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102화 (102/460)

102화. 대공자는 그런 사람 아닙니다.

지난밤이었다.

예고도 없이 백리가주가 약왕문의 문을 두드렸다.

신원을 확인한 용화운은 갸웃해질 수밖에 없었다. 불청객은 아니었지만, 이 시기에? 라는 생각이 따라왔다.

천룡대전이 벌써 끝났나 싶어 시일을 따져보니 어제 날짜로는 고작 이틀째여서 의문이 남았다.

하지만 십대세가 중 하나인 백리세가다.

그것도 가주가 포함된 일행을 거절할 명분은 없어 숙소를 마련해주었고, 그것이 어제 밤의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 아침,

어제는 밤이 깊어 못 나눈 이야기가 오갈 차례였다.

“과연 약왕문입니다. 향도 향이고, 한 모금 마셨을 뿐인데 벌써 기력이 보충되고 머리가 맑아지는 듯하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허허, 너무 띄우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띄우다니요. 이 노부는 감언과 겉치레를 싫어하는 사람이외다.”

백리가주 백리청의 목소리가 그의 대인의 풍모만큼이나 중후하게 흘러나왔다. 용화운은 미소로 응하고, 바로 핵심으로 들어갔다.

“가주, 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천룡대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흐으음…….”

백리청이 깊게 침음성을 흘렸다. 얼굴도 딱딱하게 굳었고, 그 가운데 군데군데 서글픔이 묻어났다.

“말하자니 부끄러운 이야기인지라……. 하지만 말씀을 드려야겠지요. 사실 천룡대전 도중에 나오게 된 건, 다 이 못난 노부의 자식 때문이라오.”

“……?”

용화운이 갸웃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시작은 이렇다오. 이번 천룡대전에서는 비무 외 또 다른 경쟁항목으로 역용 분별을 추가하였소. 비무에 참가하는 후기지수들 중 누가 가장 빨리 역용한 자를 찾아내느냐는 것이었지요. 한데 어찌된 일인지 제 아들놈이, 미처 공표도 하기 전에 역용한 은영문 장로들을 모두 찾아냈지 뭐겠소.”

“흠, 그게 문제가 될 일입니까? 도리어 찬사 받을 일이 아닙니까?”

백리청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 생각도 그러하오. 하지만 사람이 다 같지 않더이다. 천화서고의 대공자가 갑자기 이의를 제기하고 나서지 뭐겠소.”

“천화서고 대공자가요? 그 자리가 어떤 자리라고, 이제 막 강호에 발을 내딛은 애송이가 주제도 모르고 나댄단 말입니까?”

용화운이 발끈했다.

그 모습에 백리청은 또 한숨을 내쉬었다.

“주장인즉 은영문 장로들의 역용이 뛰어나거늘 어찌 공표도 하기 전에 찾아낼 수 있냐는 것이었소. 즉 사전에 이 노부가 아들에게 언질하여 영광을 취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었냐는 뜻인 게요. 허허…… 어린 친구의 역성이 대단했다오.”

“이 무슨…….”

용화운이 말도 안 된다며 혀를 내둘렀다.

“문제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일부 세가에서 천화서고의 의견에 편승해 따지고 들었다는 것이오. 끝내 편이 갈려 서로 간에 감정이 격해지고 말았소이다. 그런 상황에서 내 어찌 천룡대전에 더 머무를 수 있었겠소. 비록 남궁가주가 자신의 낯을 보아서라도 머물러 달라며 붙잡았지만, 이미 내 마음이 떠난 뒤였다오.”

“기도 안 차는 노릇입니다.”

용화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모습에 백리청이 내심 미소 지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군.’

계획대로 순조롭다.

그는 어제 저녁 남궁세가를 떠나면서 도중에 마차를 버리고 신법을 전개해 내달렸다. 혹여 남궁세가에서 설득하기 위해 자신을 찾아온다면 거절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밤이 되어서야 마차를 새로 구했고, 의도적으로 약왕문의 문을 두드렸다.

이유는?

훗날을 위한 포석이었다.

천룡대전의 모두가 몰살당하고 나면 훗날 그가 왜 도중에 빠져나오게 되었는지 해명할 때 자신의 주장을 간접적으로 증언해줄 이가 필요했고, 그런 점에서 약왕문은 제격인 것이다.

약왕문은 강호에서 언제나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는 탓에, 그들의 증언은 도리어 무게가 실렸다.

백리청은 흡족한 내심을 감추고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다 못난 노부 탓이오. 노부의 덕망이 아직 부족하여 이런 일을 겪게 된 것이지요.”

