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삼악과 천향의 주인.
후공은 소예를 울도록 두었다.
지금은 울어도 된다.
굳이 위로의 말은 건네지 않았다.
그저 손을 잡는 것으로 위로를 대신했다.
이곳에 들어선 순간 어떤 상황인지 한눈에 간파했기에, 현재 소예의 심정이 어떨지 잘 알고 있었다.
그나마 얼마나 다행인지.
예상대로 풍열충의 습격에 무너졌지만, 유희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을 뿐이었다. 사마가주의 배신은 뜻밖이었지만 그건 곧 응징하면 되는 일.
시선을 돌려 연회석 쪽의 인형들을 둘러보았고, 이어 혈주요희 쪽을 훑었다.
양쪽 진영 모두 표정이 가관이다.
아무도 말을 하고 있지 않건만,
‘꿈인가, 현실인가.’
후공은 이런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요희 쪽이든 남궁세가 쪽이든 얼이 나가 있었다.
이해는 된다.
어느 쪽이든 상상하던 광경이 아닐 테니.
그것도 대연무장의 중앙,
사지 멀쩡한 몸으로 양 진영의 중앙에서 소예의 손을 잡고 서 있는 모습이 아닌가.
후공은 소예의 손을 놓아주었다.
진기의 유도는 이 정도면 충분했다. 소예를 등 뒤에 두고 혈주요희를 바라보았다.
“혈주요희, 유희는 즐겁더냐?”
“천화서고……. 네, 네놈이 어떻게…….”
요희가 더듬거렸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 눈이었다.
후공은 피식 웃었다.
그녀가 차마 잇지 못한 말이 무엇인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풍열충을 무슨 수로?’ 정도의 뜻이 요희의 눈동자에 떠돌고 있었다.
그때였다.
오고 간 대화에 정신을 차렸음인가.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뒤늦게 확신했는지, 요란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형아! 형아, 맞지!”
“두목, 와줬구나! 난 올 줄 알았다고! 믿었어!”
“내가 뭐랬냐! 천공단주는 반드시 온다고 했잖아!”
“대, 대공자!”
천공단이며 취운개며 남궁연 등이 불러댔다.
녀석들, 느리기도 하지.
또 믿고 있었다면서 울먹거리는 건 뭔지.
후공은 내심 웃음 지을 뿐 그대로 떠들게 두었다.
그저 요희에게 시선을 둔 채로 입을 열었다.
“요희, 인정해야겠구나. 내가 실수했다.”
“무슨 말이지?”
요희가 미간을 좁혔다.
‘실수라니?’
상대가 실수한 점이 있다면 자신에게 이로운 것임에도, 요희는 섣불리 마음을 놓지 못했다. 그녀의 안색은 여전히 경직되었고, 동공에 머무는 불안한 빛은 여전했다.
- 풍열충이 통하지 않는 자.
그녀의 머리에서 이 생각이 떠나지 않는 탓이었다.
서문세가의 악몽도 떠올랐다.
식물이나 초식동물 같던 천화서고의 반격에 얼마나 많은 걸 잃었던가. 핏줄과 기반까지. 그 당시 반격의 주도자였던 서생이 이곳에 다시 있다.
후공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서문추를 처리할 때 너의 존재를 파악하고 끝냈어야 했거늘……. 나답지 않았다. 그러니 실수일 수밖에.”
정녕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말.
그럼에도 요희는 대응하지 못하고 마른침만 삼켰다.
자꾸 망설이게 된다.
이유는 단 하나.
풍열충을 아는지,
풍열을 상대한 게 맞는지 묻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듣게 될 말이 두려웠다.
무엇보다 방금 무공의 경지를 보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휘파람 속에 담긴 내력이며, 번뜩인 순간 허공에 갑자기 존재한 듯 나타난 신법, 그리고 남궁소예를 끌어가던 허공섭물까지.
심지어 귀살들이 흉포하게 발출한 촘촘한 암기의 그물마저도, 몇 번 공중에서 휘도는 것으로 모두 비껴냈다. 여기에 풍열까지 해소할 수 있다면 혈음곡은 파멸이었다.
그런 요희의 망설임을 후공이 모를 리 만무했다.
‘후후…….’
풍열에 대해 아느냐고?
물론.
이미 서른 마리가 넘는 풍열의 체액을 흡수했다. 삼악이 흥겨워하는 맛좋은 요리였다.
그런 의미에서,
후공은 친절을 보이기로 했다.
궁금해하니 그에 응해주는 것이 예의.
“하나 묻자.”
“…….”
“대군이란 건 독의 일종인가? 무슨 독이지?”
모르는 척 질문을 던졌다.
