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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화 서고 대공자-104화 (104/460)

104화. 대군.

여인이 이 층에 올라오며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삼십 대 초반의 미색이 뛰어난 여인을 보자마자 후공은 멈칫했다가 이내 갸웃했다.

‘……뭐지?’

두근.

심장이 저절로 반응했다.

순간적으로 마음에 커다란 울림이 퍼졌다.

스스로도 당혹스러울 만큼 평정심이 흔들렸다. 경지가 사성에 이르렀거늘, 아니 경지의 성취와 상관없이 자신의 마음이 동요된 건 기이한 일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여인의 외모에 이끌려서가 아니었다.

색기 가득한 눈웃음이 매력적이어서도 아니었다.

그때 여인이 말을 걸어왔다.

“난 귀사령이라고 해. 이렇게 만나게 돼서 너무 기뻐. 내가 얼마나 기뻐하는지 자긴 아마 모를 거야. 나 거기 앉으면 되는 거야?”

“……?”

후공은 다시 갸웃했다.

귀사령이 짐짓 울상을 지어냈다.

“왜? 안 돼? 여기 서 있어야 하는 거야?”

“앉아.”

“호호호, 자기도 참. 갸웃해서 괜히 긴장했잖아.”

“…….”

후공은 다시금,

두근!

심장박동이 더 빨라졌다.

여인의 터무니없이 활달한 말투 때문이 아니었다. 더 활달해도 상관없었다. 함께 온 놈 중 하나의 신형이 지붕 위에 자리잡고, 다른 한 놈이 객잔 바깥 나무 위에서 활에 화살을 재우고, 그것이 강궁이란 걸 보아서도 아니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문제는,

‘대체 이 향은 뭐지?’

향취가 온 신경을 자극해오고 있었다.

여인에게서 좋은 냄새가 났다.

그건 이제껏 어디에서도 맡아본 적이 없는 기이한 향이었다.

포근하고 그윽하면서도 매혹적이었다. 맡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냄새였다.

상식의 범주에서 보자면 문제될 건 없었다. 사람은 각자 체취가 다르고, 누군가는 좋은 냄새가 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영향으로 호감을 갖게 되거나 반대로 언짢아질 수도 있다.

하지만 후공에겐 달랐다.

향주(香主)다.

향의 주인으로서의 길을 걷고 있었다.

천향을 다룰 수 있는 이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었다. 심지어 천향이 삼주에 이른 상태. 향으로 영향을 끼칠지언정 향의 영향을 받는 건 매우 기이한 현상이었다.

향의 자극은 의식의 밑바닥, 내부의 기운까지 자극해오며, 심지어 들뜨는 마음까지 일으키고 있었다.

후공은 내심을 감추고 입을 열었다.

“혈주요희는 바쁜가 보군.”

“내가 와서 실망한 거야? 미안. 내가 가겠다고 했어. 자기가 궁금했거든. 근데 잘한 것 같아. 자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멋져서 놀랐어.”

간단히 주고받은 대화에 내포된 것이 많았다.

그리고 서로는 그 뜻을 이해했다.

귀사령은 천화서고 대공자가 귀오령에게서 많은 것을 캐냈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후공은 만난 적도 없는 귀사령이 자신의 얼굴을 어떻게 미리 알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귀사령이 생글거렸다.

“근데 자기 말이야, 원래 겁이 없어? 무섭지 않아?”

“무섭지. 도망갈 준비는 해두었는데 잘 될지 모르겠군.”

후공도 미소로 받아주었다.

“하하하, 그게 뭐야. 전혀 무서워하고 있지 않잖아.”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는지 귀사령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틈을 타 후공은 기습적으로 물었다.

“넌 향을 전혀 쓰지 않는군.”

“향?”

귀사령이 웃다 말고 갸웃했다.

그러다 이내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실망스럽다는 표정이 되었다.

“자기, 강호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무슨 뜻이지?”

“내가 여자라서 당연히 향을 쓸 것이라고 생각한 거잖아. 틀렸어. 강호인은 향을 쓰지 않아. 오히려 향을 감추지. 체취마저도.”

“아, 그런가.”

전직 무림맹주는 그런 게 있었냐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강호인의 생리를 후공이 어찌 모를까.

감각의 자극이란 관점에서 후각은 청각보다 더 강렬하다. 그렇기에 강호무림에서 향은 기피된다. 행적이 남을 뿐 아니라 격전에서도 좋을 게 없었다. 추종술에 능하거나 만리향을 다루는 이들에게는 쉽게 표적이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떠본 것이었다.

향을 쓸 리가 없는데, 강렬한 향이 나고 있으니 의아했다.

그래서 혹시 향이 나고 있는 걸 모르고 있는 건가? 그런 의문이 들었다.

우회하여 물었고,

그 결과는 놀랍게도 들어맞았다.