“가주, 그런 말 마십시오.”

“아니오, 다 내가 부족한 탓이오.”

“흠……. 자꾸 듣다 보니 저도 가주가 모자라 보이긴 합니다.”

순간 백리청이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잘못 들었나 싶어 바라보니, 아니었다. 용화운이 비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개자식.”

짧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너무 황당한 나머지 백리청은 현실감이 없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백리청도 산전수전 다 겪은 인물.

약왕문 부문주가 대놓고 욕을 내뱉었다. 직감적으로 뭔가 어그러졌다는 것을 눈치챘다. 분노보다는 냉정해져야 할 때였다. 이유를 묻기 전 우선해야 할 일은 명백하다.

그렇게 그가 약왕문 부문주를 인질 삼기 위해 손을 내뻗으려는 순간,

“으윽!”

백리청은 손을 뻗어가다 말고 급히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터질 듯 조여온 탓이었다. 누군가가 심장을 움켜쥐고 짜내는 것처럼 그 고통이 말로 할 수 없었다.

손등도 검게 물든 것을 볼 수 있었다.

‘독?’

무슨 독인지, 조여오는 심장의 고통뿐 아니라 내력을 운용할 수조차 없었다. 의식도 가물거려간다. 약에 능한 약왕문이 독에 조예가 없을까.

‘하아……. 간교한 놈. 여태 독이 퍼지길 기다렸던 것이로구나.’

신음 속에 그제야 깨달았지만, 의문은 남았다.

대체 왜? 설마 혈음곡의 일이 밝혀졌단 말인가? 아니 그렇다 해도, 이미 충분히 멀리 오지 않았던가. 다른 이유인가? 백리청의 의혹에 찬 눈동자를 보며, 용화운이 일어나 그 곁을 천천히 거닐었다.

“가주, 궁금해하시니 답을 드리지요. 사실 아침에 남궁세가로부터 전서매가 날아들었습니다. 백리세가가 음모에 연루되었다던데, 맞습니까?”

백리청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남궁세가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고?”

약왕문은 분란에 끼어들기를 꺼려하는 성향. 그 성향을 알기에 마지막 기대를 걸었다. 판단이 모호해지도록 유도했다.

용화운이 고개를 내저었다.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실 무시할 생각이었지요.”

“헌데…… 어찌…….”

“서신 작성자가 천화서고 대공자였습니다.”

“……?”

그게 왜? 백리청은 더욱 이해할 수 없어 미간만 찡그렸다.

답이 들려왔다.

“그는 본문의 은인입니다.”

쿵.

백리청의 하늘이 무너졌다. 비로소 절망이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엄습해왔다. 은인이었다고? 어떻게? 아니 그보다, 천화서고의 애송이가 어찌 알아낸 것인가?

그때 주위를 거닐던 용화운이 백리청의 등 뒤로 가서 어깨를 주물러주며 웃었다.

“가주, 한 가지 정정합시다.”

“……?”

“대공자가 역성이 대단했다는 말은 도대체 뭡니까? 어처구니가 없어서, 연기하다 하마터면 웃어버릴 뻔했지 않습니까. 뭘 알고 말씀을 하셔야지요. 하하, 역성이라니. 대공자는 그런 하찮은 일에 일일이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닙니다.”

대공자는 천공단에게조차 화를 낸 적이 없었다. 그저 이것들이 사람인가 하는 표정으로 한심하게 바라볼 뿐. 그러니 용화운 입장에선 기도 안 찰 노릇이었다.

그때 문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문주님, 외무각주입니다.”

“들라.”

화청이 들어와 예를 갖추었다.

“백리세가 전원을 무력화시켰습니다.”

“수고했다. 즉시 남궁세가로 호송한다. 동시에 전서매를 띄워 남궁세가에 알리도록 하고, 중도에 만날 지점을 남겨 그들이 인계할 수 있도록 하여라. 호송 도중 심문하여 밝혀낼 수 있는 내용은 미리 밝혀내야 한다. 이는 대공자의 요청 사항. 심문 강도는 최고 수준으로 허락한다.”

“네!”

**

정오 무렵.

후공은 거점의 객잔에서 남궁연과 점심을 함께했다. 간단히 만두와 소면만 시켰고, 남궁연의 보고에 귀를 기울였다.

내용은 가주들의 반응이었다.