그 어떤 것보다 괴로울 희망이란 이름의 고문을 요희에게 잠복시켰다.
높이 올라갈수록 추락은 깊고 요란하며,
절망은 희망을 품고 있을 때 더욱 치명적인 법이다.
요희가 어떤 추락을 보일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터.
요희는 너무도 간단히 덫에 걸렸다.
요희의 눈동자에 서서히 꽃이 피듯 희열이 피어올랐다.
‘아……. 놈이 풍열을 몰라. 그렇게 된 것인가.’
요희는 내심 뛸 듯이 기뻤다. 대강의 상황이 그림처럼 머리에 떠올랐다. 놈의 무공이 워낙 뛰어난 탓이었겠지. 귀사령이 풍열충을 써보기도 전에 당했다면, 풍열을 모를 수도 있다.
이후 귀령들을 취조하여 듣게 된 말이 이미 남궁세가로 떠났다는 말이라면, 검은 옥병에 대해 알 겨를이 없었으리라. 그러니 이처럼 묻는 것이 아니겠는가.
헛된 희망인 줄도 모르고 요희는 그렇게 정리된 생각에 미소를 되찾았다. 그건 귀령주와 귀살들, 도충상인도 다를 바 없었다.
도충상인이 껄껄 웃었다.
“요희, 일이 잘 풀립니다. 쉬운 길로 갑시다. 서둘러서.”
“호호호, 당연한 말씀이에요.”
그런 오가는 대화에 당혹을 금치 못한 건 연회석 쪽이었다.
천화서고 대공자가 살아돌아왔기에 응당 벌레에 대처할 수단이 있나 보다 여기고 있었거늘, 전혀 모르고 있다 싶으니 앞으로 드러날 결과에 누구 할 것 없이 암담해졌다.
그리고,
“혀, 형아! 독이 아니라 괴상한 벌레야. 지금 당장 도망쳐야 해! 빨리!”
“그래, 두목! 우린 괜찮으니까 얼른 피해! 아니 도대체 뭐하고 서 있는 거야! 빨리 도망치라고, 제발!”
“대공자, 대군이란 건 몸을 마비시키는 벌레였네. 족히 수만 마리는 되는 터라 자네가 감당할 수 없으니, 바로 몸을 빼내게!”
천공단을 비롯한 여러 목소리가 걱정을 토해냈다.
‘웃기는 놈들…….’
후공은 내심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녀석들이 도망을 권한다.
이미 신법이 뛰어남을 보았기에, 지금이라도 몸을 뻬낸다면 훗날을 기약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후공은 그런 외침들이 좋았다.
흐뭇해졌다.
자신들은 괜찮으니 도망치라니. 도망치고 나면 전혀 괜찮지 않게 될 놈들이 누굴 걱정하는 건지.
제법 멋진 녀석들이지 않는가.
그래, 이 정도는 돼야 살리는 보람도 있지.
‘하지만, 잠시만 기다려다오. 나의 연회는 이제 시작이니.’
후공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기분을 들뜨게 하는 풍열의 향이 몸 안 가득 스며들었다. 이 신비로운 향을 아무도 맡지 못하고 있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검은 옥병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진하며 자극적인 향에, 벌써부터 삼악의 기운이 태풍이 일듯 요동치고 있었다.
풍열은 그저 독양충이 좋아하는 요리일 뿐.
저기 보이는 항아리에 수만 마리가 있다는 생각에, 후공은 기대될 뿐이었다.
후공은 짐짓 우습다는 듯 요희를 향해 껄껄 웃음을 터뜨려주었다.
“하하하! 요희, 대군이란 것이 고작 벌레였다는 말이냐. 넌 서문추만큼이나 같잖구나.”
“호호호, 오냐, 너의 기고만장이 어떻게 변할지 보자.”
요희도 마주 웃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도충상인!”
도충상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항아리를 열고, 손에 쥐고 있는 손가락만 한 크기의 대롱을 입에 물었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곤충에게만은 소리가 들리는지, 풍열충들이 새까맣게 항아리에서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방향은 오직 한 지점으로 유도되었다.
한 곳, 천화서고 대공자를 향했다. 그 기세가 맹렬하기 이를 데 없고 수만 마리가 꿈틀꿈틀 엉기며 움직이니, 그 광경이 심히 기괴하고 공포스러웠다.
그야말로 어둠의 군단!
그 광경을 천화서고 대공자가 움직임도 없이 석상처럼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뒷모습만 봐선 놀라 몸이 굳어버린 듯하고, 질려버려 발을 뗄 수조차 없는 것처럼 보였기에,
“형아아아, 제발 도망쳐!”