‘어처구니가 없군.’

후공으로선 황당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자신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데도 전혀 향에 대한 인지가 없다니. 스스로의 체취에 익숙해져서인가?

아니다. 이는 곧, 체취가 아니라는 뜻이다. 만약 이 향이 체취라면 그녀의 대답은 다르게 나와야 했다.

- 좋은 향이 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긴 해.

이 정도다.

‘도대체 뭐지?’

“향에 대해선 좋은 걸 배웠군.”

“자기 보기보다 어설프네. 천재라더니 완벽하진 않나 봐. 그래도 뭐 나쁘진 않아. 뭐랄까, 귀여워.”

“본론으로 들어가지.”

“너무 서두르는 거 아냐?”

후공이 무심히 바라보자, 귀사령이 풀죽은 목소리를 냈다.

“네네, 알겠어요.”

“너희가 대화에 응한 걸 보면 혈주요희가 내게 전하라는 말이 있을 것 같은데, 맞나?”

답변에 큰 기대는 없었다.

대신 후공은 천향삼주를 은밀히 운용했다.

눈에 보이는 상황은 지나치게 평범하다.

눈앞의 귀사령, 그리고 함께 온 두 명의 위치.

그래서 보이는 것, 오가는 대화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오직 특이한 지점은 향뿐이었다.

스스로도 맡지 못하고,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향.

오로지 천향을 다루는 자신만 파악하고 있으니 향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이 점점 더 커져갔다.

“맞아. 엄 부인이 전하라고 한 말이 있어.”

“…….”

“엄 부인은 자기와 다투고 싶지 않대.”

“왜지?”

“귀오령을 잃으면서 생각이 바뀐 거지. 그다음으로 쐐기를 박은 건 자기가 혼자 나타났다는 점이야. 겁먹었어. 서문세가가 당했던 것처럼 커다란 함정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 거지.”

후공이 피식 웃었다.

“재밌군.”

바로 귀사령이 어깨를 으쓱했다.

“난 솔직히 재밌지 않아. 너무 싱겁잖아. 십대세가와도 근사하게 싸워볼 기회인데 아쉬워.”

“전할 말이 그게 전부냐?”

“뭐, 아쉽지만…… 그렇게 됐어.”

후공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한 귀로 흘렸다.

그 와중 향을 찾아냈다.

예상대로였다.

향은 귀사령의 체취가 아니었다. 몸 전체에서 풍겨오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품 안, 정확히는 왼쪽 가슴 아래쪽에 자리하고 있는 그 무엇이었다.

‘대체 뭘까?’

천향삼주로도 간신히 찾아냈다. 워낙 자극이 강하게 뻗어나온 탓에 정확한 위치를 잡는데 애를 먹었다.

“후후, 나도 아쉽군.”

“자기까지 그리 이야기할 건 뭐야. 이제 친하게 지내면 좋잖아. 우리 가끔 만나자. 아, 맞다. 깜박했네. 잠깐만!”

귀사령이 뭔가 떠오른 듯 품을 뒤지며 말을 이었다.

“엄 부인이 자기에게 보낸 선물이 있어. 자기도 보면 아마 좋아할 거야.”

혈주요희의 선물이라면…….

‘대군인가.’

후공은 직감했다. 드디어 때가 된 모양이었다.

그 선물이 향이라면 대군이 확실할 터.

모른 척 기다려주었다.

귀사령이 품에서 검은 옥병을 꺼내며 웃었다. 꺼내느라 뒤적였던 부위는 왼쪽 가슴 아래쪽이었다.

검은 옥병의 향이 ‘대군’이라면 공기 중에 광범위한 독성을 퍼뜨리는 특성을 지녔으리라.

걱정은 없었다.

육각망에서 영악초에 이르면서 이미 만독불침이 된 터였고, 거기에 독양충까지 더해져 삼악을 이룬 지금 독은 물론이고, 그 유사한 무엇이라도 상관없었다. 과거에 그랬듯 독은 이제 맛만 좋다면 첨가물일 뿐이다.

후공이 그렇게 조금 더 지켜볼 요량으로 기다릴 때였다.

“어머?”

귀사령이 검은 옥병을 놓쳤다.

쨍그랑.

옥병이 바닥에 떨어져 깨져나갔다. 그녀가 고의로 떨어뜨렸다는 건 아이들도 알리라.

후공은 탓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탓할 수 없었다. 그럴 여력이 없었다. 옥병이 깨져나간 덕분에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렬해진 향이 전신을 자극해온 탓이었다.

심장은 멋대로 빨라졌고,

머리는 어찌된 게 쾌청해져 갔다.

그것을 숨기려 후공은 짐짓 미간을 좁혔다.

“넌 무슨 수작을 부리려나 보군?”

