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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화 서고 대공자-106화 (106/460)

106화. 늦지 않길.

귀삼령의 겁먹은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망설이다 겨우 입을 열었다.

“아니……. 전혀.”

“……?”

“그 전에…….”

“……?”

혈주요희를 지키려는 것이 아니라고?

그럼 무엇인가? 왜 이곳에?

후공은 다시 갸웃하며 바라봤다.

귀삼령은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눈길을 회피했다.

그리고 말했다.

“……먼저 약속해 줘.”

“……?”

“고통없이…… 바로 죽여준다고. 사실대로 말할 테니.”

“그러마.”

귀삼령은 허락받지 못하면 어쩌나 두려워했다가 대답을 듣고 안심했다.

이런 경지에 이른 이들에게는 상상할 수도 없는 무서운 손속이 있다는 것을 아는 탓이다. 마음대로 죽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건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후공은 세상 그 누구보다 체념한 눈동자를 많이 봐온 이었다. 적으로 만난 상대는 죽지 못할까 두려워하지, 살아남으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익숙했기에, 지금은 굳이 고문 없이도 진실을 들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귀삼령의 표정에 홀가분함이 깃들었다.

약속을 받아 좋았다.

지금부터 꺼낼 말은 간단치 않은 것이다.

특히 눈앞의 천화서고 대공자는 혼자 힘으로 혈음곡을 쓸어버리려는 자.

이것의 의미는 그가 단지 강하다는 뜻만이 아니다.

누군가를 지키려는 자의 모습이다.

그 누군가가 위험과 직면하는 것이 싫어서, 그 전에 혼자 끝내버리려는 자의 의지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제 꺼낼 말은 반드시 분노를 살 것이고, 그렇게 되어 바로 죽지 못할까 봐 그것이 두려웠을 뿐이다.

“요희…… 그러니까…… 엄 부인은…….”

“…….”

“이미…… 남궁세가로 떠났다.”

“……?”

후공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귀삼령의 말이 이어졌다.

“너를…… 잡은 다음…… 그곳으로 우린 널 데려가기로 했다.”

“시간 차는?”

“한 시진 남짓……. 아니 그 이상……. 우리가 늦게 오기도 했고……. 아마도…….”

귀삼령은 ‘잠시 후면 당도하겠군’이라는 말을 꺼내려다 황급히 삼켰다. 이미 어느샌가 천화서고 대공자의 안광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늦었을까?’

후공이 중얼거렸다.

지금의 경지는 사성 중기에 근접.

전력을 다한다 해도 돌아가는 데까지 한 시진은 넘을 터. 반면 풍열충이 남궁세가와 천룡대전에 참석한 모두를 휩쓰는 데는 고작 일각도 채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다음은…… 어둠.

도착 시간을 앞당겨야 한다.

최소 반시진 아래로.

만약 늦는다면…….

순간 여러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소천개, 묘빙빙, 은앙개, 남궁연, 남궁학, 그리고 소예……. 떠오름이 멈추지 않는다. 묵영과 여러 후기지수들, 취운개와 몽연몽, 칠비단혼, 그 외 수많은 얼굴들이 차례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후공은 품에서 영단을 꺼냈다.

붉은 색깔을 띤 영단이었다.

윗면에 약왕문주 용악의 독문표식인 초승달이 음각되어 있었다.

후공은 바로 원신단을 삼켰다.

‘늦지 않길.’

이내 삼악의 기운이 폭발했다.

원신단의 효용이 즉시 발현되면서 전신 경맥이 급격히 팽창하였고, 내부에 광풍이 일며 난폭한 힘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과연 원신단이다.

거의 오성에 육박했다.

귀삼령이 놀라 눈이 커졌다.

눈앞에서 엄청난 기운이 뿜어져 나오더니, 무심함 속에 천화서고 대공자의 안광이 자줏빛 광채를 폭사하며 빛줄기를 분분히 뻗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머리카락은 천천히 너풀거리고 있었다.

옷자락도 미칠 듯이 나부끼며 펄럭이는 가운데, 귀삼령은 대공자의 손이 천천히 자신의 이마에 닿는 것을 느꼈다.

그저 살짝 닿고 떨어졌다.

그 순간,

파아앙!

흙먼지가 일면서 대공자의 신형이 까마득히 솟구쳐 어느샌가 밤의 허공에 점이 되어갔다.

그 광풍을 넋놓고 바라보던 귀삼령은, 천화서고 대공자가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한순간,

그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

그 밤.

