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107화 (107/460)

107화. 죽음 직전의 기억은 영원할 테니.

스스스스.

후공의 신형은 빠르게 밤을 돌파해갔다.

시야 속 풍경은 찰나간에 바뀌어간다.

숲이었다가 들판이 되고, 순식간에 민가의 지붕이 되고, 어느샌가 시냇물가가 되었다.

원신단의 효용이 타오르는 상태.

오성의 경지에서 발휘되는 자령안은 대낮과 같은 시야를 선사했고, 신법은 광풍이었다.

숲을 관통하면서 일으킨 바람소리에 짐승들이 놀라 같이 뛰기도 했고, 늦은 밤을 걷는 이들의 곁을 스쳐도 그들은 그저 바람이 분다고 생각할 뿐 후공이 지나간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과연 약왕문이요, 과연 원신단이었다.

금공단을 얻었다면 크게 후회했으리라. 금공단이 희대의 영약이라지만 죽은 이를 살릴 순 없다. 하지만 원신단은 죽음이 당도하기 전에 적을 섬멸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뜻하지 않은 행운도 따라왔다.

본래 원신단의 유지시간은 일다경(약15분) 이내.

한 번도 복용한 적은 없었지만, 후공은 약왕인 용악이 사용하는 걸 본 적이 있어 알고 있었다.

한데 지금,

유지시간이 지났음에도 효용이 그대로다. 삼악과 원신단의 조화가 원인이었다.

본래 원신단은 내력의 급상승을 끌어내는 동시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경맥의 손상을 돌본다. 최대치까지 치솟게 한 다음 일정시간 유지되었다가 하강하며 본래의 수준으로 돌아간다.

그게 전부여야 하거늘,

기이하게도 삼악과 결합되면서 그 과정이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서 되풀이되고 있다. 마치 장작불이 잦아들려 하면 다시 기름을 끼얹는 식. 원신단이 기이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앞으로 두세 번만 더 이어지길.

후공은 마음으로 바랐다.

더불어,

다른 희망도 품어 보았다.

‘혈주요희여, 부디 유희를 즐겨라.’

귀사령이 말했다.

풍열충의 마비 효과가 반나절이라고.

즉 혈주요희에겐 동이 틀 때까지 여유가 있다.

그때까지는 그녀에게 절대적인 권세, 생사여탈권이 주어진다. 아마 요희는 느긋하게 즐기려 할지도 모른다. 공포를 극대화하며 유희의 시간을 보낼 가능성이 크다.

또 한편으로 사지가 잘려나가고, 머리와 몸통뿐인 채로 들려올 ‘천화서고 대공자’를 기다려줄지도 모른다.

사람은 자랑하고 싶어 한다.

알아봐 주길 바란다.

칭찬받으려 한다.

후공은 요희가 그러길 바랐다.

많은 이들에게 ‘천화서고 대공자’를 내가 이꼴로 만들었다며 우쭐하길, 그걸 위해 당도할 때까진 모두를 살려두길 바랐다. 유희를 즐기려 한다면 마땅히 그리할 것이다. 그 험한 모습을 보는 모두의 일그러지는 표정이 궁금할 테니까.

하지만 그 희망은 남의 것.

제어 불가능하다.

거기에 운명을 맡겨둘 순 없다.

결국 중요한 건,

진정 기대어야 하는 건,

나 자신.

쾅!

원신단이 삼악과 어우러져 폭발을 일으켰고, 후공은 신법의 속도를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

남궁세가의 밤은 연회 준비에 한창이었다.

연회의 장소는 대연무장.

오십여 개의 탁자가 놓였고, 거기에 주요 인사들은 나무토막 혹은 인형처럼 들려져 한 명씩 앉혀졌다.

남궁가주를 위시한 남궁세가의 모든 가솔과 장로들, 그리고 주요 직책자들이 자리를 채웠고, 모용가주를 비롯해 금번 천룡대전에 초대된 이들이 옮겨졌다. 인원은 족히 이백여 명.

요리나 술도 없는 연회.

연회의 주최자는 혈주요희와 혈음곡.

이 의미는 명확하다.

잔혹한 피의 결말이 눈에 선하다.

몇몇은 벌써부터 구슬프게 흐느꼈고, 누군가는 허망함에 깊게 탄식했으며, 또 누구는 분노에 차 눈을 이글거렸다.

허무할 수밖에 없다.

고작 일다경.

그 짧은 시간, 남궁세가는 혈음곡의 손에 떨어진 것이다.

