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영웅의 행동요령.
송화로서는 좋을 수밖에 없었다.
주인의 변모는 이제 격세지감 정도가 아니라 아예 경천동지인 것이다.
함께하면서 하도 놀라서 이젠 놀라는 게 버릇이 될 정도였지만, 지난 밤 모두가 주인을 향해 머리를 숙이는 모습을 볼 때는 가슴이 터져나가는 줄 알았다.
그래서 이쯤 되고 보니 주인을 보고 있기만 해도 배가 부르고 그냥 웃음이 났다가 또 괜히 눈물이 났다가 하는 지경에 이를 정도였다.
“누가 왔다고?”
“아, 맞다. 남궁연 공자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래?”
밖으로 나가니 남궁연이 반색하며 예를 취하고는 용건을 밝혔다.
후공이 갸웃했다.
“이곳으로요?”
남궁가주를 비롯 천룡의 지도부와 몽연몽 등이 함께 논의하자며 청했다는 것이다. 그것만이라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문제는 오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직접 이곳에 온다고 했다.
“네, 어찌 부를 수 있겠냐시며, 아버지를 비롯한 지도부 모든 분들께서 직접 이곳으로 오셔서 이야기를 나누길 원하셨습니다. 지금 시간이 괜찮으시면 제가 바로 돌아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크흠…….”
시간이야 괜찮다만, 과하다.
이야기할 내용도 솔직히 뻔하다.
금번 사건의 마무리에 관한 것과 향후 사황천에 대한 대응일 터.
굳이 그들이 온다고 한 것은 강호의 배분과 명성 따윈 고려하지 않겠다는 의지요, 극진한 예우.
“대공자, 그럼 안에 들어가 계십시오.”
“그럴 것 없습니다. 같이 갑시다.”
후공은 마음만으로 충분했다.
예우는 이미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네? 그러지 않으셔도…….”
남궁연이 바로 난색을 표하며 손을 내저었지만, 후공은 그러거나 말거나 걸음을 내딛었다. 여러 사람이 움직이는 것보단 한 사람이 가는 게 낫다.
그 모습에 남궁연이 머리를 긁적이다 얼른 뒤따랐다. 곁에 이르러 나란히 걸었고, 한 번씩 슬쩍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후공이다.
“남궁 형, 할 말이 있으면 편하게 하세요.”
“저…… 그게…… 다름이 아니라 청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들어줄 수 있는 일입니까? 달이나 별을 따달라고 하는 거면 곤란한데요.”
“하하, 그럴 리가요. 대공자께는 아무것도 아닐 겁니다. 또 대공자만 들어줄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요?”
갑자기 무슨 부탁인 걸까.
후공은 호기심이 돋고, 흥미로워져 걸음을 멈췄다.
“궁금해지는군요. 말씀해보세요.”
꿀꺽. 남궁연이 마른침을 삼켰다.
누가 보면 뭔데 그리 긴장하느냐고 놀릴 만한 모습이었지만 남궁연은 심각했다. 이 결정이야말로 자신의 인생에서 중대한 지점이 될 것이란 사실을 그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천공단에 들고 싶습니다.”
“……응?”
“대공자 곁에서 많은 걸 배우고 싶습니다.”
“……으응??”
***
후공은 귀가 따가워질 지경이었다.
‘이 녀석들……. 적당히가 없구나.’
가주들과 둘러앉은 자리.
지난 밤 침묵의 예를 취한 걸로 충분했거늘, 남궁가주와 모용가주를 비롯한 모두가 끝도 없이 감사의 말을 전해오는 것이다.
후공으로선 일일이 겸양을 해야 하는 탓에, 급기야 슬슬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선을 그어주고 싶은데,
나이가 어린 게 이럴 땐 또 단점이다.
시간은 가고 어느덧 감사의 말은 매듭지어졌다.
하지만 이내 새로운 것이 시작되었다.
“대공자, 하북팽가는 이 자리에서 언약하겠네. 천화서고가 부른다면 언제라도, 또 그곳이 어떤 곳이라도 지체하지 않고 달려가겠네.”
“본 세가도 마찬가지일세. 힘이 필요하면 힘을, 재물이 필요하면 재물을, 무슨 일이든 전력을 다함세.”
감사가 끝나고는 다짐의 시간이 이어졌다.
이것도 적당히 했으면 싶긴 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후공은 그 마음만은 일일이 받아들였다.
