버니!”
소예였다.
놀란 눈이 되어 쪼르르 달려와서는 공손히 예를 갖춘다.
“넌 일찍 일어났구나.”
“네, 오늘은 일찍 눈이 떠졌습니다. 그런데 어디 다녀오시는 길이기에…….”
소예의 눈동자가 또르르 남궁연의 머리부터 발까지 훑어갔다. 소예는 이 정도로 추레해진 오라버니의 모습은 여태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냥 바람 좀 쐬고 왔다.”
“오라버니, 혹시 천화서고 대공…….”
“간다.”
“…….”
소예가 말을 하다 말고 울상이 되었다.
어느새 큰 오라버니가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아니, 왜 아버지나 오라버니나 다들 내 말을 끝까지 듣지 않는 거야.’
“누님.”
“어멋!”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소예가 놀라 돌아봤다.
언제 왔는지 막냇동생이 무슨 일인가 하고 눈동자를 난감하게 또르르 굴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럴 땐 무조건 인사지, 라는 생각이라도 한 건지 공손히 허리를 숙여갔다.
“이 아우, 놀라게 해드렸습니다.”
“네 탓이 아니다. 어디 가는 길이니?”
“수련을 위해 연무장에 가는 길입니다.”
“그렇구나, 이번 비무에서는 자신 있느냐?”
“모용 형님이 워낙 출중하시어 이 아우는 진즉 마음을 비웠습니다.”
“약한 소리를 하는구나. 그래도 하는 데까지 해봐야지!”
“네, 누님. 이 아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가 보거라.”
“네.”
우가 느긋하게 멀어지니, 소예는 미간을 찡그렸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한결같은 건 막내뿐이네.’
***
아침나절.
시녀가 찻잔을 공손히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윽한 향이 방 안 가득 퍼져갔다.
약왕문 부문주 용화운은 미소를 띠며 맞은편에 앉은 이에게 차를 권했다.
“백리가주, 본문이 자랑하는 자운차입니다. 드셔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