풍열충은 은신과 신법에 능한 고수이자 점혈의 대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어서 담장을 타 넘고, 정문을 쉽게 돌파했으며, 거처를 돌파함에는 문틈 사이로도 쉽게 오갔다.

그런 풍열이 수만이었기에 스쳐 지나면서 끝났다.

남녀노소는 물론이고 심지어 짐승도 예외가 아니었다. 험악하게 짖어대던 남궁세가의 사냥개들과 고요히 잠을 청하던 색황조조차 봉변을 당해 땅으로 떨어진 채 두려운 눈망울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렇게 쓰러진 이들 가운데 요주의 인물들만 따로 색출되어 연회를 위해 옮겨진 터.

“으하하하하하하, 요희! 정녕 감격스러운 광경이오.”

“가주, 정녕 저도 꿈만 같군요.”

백리가주 백리청이 광소를 터뜨리며 하는 말에, 요희는 다정하게 응해주었다.

요희가 괜히 하는 말은 아니었다.

꿈만 같을 수밖에 없다.

남궁세가와 천룡대전을 장악한 혈음곡의 인원은 총 열여섯 명. 고작 이 인원만으로 제왕검이라 칭하는 남궁가주와 남궁세가의 숱한 고수들을 무력화시켰다.

아니, 어디 그뿐인가.

모용가주, 하북팽가주를 위시한 여러 가주들과 심지어 무림맹 안휘지부장과 개방의 분타주까지 손에 넣었으니, 요희로서는 희열이 들끓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백리청, 너는 어찌 그리 악독할 수 있느냐!”

사마가주 사마유가 울화를 터뜨렸다.

정작 주도자는 혈주요희였지만, 백리청에 대한 분노가 더 컸다. 믿었던 자여서, 그래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어서 눈뜨고 봐줄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이 그렇다.

믿었던 자의 배신은 더욱 뼈아프다.

“네놈이 짐승만도 못한 놈일 줄은 상상도 못했구나!”

“백리청아, 너는 오늘 살아남는다 해도 천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백리가의 선조들에게 부끄럽지도 않느냐! 너 하나로 백리세가는 영원히 치욕 속을 뒹굴 것이다!”

몇몇 가주들이 사마유를 뒤따라 분노를 토해냈다.

하지만 백리청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저 듣지 못하였다는 듯 싱글거리며 요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요희, 이 연회에 대해 노부는 기대가 크오.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려줄 수 있겠소?”

“물론이에요. 본녀는 이들에게 큰 선물을 베풀 생각이랍니다.”

“응? 선물이라니, 무슨 말씀이시오?”

백리청이 갸웃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은 뜻깊어야 하니까요. 결코 잊을 수 없어야 하고. 물론 이들에게 돈이나 보물은 의미가 없을 테지요.”

“당연한 말씀이오.”

“그래서 본녀는 고민해 보았습니다. 무엇일까? 무엇이 가장 마음에 와닿는 선물이 될 수 있을까? 그랬더니 떠오르더군요.”

“……?”

백리청이 바라보는 것으로 물음을 대신했다.

요희는 의문이 가득한 백리청을 마주보며 따스하게 미소지었다.

“죽음 직전의 마지막 기억을 선물하자. 저승으로까지 가져갈 최악의 슬픔을 선물하자. 죽어서도 기억에 남을 처참함으로. 호호호, 영원한 선물이 될 테니 그것이야말로 값진 것이 아니겠어요?”

“아…….”

백리청이 말을 잃었다.

무슨 의미인지 대강 짐작된 것이다.

그 모습에 혈주요희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녀는 고상한 귀부인의 외모에 작은 몸짓마다 기품이 묻어났기에 오히려 더 끔찍해 보였다.

요희가 말을 이었다.

“딸이며 아들이 다리가 하나씩 잘려나가면서 죽지도 못하고 꿈틀대면서 비명을 지르는 겁니다. 막 기어가고 발버둥치겠죠. 그때 또 칼로 난자하는 겁니다. 얼굴이며, 몸이며 죽지 않을 만큼만요.”

꿀꺽.

백리청이 마른침을 삼켰다.

“호호호, 그 모습을 지켜보는 아비와 어미는 어떻게 될까요? 미칠 테지요. 그런 비통해하는 부모의 모습을 또 딸과 아들이 바라보는 겁니다. 그럼 또 그들도 미치게 될 테죠.”

“…….”

“아비와 어미는 그럼에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지켜봐야만 하기에…… 호호호, 아마도 창자가 찢겨나갈지도 모르겠군요.”

“…….”