남궁세가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저녁 무렵 때부터였다.

백리가주가 도착하면서 심각해졌다.

약왕문은 인계하는 과정에서 백리가주의 자백을 받아냈고, 남궁세가 쪽에서도 이송하면서 다시금 혈음곡과의 연루 사실을 확인한 터.

파장은 컸다.

듣는 것과 보는 것은 다른 법.

건너 들었을 땐 반신반의했던 이들도 비로소 사안의 중대성을 체감하고 위기의식을 느꼈다.

백리세가가 어디 평범한 가문인가.

현 강호의 십대세가 중 하나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는 곳이다. 충격이 컸던 만큼 혈음곡, 혈주요희, 대군, 천룡대전 몰살이라는 말들의 무게감은 산악이 되었다.

대군은 확정.

무슨 일이든 일어난다.

그렇게 생각했고, 지도부는 전의를 다지는 한편으로 모두에게 정보를 공개했다.

그동안은 혼란과 동요를 피하기 위해 감춰두었지만, 이제는 그럴 때가 아니었다. 백리세가가 드러났고, 천룡대전에 남은 날은 내일 하루뿐인 것이다.

그동안의 경과가 드러나면서, 당연하게도 후기지수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사황천의 잔재인 혈음곡이라니?

그들이 서문세가를 잠식해 들어가고 백리세가까지 연루되었다니? 백리진풍이 왜 갑자기 험악하게 굴었는지 이해되자 분노했고, 대군에 대해서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 더 큰 충격은,

천화서고 대공자였다.

그의 행적이었다.

“무슨 그런…….”

누구 할 것 없이 이런 탄성을 터뜨렸다.

다섯 번째 역용자의 존재를 알아차린 시점에서 남궁세가를 떠난 것으로 알려진 천화서고 대공자가 실상은 외부에서 적을 추적하고 있었고, 결국 찾았으며, 내막까지 밝혀낸 것이다.

그 모든 걸 혼자 해냈다.

그리고 지금은 적의 본진을 찾고 있다고 한다.

여전히 홀로.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누구는 경이롭게 여겼고, 또 다른 이는 ‘왜?’라는 의문을 품기도 했다.

남은 이들은 온갖 비난과 괴상한 억측을 쏟아내기 바빴는데, 그 시간 천화서고 대공자는 위험과 정면으로 마주했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모두를 지키려는 자처럼.

하아……. 탄식했다.

천룡대전의 비무가 다 뭔가.

후기지수들은 자신들과 천화서고 대공자가 비교 대상이 아님을 마음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형아, 좀 쩌는 듯.”

“에헴, 괜히 우리 두목이냐.”

“다들 왜 난리인지 모르겠네. 한심해 죽겠어. 천공단주를 여태 뭐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그 덕분에 남궁세가로 돌아온 천공단 세 명의 정예는 으쓱해져 모가지에 힘이 가득 들어갔다.

*그리고 그 밤.

남궁세가의 지하 모처에서는 비명소리가 쉴 새 없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제발…… 이제 그만……. 난…… 모른다고…… 하지 않았느냐! 내가 알면…… 왜 말을…… 하지 않겠느냐!”

“다시.”

“크아아아아아아아아!”

백리가주 백리청은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그의 해명은 통하지 않았고, 남궁가주 남궁학의 의지는 결연했다. 날이 밝기 전까지 대군에 대해 알아낸다. 남궁학은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다시.”

남궁학이 나직히 말하면 그의 심복 비류검은 충실히 분근착골수를 펼쳤다. 그때마다 벽의 쇠사슬에 사지가 묶인 백리청은 몸부림치며 울부짖었다.

뼈와 살을 분리해버린다는 분근착골수다.

강호에선 고전적이고 원론적인 고문 수법. 하지만 원론적이란 건 그만큼 검증되었다는 의미다.

“남궁가주……. 모르는 걸 무슨 수로 자백하라는 것이냐. 정녕 대군에 대해서는…….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백리청, 혈음곡의 대군은 무엇이냐?”

남궁학의 억양없는 질문은 어느덧 한 시진째.

어느샌가 백리청의 전신은 피멍이 들지 않은 곳이 없었고, 살도 뼈에서 뜯겨나간 듯 흐물거렸다. 한쪽 어깨도 탈골되어 팔은 쇠사슬에 위태롭게 걸려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남궁학의 눈빛에 연민 따윈 없었다.

백리청은 차려진 밥상이었다.