“수작은 무슨. 자긴 말을 왜 그렇게 해. 손이 미끄러졌잖아. 선물인데 깨져버렸으니 어쩜 좋아.”

그때였다.

후공은 흠칫 몸을 떨었다.

따끔!

뭔가가 종아리를 물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몸이 간지럽다는 느낌이 들면서 허리가 물리고, 등이 여러 군데 물리고, 어느샌가 손등도 따끔했다. 물린 지점이 순식간에 서른 군데가 넘었다.

무릎 위에 차분히 내려놓은 손을 내려다보며 그제야 알아챘다.

“벌레?”

옥병에 향이 담겼다고 생각했거늘, 벌레였다.

즉 특이한 향을 내는 벌레다. 벌레는 너무 작아 작은 점처럼 보였는데 여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심지어 작은 데 비해 빠르기까지 한지, 몸을 물기 전까지 제대로 인식조차 못했다.

‘……?’

“자기 왜 그래? 기분이 언짢아 보여. 괜찮은 거지?”

후공이 당혹한 모습이 되니, 귀사령이 히죽 웃었다.

“아하, 괜찮지 않은가 보네. 하하하, 괜찮지 않을 거야.”

“이 벌레들은…… 도대체…….”

후공의 목소리가 나른하게 흘러나왔다.

“호호호, 대군이라고 하면 알아들으려나?”

“귀오령이…… 말한…….”

“그래. 천룡대전을 쓸어버릴 대군. 귀오령은 심신상태가 오락가락해서 막연하게만 들려주었지. 알려지면 곤란하니까 말이야. 미안한데, 이런 게 수만 마리야.”

“수……만 마리?”

그 모습이 우스웠나 보다.

귀사령이 깔깔거렸다.

“풍열충이야. 작고 빨라서 밤에는 아예 인식조차 못해. 풍열들이 들이닥치면 모두 자기처럼 되고 마는 거지.”

“…….”

“반나절 동안은 물린 부위의 신경이 마비되어 축 늘어져. 손에 물리면 검을 들 수 없고, 팔에 물리면 팔을 들어올릴 수도 없어. 다리에 물린다면 어떻게 될까? 호호호호!”

“…….”

“그러게, 왜 겁도 없이 혼자 온 거야? 뭐 여러 사람이었다 해도 달라질 건 없었겠지만. 사실 엄 부인은 끝까지 풍열충을 감추고 싶어 했거든. 그래서 자기가 대단해 보이긴 해. 엄 부인이 겁먹고 풍열충을 쓰도록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뭐 거기까지지.”

“얼마나 더 떠들 셈이야?”

목소리는 지붕 위에서 들려왔다.

귀삼령이었다.

귀사령이 울상을 지었다.

“왜 그래? 재미는 이제부터인데 이러기야? 조금 더 갖고 놀고 싶어. 제발, 응?”

“후후, 미친. 그러든지.”

“고마워.”

귀사령이 다시 후공을 향해 생글거렸다.

“자기, 이제 자기가 어떻게 되는지 내가 알려줄게.”

“…….”

“자기는 사지가 잘려나갈 거야. 으윽, 끔찍하기도 하지. 엄 부인이 그랬어. 몸통만 남겨두고 데려오라고. 아마 이후에도 오래 살 거야. 돼지우리에 처넣고 진흙탕에 굴릴 생각인 거지. 호호호호, 너무 안됐어. 이렇게 잘생겼는데 비참하게 뒹굴 거잖아.”

“하나…… 묻자.”

“뭐든.”

“풍열충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어디에서…… 왔고…… 수중에 어떻게…… 넣었지?”

귀사령이 갸웃했다.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눈도 여러 번 깜박였다.

“이 와중에 지식을 채우려는 거야?”

“…….”

“놀랍네. 천재의 사고방식이란……. 뭐 대답 못해줄 건 없지. 우리 쪽에 곤충이며 벌레며 해박한 사람이 있어서 대충 들었어. 풍열충이 독양충의 먹이라고.”

“……?”

“독양충이 유인하는 향을 뿌린대나 뭐래나. 얼마나 멀리 있든 풍열충이 성체가 되면 그저 이끌려간대. 괴상하기도 하지.”

‘후후, 그런 것이었군.’

후공은 미소를 머금었다.

비로소 모든 의문이 풀렸다.

왜 향에 두근거렸는지, 심장은 멋대로 빨라졌는지, 머리는 왜 그리도 쾌청해졌는지 이해되었다.

더불어 풍열충에 물린 직후 기경팔맥을 휘도는 삼악의 기운이 날뛰듯 폭발적으로 상승했는지도. 풍열충은 삼악의 기운을 북돋웠다. 그래서 삼악의 기운은 처음부터 신났던 것이다. 풍열충의 향을 맡아서.

이런 풍열충이 수만 마리라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그러니 웃음이 날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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