“그렇게 아비는 딸의 죽음을 바라보고, 어미는 아들이 죽어가는 것을 볼 것이며, 나이 든 사형은 어린 사제가 피범벅이 되어 울부짖는 것을 보게 되면…….”

요희가 백리청의 눈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이 밤은 더없이 아름다울 거에요.”

“…….”

“그 아름다운 기억은 저승에 가서도 잊을 수 없을 테죠. 백리가주, 이 얼마나 뜻깊은 선물인가요. 그렇지 않나요?”

“하하하! 그, 그렇겠구려. 생각만 해도…… 하하하!”

백리청이 태연한 척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잘 되진 않았다.

이젠 한패여서, 자신이 당할 리 없음을 아는데도,

백리청의 목소리는 떨려나왔다.

하지만 그 충격이 남궁가주만 할까.

인형처럼 앉혀진 모두의 심정만 할까.

아니다.

하늘이 무너졌다.

조근조근 말함에도 혈주요희의 목소리는 어찌된 게 또렷했기에, 한마디도 빠짐없이 듣고 말았다. 듣는 내내 아직 본 것이 아님에도 이미 눈에 펼쳐진 것 같아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흐흐흑……. 흑흑…….”

여기저기서 흐느낌이 터져나왔다.

가주의 부인들이었다. 또한 어머니들이었다.

그녀들이 서럽게 흐느껴 울어도 가주들은 탓할 수 없었다. 그들도 소리만 내지 않을 뿐, 이미 울고 있는 것이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아비된 자로서 미안하고 서러움이 복받쳤다.

심지어 까짓 죽는 게 대수냐며 앉혀진 후에도 낄낄거림을 멈추지 않던 취운개조차 몸을 덜덜 떨었다.

소천개, 은앙개.

어린 두 사제가 비명 속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떠올랐는데, 어떻게 된 게 그 소리가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그 와중,

“시발년이 아주 신났네.”

욕설이 터져나왔다.

모두가 놀라 고요해졌다.

요희도 목소리를 쫓아 시선을 돌렸다.

누구냐는 듯 요희가 갸웃하자, 곁에 있던 귀령주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귀령주는 연회 참석자를 선별할 때 남궁세가의 시녀들을 대동한 터라, 이미 면면의 신분을 파악하고 있었다.

요희가 들었고, 이내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것이 또 묘빙빙의 욕을 불러왔다.

“웃는 것밖에 못하는 미친년인가? 너도 얼마 안 남았어.”

“아이야, 그게 무슨 말이니?”

“천공단주가 오면 너흰 다 끝장 날 테니까!”

“천공단주?”

“그래, 천공단주. 천화서고 대공자.”

“아이야, 너는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

요희가 다정한 미소로 물었다.

“그런 게 있어. 늙고 추한 너는 몰라도 돼!”

스릉!

귀살 중 하나가 검을 뽑았다.

요희가 손을 들어 제지하자, 신형을 날리려던 귀살이 묘빙빙 쪽을 살기등등하게 노려본 후 착검했다.

그럼에도 요희의 눈길만은 포근했다.

“백화장의 묘빙빙이라고? 그렇구나. 그래도 너는 남들과 달리 기개가 있구나. 마음에 든다. 원래는 말하지 않고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했다만, 널 보니 아무래도 말을 해줘야겠다 싶구나.”

“…….”

“그래, 맞다. 네 말대로다. 천화서고 대공자는 이곳으로 오고 있단다. 하지만 시간은 좀 걸릴 게다. 왜냐면…….”

“……?”

오고 있다고?

묘빙빙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모습에 요희의 미소가 짙어졌다.

“다리가 없어.”

“……?”

“잘랐거든.”

그 말이 떨어진 순간,

주륵.

묘빙빙이 입술을 떨며 눈물을 흘렸다.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 요희를 바라보면서, 뚝뚝 눈물을 쏟아냈다.

그 모습에,

요희는 아차 싶어 탄성을 내질렀다.

“아! 이런……. 미안하구나. 내가 깜박했구나.”

“…….”

“팔도 없단다.”

“…….”

“잘랐거든.”

“…….”

“아이야, 미안하구나. 그래도 나머지는 멀쩡하니 위안 삼으렴. 그리고 천공단주인지 천화서고 대공자인지 녀석이 당도하면, 기대하렴. 너도 그 곁에서 하나씩 팔다리를 뜯어내 줄 테니. 그땐 너도 나처럼 활짝 웃을 수 있겠지?”

이런 식으로 하라는 듯, 요희가 활짝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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