이건 또 다른 힘이다.
이 자리에 모인 칠대세가의 힘은 결코 가볍지 않다. 강호 곳곳마다 큰 영향을 끼치는 가문들이며, 구대문파와 더불어 정파의 한 축이다.
걸어온 길에서,
안휘 북부의 명문가들을 얻었고, 이어 약왕문을 얻었으며, 지금은 칠대세가의 힘을 얻는 순간이었다.
자신이, 그리고 천화서고가 그들의 방패가 되기도 했지만, 향후 이들이 어느 땐가는 천화서고와 자신의 방패가 되어줄 것이다.
굳이 의지할 생각은 없지만, 사람 일이란 모르는 법이다. 금번 사태만 해도 약왕문이 나서주면서 일이 쉽게 풀리지 않았던가.
사람이 곧 힘이고, 또 보물이다.
“하하, 좋군요. 천화서고가 든든한 후원자들을 얻었으니 정녕 기쁘고 뜻깊은 날이 아닐 수 없습니다.”
후공이 호탕하게 웃으니, 모두가 껄껄거리며 마주 웃었다.
이후, 비로소 논의가 시작되었다.
오가는 이야기 속에 후공은 말을 아꼈다.
굳이 관여할 만큼 사후처리가 복잡하지 않을뿐더러 딱히 지적할 부분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칠대세가의 가주와 제갈세가의 장로들, 거기에 몽연몽과 취운개까지 그 누구 하나 허술한 인물들이 아님을 잘 아는 탓이었다.
꺼림칙한 인물들이라면 이미 구별되었다.
백리세가와 사마세가.
“노부는 이번 일이 후공이 떠난 후 반년도 채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란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봅니다. 혈음곡 사태가 사황천의 끝이 아니라 시작은 아닐까 우려스럽소이다.”
모용가주의 말이었다.
모두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향후 무림맹, 구대문파와 연계하여 사황천의 잔재를 찾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말이 이어졌다.
그다음 논의는 백리세가와 사마세가에 대한 것이었다. 백리세가는 혈음곡의 파편이라는 관점으로 대응하고, 사마세가는 가주의 단독 행동에 더 무게를 두어 연좌의 죄를 묻지 않고 아량의 여지를 두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리고 마지막 지점에서,
“대공자,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모두의 시선이 후공을 향했다.
마치 최종 결정권자에게 승인을 구하는 모양새였다. 그들의 표정에 의아함이나 마지못함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시작점이 천화서고 대공자인 것이다.
후공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저도 말씀에 동의합니다. 최선의 결정이라 생각합니다.”
혈음곡의 파편이라는 관점이라면 백리세가는 대대적인 숙청에 들어갈 것이고, 사마세가는 무림맹과 칠대세가의 관리 속에 새로운 가주가 세워진 가운데 쇄신의 길을 걷게 될 터.
고통은 크겠지만, 이 정도면 선처다.
논의의 마무리는 남궁학이 맺었다.
“전대 가주이신 아버지께서 제게 하셨던 말씀이 떠오릅니다. 네가 누리는 강호는 평온하다. 이유인즉 후공이 평정한 강호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지요. 하지만 이제 우리 모두는 새로운 지점에 와 있는 듯합니다.”
모두 공감했다.
무림에 있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 들어본 말이기 때문이다. 강호의 고수들은 강호가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고 말한다.
- 후공이 평정해가던 시기의 강호
- 후공이 평정해놓은 강호.
거기에 이제 새로운 강호가 열렸다.
이번 일로 체감된,
- 후공이 떠난 강호.
“후공이 없는 강호라……. 과연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군가의 목소리가 한숨처럼 흘러나왔다.
모두들 진중해졌지만, 정작 함께 자리한 후공은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돌아온 후에는 약왕문에 보낼 서신을 작성했다.
고마움을 듬뿍 쏟아붓고 붓을 내려놓을 때쯤, 송화가 손님이 찾아왔음을 알렸다.
“남궁 소저가 오셨다고?”
“네, 공자님.”
후공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소저께 이리 전하거라. 괜찮다면 지난번에 못한 세가의 안내를 부탁해도 되겠냐고.”
“넵!”
“크흠……. 대답이 힘차네?”
“헤헤, 그랬나요.”
