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하오문 그리고 색황조.
하오문주는 진심이었다.
무서워지고 있었다.
방금 전 대공자의 손속을 아예 보지 못한 것이다. 지풍이었을까, 손이 직접 몸에 닿은 것일까. 떠올려봐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였다.
방심했나? 아니다. 그랬다면 그나마 위로가 되었을 텐데, 정작 신경이 날카로워진 상태로 대응을 준비하고 있었던 터라 생각할수록 당황스럽고 의기소침해진다.
그렇기에,
방금 죽음이 지났기에,
‘꿀꺽.’
하오문주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아직 두 개나 남은 것이다. 뭘까? 모르겠다. 하지만 느낌은 온다. 분명 죽음보다 더한 것이리라. 엄청난 놈이 올 것이란 예감이 든다. 그런데 진짜 모르겠다. 죽음보다 더한 게 있을 수 있나?
대공자가 미소 짓는다.
남의 속은 타들어가는데 왜 웃고 있냐.
“문주, 긴장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그저 선물을 하나씩 드리고 있을 뿐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 선물이 무섭다고.
다정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니까 더 그래!
하오문주는 내심 소리쳤지만, 정작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달랐다.
“내……내가 어, 언제 긴장했다고 그래. 험험, 험!”
더듬거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실패.
민망해진 나머지 한참이나 헛기침을 해야 했다.
그런 가운데 하오문주는 대공자의 손을 주시했다. 아까도 저 손이 문제였으니까.
찻잔을 톡톡 두드리던 손이 움직인다.
턱으로 옮겨간다. 천천히 어루만지는가 싶더니 이내 탁자 위로 손을 내밀었다. 손은 왜인지 말아쥔 상태가 되었다. 뭔가를 쥐고 있는 것처럼.
‘뭐지? 그 사이 손에 뭘 쥐었다고?’
이어 대공자의 손이 펼쳐졌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어야 마땅한 손바닥 위에 하나의 물체가 놓여 있었다.
‘……???’
하오문주의 입이 쩍 벌어졌다.
방금까지 빈손이었는데, 손바닥 위에 주사위가 놓여 있었다.
작은 주사위다.
메추리알 정도의 크기였고, 십이면체였으며,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주사위의 각 면에는 열두 개의 도성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다.
열두 개의 이름이 다 안 보여도, 하오문주는 열두 개의 이름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하오문주는 대답하지 못했다. 귀신같은 손놀림 때문만은 아니었다. 죽음보다 더한 것이 나올까 싶었는데, 나와버렸다.
주령구(周令具).
이 작은 금속 주사위는 하오문의 신물이자, 하오문 문주인 자신의 영부(令符).
“자, 자네가 이걸 어떻게…….”
물은 건 왜 주령구가 너의 손에 들어가 있느냐가 아니었다. 자신은 조금 전에 기절했으니, 그 사이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그보다 더 근원적이다.
주령구의 존재와 의미를 어떻게 아는지였다.
하오문의 영부를 아는 이는 극히 드물다. 소림방장의 녹옥불장이나 개방 방주의 타구봉처럼, 강호인이라면 건너건너 회자되며 이야깃거리가 되는 물건이 아니다.
대체 이자는 누군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인가.
그런 의문의 끝에,
“자네 설마…… 주령구를 운용할 줄도 아나?”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질문이란 걸 알면서도 하오문주는 묻고 말았다. 후공이 빙긋 웃었다.
‘종소리.’
딱히 알고 싶었던 건 아니었지만 후공은 설표가 떠들어대는 소리에 그만 알게 되었고, 이후에는 운용된 주령구에서 흘러나온 청아한 종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그때 당문에서 설표가 말했던 것이다.
[후공, 이 자체로는 신물이 아닙니다. 영부로서의 의미를 지니려면 이 주령구로 종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에헴, 그게 보통 난해한 게 아니지요. 제가 오늘 기념으로다가 종소리를 한번 들려드리겠…… 아니, 후공! 이야기를 듣다 말고 어디 가십니까아아아! 한 번만 들어보십시오오오!]
“운용이라. 하오문의 보물에 숨겨진 뜻이 있나 보군요. 어느 특정 부분을 누르면 칼날로 변하거나 혹은 각각 분리되면서 표창이 되거나 하는 겁니까?”
‘휴우…….’
그럼 그렇지.
설표는 아니다 싶으니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흐……. 뭐 비슷하네. 자세한 건 말할 수 없고. 어쨌든…… 내가 가져가도 되겠지? 원래 내 것이니까.”
“물론입니다.”
