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색황조, 날아오르다.
“늦네.”
“안 오는 거 아냐?”
“에이, 설마. 기다려 보자구.”
늦은 밤, 장봉.
작전 명 ‘불길 속의 영웅들’을 위해 모여든 육백여 명에 달하는 하오문도들 사이에서는 이런 대화가 오갔다. 마차가 도착한 건 그쯤이었다.
“왔다아아!”
“드디어 왔구나, 불길 속의 영웅들!”
“타올라라, 불길이여! 정신없어라, 영웅들아!”
“으헤헤헤!”
하오문도들은 한눈에 알아봤다.
틀림없었다.
마차 지붕 위에 드러누워 있는 젊은 거지만 봐도 확신할 수 있었다. 거지들이 각양각색이라지만 마차를 타고 다니는 거지는 없으니까.
마차가 시야에 들어오면서 모든 하오문도들의 시선이 마차를 좇았다. 그들은 거리의 술 취한 취객의 모습으로, 그저 지나가듯 걷는 이들로, 만삭의 임산부의 모습을 한 이의 경우는 배에 집어넣은 바구니를 한 번씩 추스르면서 힐끔거렸다.
지켜보는 눈은 각 주루며 객잔, 객방에도 많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입꼬리를 올리며 문 너머로, 창 너머로 마차가 이동하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두었다.
“어디에서 멈추려나.”
“만호객잔 앞에서 딱 멈추면 대박인데.”
대박났다.
마침 그곳이 목적지였다는 듯 마차가 만호객잔 앞에서 멈췄기에, 하오문도들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이쁜 것들, 수고로움을 덜어주는구나.
하지만 그 미소의 유효기간은 짧았다.
마차에서 세 번째로 내리는 사람을 본 뒤로 만료되었다.
‘……?’
‘……?’
‘……?’
모두가 얼굴이 아주 딱딱해져버렸다.
걷던 이들은 점혈당한 듯 멈춰 섰고, 창 너머로 지켜보는 이들도 원래라면 시선을 고정하고 있으면 안 되는데 눈을 떼지 못했다. 몇몇은 벌써 딸꾹질을 시작했다.
그 모습을 둘러보며 하오문주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표정들 가관이네. 야, 깜짝 놀랐냐! 소개하마. 여긴 색황조의 주인 천화서고 대공자다.”
“…….”
“…….”
“…….”
정지 상태는 풀리지 않았다.
“이 새끼들아, 천화서고하고 하오문이랑 친구 먹기로 했어! 그러니까 쳐다만 보지 말고 다들 튀어나와서 인사나 박아! 그리고 오늘은 기념으로다가 내가 한턱 쏜다. 너희 먹고 싶은 것 실컷 먹어라. 내가 어제 금전으로 6만 냥이나 벌었어. 참고로 나 지금 울고 있는 거 아냐. 이거 땀이야!”
“……?”
“……?”
“……?”
**
그밤,
하오문주는 팔각주와 둘러앉았다. 문주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각주들의 표정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걸 지금 믿으라고 하는 말씀이십니까?”
“야, 눈 안 까냐. 아주 잡아 죽이겠다?”
팔각주는 눈을 안 깔았다.
더 부리부리하게 떴다.
“아니, 말이 안 되잖습니까. 도박장에서 열 번의 36이야 뭐 대단한가 보다 할 수 있죠. 무공이 뛰어난 것도 강호에 별이 나왔다 치자고요. 그런데 영부를 알고 있다는 건 대체 뭐냐고요?”
하오문주가 손을 가슴에 올렸다.
“그래서 내가 심장이 아파왔다고 했냐 안 했냐, 이 새끼야! 아이고, 또 심장 저려.”
“어떻게 영부를 안 거냐고는 안 물어보셨습니까?”
“어.”
“왜요?”
“그냥. 쫄아서.”
“아니, 그런 게 어딨습니까. 몇 번이고 물어봤어야죠! 오늘 내내 마차에 같이 있으셨으면서 뭘 하신 건데요?”