“……몇몇 가주들이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불만의 대부분은 황당하다는 쪽으로, 상식적으로 대군이며 몰살은 있을 수 없다며, 귀오령이 죽기 직전 헛소리를 늘어놓은 말에 천룡이 놀아나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대공자를 불러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겠다는 발언도 나온 것으로 압니다.”

후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하고 있던 터라 대수로울 것도 없었다.

도리어 더 심한 말도 나왔을 텐데, 남궁연이 걸러 말하고 있는 것일 테지.

하지만 누가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또 누가 가만히 앉아서 큰소리로 떠드는지는 파악해둘 필요가 있었다.

“수긍한 이들은 누구였습니까?”

“모용세가와 하북팽가, 진주언가, 그리고 제갈세가의 두 장로님들입니다. 반면 반발이 심한 이들은 사마세가와 황보세가, 산동악가의 가주로, 그중 특히 사마가주의 목소리가 높았다고 합니다.”

후공이 피식 웃음 지었다.

듣고 보니 너무 뻔했다. 하긴 수년이 지난 것도 아니다. 사람이 쉽게 변할 리가. 후공으로선 짐작한 대로여서, 괜히 물었다 싶을 정도였다.

이어 백리세가 소식을 물었다.

아직 무력대로부터 들어온 소식이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객잔을 나와 신형을 날렸다.

“갑시다.”

“네.”

남궁연이 곁으로 따라붙었다.

후공이 슬쩍 바라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남궁 형, 이러깁니까?”

“네?”

남궁연은 영문을 몰라 눈을 연신 깜박였다.

분명 갑시다, 라고 해서 가고 있을 뿐이었다. 뭔가 빠뜨리고 실수한 건가? 괜히 긴장돼 바라보자니,

“어디 가는지도 안 물어봅니까?”

“아……하하, 그렇죠.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비밀입니다.”

“…….”

남궁연이 시무룩해졌다.

**

두 시진 후.

해는 서쪽으로 기울어갔다.

도착한 곳이 토지묘 부근이었기에, 남궁연은 당장에라도 귀오령의 광기에 찬 웃음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아 크게 숨을 들이마셔야 했다.

하지만 목적지는 토지묘가 아니었다.

그곳에서 이백여 장 너머에 흉물스럽게 버려진 하나의 객잔이었다.

바람이 불면 당장 허물어질 듯한 낡은 객잔은 먼지로 뒤덮여 있었고, 이 층을 덮어야 할 지붕은 절반이 뜯겨나갔고, 창문이랄 것도 없었으며, 나무판자도 떨어진 부분이 많았다.

후공은 남궁연에게 일을 맡겼다.

남궁연은 지시에 따라 근처 마을에서 일꾼들을 구해 객잔을 치우게 하고, 객잔 외부와 내부에 등불을 걸도록 했다.

마무리 될 쯤엔 석양이 내려앉고 있었다.

그리고,

“남궁 형, 이제 돌아가십시오.”

“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남궁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남궁연은 객잔이 정리되는 것을 보며 대충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아버지로부터 대공자가 적들을 초대하고, 이후 함정으로 들어가 보려 한다는 말을 전해 들은 터다.

또한 대공자가 귀오령의 금륜을 챙겨온 것도 보았다.

그렇기에 짐작컨대 이 객잔은 적들을 초대하는 장소다.

어떤 수단일지는 몰라도, 대공자는 이 객잔으로 적들을 불러들여 대화든 일전이든 벌이려 하는 것이다. 천룡대전의 마지막 날이자 절정인 내일이 오기 전에 끝내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더욱 이대로 돌아갈 수 없었다.

“저도 함께 있게 해주십시오.”

후공이 미소를 머금었다.

“제 지금의 경지로는 남궁형을 지켜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저를 돌려보낼 것이었다면 함께 오자고 하실 까닭이 없습니다. 어찌 갑자기 생각이 바뀌신 겁니까?”

고작 일꾼을 부려 객잔을 치우는 일은 대공자 혼자로도 충분했다. 그것을 귀찮게 여길 대공자가 아님을 알기에, 남궁연은 궁금해졌다.

동시에 불길한 생각도 떠올랐다.

어쩌면 대공자는 최악의 경우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여 죽음을 맞았을 때를 대비하려 한 건 아닐까? 그래서 이 장소를 알고 다시 찾아올 수 있는 사람으로 자신이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반드시 함께 남아야 한다.

그렇게 다짐을 새겼다.

하지만,

“지금.”

“……?”

“출발하세요.”

지그시 바라보는 시선에,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던 남궁연의 다짐은 부서져내렸다.

그대로 압도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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