주령구를 챙겨 넣는 하오문주의 손이 떨렸다. 두려워서는 아니었다. 그건 지나갔다. 자포자기라서. 대신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진이 빠진다. 심력소모가 말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장담컨대 이렇게까지 털린 건 하오문주가 된 이래 처음이었다.
그리고 비로소 깨닫기도 했다.
천화서고 대공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이해했다.
- 금자 6만 냥.
- 만호객잔.
- 하오문주의 목숨.
- 하오문의 신물이며 영부.
내 것을 노린다면, 나는 하오문의 모든 것을 가져가겠다. 이렇게 말하고 있음이다. 적당히 하라고.
‘하아아……. 서문세가가 괜히 무너진 것이 아니었네. 아주 제대로 당했겠구만.’
쯧쯧……. 불쌍하네.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게다가 이런 식이면 어디 서문세가뿐일까.
그렇게 생각해보니 지금 자신의 상황은 ‘선처’에 가까웠다.
그럼 당장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뿐이다.
머리를 숙였다.
“미안하네. 이번 일은 내가 크게 잘못했네. 늦었지만 용서해주게.”
하오문주 설표가 나름 최선의 선택을 한 것에 후공은 내심 만족했지만 짐짓 뚱하니 말해주었다.
“아직 하나가 더 남았습니다만.”
“아……. 맞다.”
하오문주가 머리를 긁적였다.
“저기…… 그런데 말이네. 그, 그거 안 들으면 안 되겠나. 안 들어도 된다면 안 듣고 싶네만. 심장에 무리가 와. 진짜야. 나 지금 엄청 후달린단 말이네.”
하오문주가 사정하듯 애처롭게 바라봤다.
하지만 후공은 그냥 여기에서 끝낼 생각이 없었다.
“걱정 마십시오. 마지막 선물은 별것 없습니다.”
“진짜?”
“네.”
“진짜여야 하네. 나 진심 이대로 돌아가고 싶거든. 천화서고 쪽은 앞으로 쳐다도 안 볼 생각이고. 약속할 수 있네. 주령구로 도장도 찍어주겠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색황조에 미쳐서 보지 못한 것이 너무 많았다.
생각, 생각을 했어야 했다.
남궁세가의 직계가 왜 천화서고 대공자를 모시듯 따라다니는지 생각했어야 했고, 거기에 개방 방주의 두 제자가 동행하고 있는 것도 생각했어야 했다.
상대는 십대세가 중 하나인 서문세가를 박살내버린 자이며, 남궁세가와 개방으로부터 인정받고 있는 자. 그건 곧 결코 적으로 만나서는 안 되는 인물이라는 뜻이다.
그래, 이제 앞으로는 쳐다도 보지 않으리라!
그렇게 하오문주 설표가 내심 다짐할 때, 후공이 마지막 선물을 꺼냈다.
“마지막은 별것 아닙니다. 그저 문주께 기회를 드릴까 합니다.”
“기회?”
“네, 천화서고의 친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어……?”
하오문주가 놀라 눈만 깜박였다.
친구? 적이 아니고?
“별것 아니라서 실망하셨습니까?”
“어어……. 뭐야, 아니네, 아니야! 절대로 아니야!”
손을 맹렬히 내젓던 하오문주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자넨 왜 거짓말을 하고 그러나. 별것 없긴 뭐가. 가장 마음에 드는 선물이구만!”
“그렇습니까?”
“물론이네.”
“그럼, 그리 알고 있겠습니다. 밤이 늦었으니 들어가시고 내일 다시 뵙도록 하죠.”
그 말에는 하오문주가 웃음을 뚝 그쳤다.
“내일 우리 또 만나?”
갑자기 불안해졌다.
“내일 아침에 떠나면 저녁쯤엔 장봉에 도착할 겁니다. 그때 만호객잔에 묵을 생각입니다. 하오문도들도 이미 계획에 따라 장봉으로 떠났을 테지요?”
“어……. 그렇긴 하네.”
이미 전서구가 사방으로 날아올랐고, 팔각주도 인원 동원을 위해 이 밤을 도와 떠난 터였다. 그래서 내일 장봉에서 할 일이라곤 ‘야, 해산해!’ 이 말이 전부였다.
“불구경은 물 건너갔으니, 대신 친구가 된 기념으로 다른 구경거리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응? 다른 구경거리?”
그러다 한순간 하오문주가 눈을 빛냈다.
“오오! 잠깐만, 그거로군. 내가 말할게. 내가 맞출게. 그거지? 그거잖아? 색황조!”
***
두두두두.
달리는 마차 안에서 후공은 손바닥 위에 놓인 세 개의 주사위를 내려다보았다.