천화서고 대공자가 차려주었다.

약왕문에 전서매를 날리자는 것도,

약왕문이 적극적으로 나선 상황까지도 그 어린 친구 덕이다.

그렇기에 자신은 그저 떠먹기만 하면 되거늘, 만약 대군을 알아내지 못한다면 천화서고 대공자를 볼 낯이 없어지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돌아온 남궁연이 말했다.

이 밤 대공자는 적들을 만날 준비를 끝냈다고.

그러니 자신도 최선을 다해야 했다.

“비류검, 지금부터는 손가락 하나씩을 잘라라.”

“네!”

비류검은 뒤춤에서 비수를 빼들었다.

백리청이 자조섞인 웃음을 흘렸다.

“크크크……. 지독하구나. 내가…… 그들 편에…… 선 것은 맞다. 그걸…… 부인하는 게 아니지 않느냐. 하지만…… 대군에 대해서 요희는…… 말하려 하지 않았다. 알고 있다면……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 지경이 됐는데…… 왜 숨기겠느냐.”

누가 누굴 설득하는가.

비류검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백리청의 오른손 엄지손가락에 비수를 가져갔다. 검을 병기로 다루는 이들에게 엄지손가락의 의미는 무공의 상실이나 다름없다.

백리청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남궁학이 다시 물었다.

“백리청, 대군이 어떤 형태인지부터 이야기를 시작…….”

남궁학이 말을 멈추고 눈을 부릅떴다.

‘……?’

따끔! 모기에 물린 듯 다리 쪽이 따끔했는데 뭔가 이상했다. 하지만 늦었다. 순간 갑자기 다리가 풀리면서 남궁학은 맥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뭐, 뭐지?’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다. 마비되었다. 설마 점혈? 마치 점혈된 느낌이어서 남궁학은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었다.

신경을 마비시키는 독인가? 하지만 따끔함은? 산발적인 의문 속에 이내 따끔함이 허리와 등, 가슴으로 이어졌다가 목까지 이르면서 남궁학은 이젠 앉아있지도 못했다. 그대로 모로 쓰러졌다.

전신의 마비.

그렇게 드러누운 채로 비로소 보았다.

‘대군…….’

아른거리고 일렁인다 싶을 정도로 작은 벌레들이 임무를 마쳤다는 듯 다다다, 빠르게 바닥을 움직이며 문쪽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주군……. 대군이란 것이…….”

비류검도 이미 당해 허탈한 목소리를 흘렸다. 남궁학은 할 말을 잃었다. 벌레들이 이곳 지하석실까지 들어왔다는 건, 이미 바깥 상황은 끝나 있다는 의미다.

찰그랑, 찰그랑.

쇠사슬에 매여 있던 백리청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대군이 벌레였단 말인가! 기묘하구나, 기묘해! 으하하하하하!”

백리청 본인도 풍열충에 당했지만,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상황은 역전되었다.

그르르릉.

이내 석실 문이 열리며 세 명의 사내가 들이닥쳤다.

은빛가면을 쓴 귀령주와 귀살들이었다.

귀령주는 남궁학을 슬쩍 일견했다가 백리청에게 다가가 검을 휘둘렀다. 쇠사슬을 잘라냈고, 무너지는 백리청을 부축했다.

“귀령주, 저 벌레들은?”

“풍열충이오.”

귀령주는 짧게 답하고 검은 환약을 백리청의 입에 넣어주었다. 전신의 마비가 순식간에 풀리자, 백리청이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하하! 남궁학, 이제 네놈이 내 손속을 맛볼 차례로구나.”

백리청은 비류검이 떨어뜨린 비수를 집어들었다.

분근착골수를 당한 탓에 절룩이며 두 걸음 옮겼을 때, 귀령주가 가로막았다. 백리청이 사납게 노려봤다.

“무슨 뜻이지?”

“백리가주, 남궁가주의 목숨은 당신의 것이 아니오.”

“응?”

의문을 발하는 백리청을 향해, 은빛 가면 안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혈주요희께선 간단히 끝낼 생각이 없소.”

“…….”

“가주, 그대는 사람이 언제 가장 큰 고통을 느끼는지 알고 있소?”

“…….”

“모른다면 알게 될 것이오. 이 밤, 연회가 개최될 테니.”

“연회?”

“그렇소. 연회. 피의 연회.”

백리청이 멍하니 은빛 가면을 바라봤다.

표정없는 가면인데, 웃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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