잠시 후 후공은 소예와 함께 세가를 거닐었다.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나란히 걷게 될 줄 몰랐던 소예로서는 지난 밤 대공자의 품에 안겼던 것도 생각나면서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뺨이 붉어질 뿐이었다.
하지만 소예는 한 가지 꼭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용기를 내야 했고, 내보기로 했다.
계속 떠오르는 의문이어서, 묻지 못하고 떠나보낸다면 후회할 것이 분명했다.
“한 가지 여쭈어도 될까요?”
“한 가지는 무리고, 두 가지면 대답해 드리죠.”
후공은 긴장을 덜어주고 싶었다.
다행히 그 뜻이 통해서, 소예가 미소를 머금더니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들었어요. 본 세가에 오지 않으려 하셨다고요.”
“하지만, 끌려왔죠.”
“끌려왔다기엔 당당하시던걸요?”
“대장부라서 그렇습니다.”
“네?”
“이왕 끌려가는 거 당당하자.”
“하하, 그런 게 어딨어요.”
소예의 안색이 확연히 밝아졌다.
대화가 불편할 것이라고 생각했건만, 몇 마디를 나눴을 뿐인데 불편함은 어느샌가 사라져 있었다.
“소저, 묻고 싶은 건 뭔가요?”
“왜 이렇게까지 하신 건지 궁금했어요.”
많은 것이 생략된 말이었다. 하지만 후공은 질문을 이해했다.
천룡대전에 참석조차 원치 않았던 그대가,
이번 사태에 왜 이리도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냐고 묻고 있다. 위험을 감수하고 목숨을 걸면서까지 왜 그랬느냐고. 그럴 필요가 있었냐고 묻고 있었다.
“크흠…….”
왜 그랬을까?
후공은 잠시 망설였다.
망설일 수밖에 없다.
애초에 생각해본 적이 없는 문제였다.
이유 같은 건 없었으니까.
당연한 일이고, 그 당연한 일을 그저 했을 뿐이었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나.
고민 끝에,
“책에 쓰여 있었습니다.”
“책요?”
“네, 그 책 제목도 재밌습니다.”
“뭔데요?”
“영웅의 행동요령.”
“하하하, 뭐에요. 그런 게 어딨어요.”
소예가 한참이나 웃는 걸 후공은 짐짓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바라봤다.
멈췄던 걸음이 이어졌다.
소예는 막연하게나마 알 것 같았다.
‘묘한 사람이야.’
괴상한 대답이 나온 건, 자신의 질문이 괴상했기 때문이었다. 이유 같은 것이 따로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 밤 허공섭물로 끌어당길 때보다, 풍열들을 소멸할 때보다, 향을 흩날릴 때보다 지금 모습이 멋져 보였다.
어느덧 절반을 돌았을 때,
후공은 예전 생각이 나 물었다.
“힘들지 않습니까?”
“전혀요.”
“그래요?”
“그럼요.”
그때와는 다른 대답에 후공은 어린 소예를 떠올리며 웃었다. 소예는 기억하지 못한 것 같지만 괜찮다.
다시 동쪽 후원 가까이 돌아왔을 때 소예가 문득 생각난 듯 물어왔다.
“아, 맞다. 물어보고 싶은 게 또 생각났어요.”
“영웅의 행동요령.”
“하하, 그건 아니랍니다.”
“크흠.”
소예가 떠올리는지 눈동자를 위로 올렸다.
“처음 오셨을 때, 그때 함께 돌아보았다는 어린 소녀는 누구였나요?”
후공은 이번엔 망설이지 않았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소녀였습니다.”
“그래요? 대체 누구지?”
“그런데 그 아이는 아마 저를 잊었을 겁니다.”
“벌써요? 서운하지 않으세요?”
“괜찮습니다. 제가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동쪽 후원에 도착해 후공과 소예는 서로를 마주봤다.
소예가 머뭇대더니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원래 이 말을 하려고 왔던 터였다.
소예는 오기 전까지만 해도, 고맙다는 말을 꺼낸 순간 자신이 분명 눈물을 흘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웃으며 말하게 될 줄이야.
“진심이에요. 너무 고마워요.”
“영웅은…….”
“됐어요.”
“크흠.”
후공은 시무룩해하는 표정 안에서 제대로 답했다.
‘나 또한, 고맙구나.’
무사해서,
이렇게 다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저는 잊지 않을게요. 언제까지든.”
“크흠, 좋군요.”
‘잊어도 된다. 난 네가 잊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