도박장에서 열 번의 36을 낸 그 주사위였다.
아침에 설표와 함께 왔던 독안미녀가 기념품이라며 건네주고는 돌아갔다.
몇 마디 말도 나누었다.
“안대를 안 했네?”
“오늘은 쌍안미녀입니다!”
“쌍안이 훨 예쁘구나. 그냥 쌍안이 되는 건 어떠냐?”
“쎄 보여야 해서 무리입니다.”
“어……. 가봐라.”
“넵,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또 뵙겠습니다.”
씩씩하고 웃긴 녀석이었다.
묘빙빙이 커서 저렇게 되면 안 되는데 싶은 생각이 떠오르는 건 왜인지.
그렇게 후공이 웃음을 머금고 있을 때, 마차 안 맞은편에서는 소천개와 하오문주의 대화가 한창이었다.
“할아버지, 근데 왜 하오문은 생각을 안 해요?”
“야, 그래도 개방보단 나아.”
“와아, 이 할아버지 개방 무시하는 것 좀 봐. 하오문이 개방보다 나은 게 하나라도 있어요?”
“너흰 돈이 없잖아. 거지새끼들이잖아.”
“………….”
“우냐?”
“응, 너무 슬퍼.”
“하하하, 거지들 입 다물게 하는 건 내가 일등이지. 욘석아, 돈이 최고여. 새겨들어.”
“근데 할아버진 그 돈 다 어디에다 다 써요? 기루며 반점이며, 객잔에, 도박장까지 생각해보니 엄청나네.”
“멍청아, 돈 쓸 데 없을까 봐? 내가 인마, 매일 술 처먹고 빈둥거리고, 좋은 옷 입고, 응 막 엄청 나게 써재껴.”
“옷이 전혀 비싸 보이지 않은데요?”
“야, 이거 비싸.”
“아, 그럼 사람이 후져서 그런 건가 보네.”
“………….”
“울어요?”
“응……. 너무 슬퍼.”
후공은 피식 웃고 말았다.
이놈들은 나눌 대화를 미리 연습이라도 하고 오는 건가. 아니면 개방과 하오문은 원래 한 문파였던 걸까.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두 놈이 나이차를 무시하고 죽이 척척 맞는다.
마차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날이 맑다. 풍경이 좋았다.
먼 풍경이 느린 구름과 함께 천천히 움직여간다.
그 무엇도 머리에 떠올리지 않고 후공은 그저 눈으로 보게 했다.
그러다 문득 한 시선이 느껴졌다.
강렬한 시선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
‘으음?’
소천개 발 앞의 새장.
색황조가 기운 없이 축 늘어져 눈을 감고 있었다.
분명 시선이 느껴진 방향은 색황조 쪽. 제법 강렬한 시선이었거늘 지금 모습은 무슨 소리냐고, 그런 적 없었다는 듯 힘없이 바들거리며 눈을 감고 있었다.
‘뭐지?’ 이놈, 여태 연기를 하고 있었던 건가?’
천공단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색황조였다. 특히 소천개가 애지중지였는데, 최근 축 처져 식음마저 전폐하는지라 한번 날아다닐 기회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가운데 하오문도 초대했고, 이미 발에 묶어두고 날릴 수 있게 긴 밧줄도 준비해놓았다.
그런데 방금 상황만 놓고 보면 그게 아니다.
사기를 쳐버린다고?
영물이라 불릴 만큼 특별한 새이니, 머리 또한 영특할 것이다. 이건 사기 아니면 시위였다.
꾸우우…… 꾸우우…….
색황조가 그런 거 아니라는 듯 옅게 신음하듯 운다.
후공은 시선을 거뒀다.
다시 창밖 풍경을 바라봤다.
그때였다.
색황조가 눈을 슬그머니 떴다.
투명하리만치 파란 눈이 빛을 더해가면서 새침한 눈망울로 후공 쪽을 맹렬하게 노려봤다.
그 순간,
후공이 휙 색황조를 바라봤다.
너무 빨랐다.
상대가 나빴다.
미처 색황조는 눈을 감을 새가 없었다.
그렇게 눈과 눈이 마주치자, 당황한 색황조의 눈동자가 정신없이 흔들렸다. 그냥 지진이었다. 후공이 시선을 거두지 않자, 색황조의 목 부위가 울렁거렸다. 마른침을 삼킨 것이다. 그러다, 꾸우우우…… 슬금슬금 눈치를 보더니 천천히 힘없다는 듯 눈을 감아갔다.
후공은 당연하게도 뚱해지고 말았다.
‘이건 뭐하는 놈이야? 새는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