“대공자, 당장 피해야 하네!”
“안돼에에!”
마지막 외침이 묘빙빙이었는지, 소예였는지 아니면 여럿이 함께였는지 큰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 외침 속에,
후공은 다가오는 풍열을 향해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알려주마.’
살짝 내뻗은 손길은 함박눈이 내리는 날 눈송이를 손으로 받아내려는 모습과 흡사했다.
이제 풍열의 대군은 거의 지척.
후공은 손안 가득 독양충의 향, 풍열을 유인하는 향을 발현했다.
‘삼악과 천향의 주인이 누구인지.’
순간, 눈앞에 당도한 풍열충이 향에 미쳐버렸다.
수수수수수수!
풍열이 서로 경쟁하듯 손안으로 들어가려 솟구쳐올랐다. 날개도 없으면서 튀어올랐다. 그 와중에 서로 부딪혀가며 내는 소리조차 굉장했다.
풍열은 오직 후공의 손바닥으로만 모여들었다.
손바닥을 벗어나지 않았다. 튕겨져 밀려난 놈은 다시 튀어올랐고, 손바닥에 당도한 놈들은 삽시간에 손 안 장심에 체액이 흡수당해 말라 부스러지면서 행복한 죽음을 맞았다.
당연히 삼악의 기운도 미쳐 날뛰었다.
풍열충을 먹이 삼은 삼악이 폭증하면서 강대한 물줄기처럼 전신경맥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윽하고 매료되는 향기 속에서 후공은 경지가 공고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검은 옥병 속 삼십여 마리 가량의 풍열이 살그머니 올려두었던 경지가, 지금의 흡수를 통해 사성 중기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해 간다.
아니다. 이는 그 이상이다.
단지 지금은 넘쳐나는 탓에 전부 소화해내지 못하는 것뿐이다.
그런 탓에 기운이 절로 외부로까지 드러나면서 후공의 드러난 피부는 광채가 나듯 환해졌고, 머릿결도 천천히 휘날려가니 그 광경은 신비롭기까지 했다.
그러는 중에 풍열충의 수는 급속도로 줄어들다가 이내 한 마리도 남김없이 먼지처럼 허공에 흩날렸다.
긴 시간도 아니었다.
고작 열 번의 호흡 정도.
그걸 끝으로,
화르르르!
후공이 오른손에 푸른 불꽃을 일으켰다.
삼매진화!
그 결과, 손에 남은 풍열충의 잔재며 부스러기들이 깔끔하게 날아가버렸다.
손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가운데,
후공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요희, 이쯤이면 내가 기고만장해도 괜찮겠지?”
대답은 없었다.
그저 깊은 정적이 임했다.
모두가 넋이 나가버린 상황.
하지만 그도 잠시, 연회석 쪽에서 떠나갈 듯 환호성이 터졌다.
“우와아아아아!”
“우리 두목, 끝내주잖아!”
“최고잖아, 천공단주!”
“대공자!”
격정에 소리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아직까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이도 있었다.
반면 요희는 비틀하며 몸을 휘청였다.
그녀의 안색은 이미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이, 이게…… 무슨…….”
곁에 있던 귀령주가 황급히 부축했다. 하지만 붙든 귀령주의 손도 떨리고 있었다. 귀일령이며 십이귀살들도 두려움에 주춤 뒷걸음질쳤다.
두렵지 않을 수 없다.
상대는 절세의 병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풍열의 대군을 일거에 소멸한 자. 그뿐인가. 홀로 찾아와 초대장을 날린 자이기도 하다.
이 자리에서 확연하게 깨달았다.
왜 천화서고 대공자가 그토록 자신만만하게 허름한 객잔에서 금빛 용을 쏘아올렸는지, 또 혼자 왔던 건지.
그는 혼자여도 되는 자였다.
백리가주는 혼이 나갔고,
도충상인도 하얗게 질려버렸다. 곤충을 다룸에 있어 그 누구보다 큰 자부심을 가졌던 그였기에, 풍열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면서 이미 질겁해버렸다.
‘설마…… 놈이 도……독양충을 흡수했단 말인가. 그걸 어찌…….’
하지만 다른 누구보다 충격에 휩싸인 건 따로 있었다.
사마가주!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그는 아예 정신이 나가버릴 지경이었다. 영혼을 팔아 겨우 지옥을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더 깊은 지옥에 서 있었다.
당혹과 환호의 중간에서 후공은 다음 과정을 밟았다.
천향.
검결지를 맺은 손으로 허공에 가볍게 점을 찍었다.
그 순간 천향삼주에 의해 삼악의 혼향이 파문이 번지듯 남궁세가 전역으로 퍼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