“야, 그게 그렇게 간단치 않아.”
하오문주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너희는 같이 안 있어봐서 그래. 사람이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야. 눈빛도 아주 심연이여. 거기다 지그시 바라보면서 미소 짓고 있으면 무슨 어른이 바라보는 것 같단 말이다.”
“문주님 나이가 몇인데 젊은 사람에게 어른 타령이십니까.”
“야, 그냥 그런 줄 알아. 어쨌든 이건 무조건 우리에게 이득인 거니까.”
“그럼 남궁세가의 대공자는 왜 따라다닌다고 하던가요?”
“몰라.”
“모른다니요?”
“안 물어봤어.”
“왜요?”
“그놈은 말이 없어.”
“…….”
팔각주가 한심하게 바라봤다.
“아는 게 대체 뭡니까요. 세상에 이런 동맹이 어딨습니까.”
“여기.”
하오문주가 손을 들어 보이며 낄낄거렸다.
팔각주는 물러서지 않았다.
팔각주의 존재 이유라는 게 있다. 문주가 미처 보지 못한 부분은 보완하고, 또 직언하라고 만들어진 직책이다.
상대는 하오문의 영부까지 인지하고 있거늘, 자신들이 아는 것이라곤 천화서고의 대공자라는 것뿐인 상황이다.
“뭐하는 놈인지 확인 한번 해보죠.”
“야, 가서 물어보는 거 하지 마. 뒈지는 수가 있어.”
“천화서고 말고 대나무 잎사귀 세 개짜리한테 물어보죠.”
하오문주가 빙긋 웃었다.
“어, 그러든지.”
팔각주 중 하나가 찾아 나섰을 때, 남궁연은 객잔의 지붕 위에 있었다.
파라락.
옷자락 나부끼는 소리에 이어 곁에 누군가 나타났기에, 남궁연이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바라봤다.
각주가 정중히 예를 갖췄다.
“남궁 공자, 어찌 이곳에 계십니까?”
“용건이?”
“괜찮다면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남궁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목이 하오문을 친구로 받아들였으니 자신도 그에 상응해줄 필요가 있었다. 이내 남궁연은 하오문 지도부와 둘러앉았다. 질문이 쏟아졌다.
“어제 도박장 말입니다. 본문의 도박장은 어떻게 알고 찾아가신 건지요?”
“듣지 못했습니다.”
“네?”
“그냥 들어가시기에, 저는 하오문 도박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 생각의 흐름이 그렇게 이어집니까?”
“그냥 믿으면 편합니다.”
“…….”
잠시의 침묵.
이어 질문이 이어졌다.
“공자께선 진정 천화서고 대공자의 수하가 맞습니까? 아니면 다른 숨겨진 뜻이 있습니까? 아무래도 가문의 위상 차이가…….”
“보이는 바가 전부입니다.”
팔각주가 갸웃했다.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인지요?”
“보고 배우려 합니다.”
“그럼 아버님, 그러니까 남궁가주께선 이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응원하고 계십니다.”
팔각주의 말문이 콱 막혔다.
남궁가주가 응원씩이나 해버린다니. 원래 기대했던 대답이라면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였기에, 이게 뭔가 싶어졌다. 게다가 대답마다 거침이 없으니 황당함이 더해지는 상황.
“천화서고 대공자의 무공이 그리 대단합니까? 남궁 공자 본인과 비교하면 어느 정도입니까?”
“아득합니다.”
“…….”
“…….”
“…….”
다시 팔각주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전대 천룡대전의 우승자이자 남궁세가 후계자의 입에서 ‘아득하다’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하오문주만 한쪽에서 낄낄대며 웃고 있었다.
팔각주가 일제히 쏘아보았기에 하오문주가 입모양으로 ‘뭐, 시발놈들아’를 만들었다.
질문이 이어졌다.
“하면 금번 천룡대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나 보군요. 궁금합니다. 들려주십시오.”
천룡대전 이후 열흘도 채 지나지 않았다.
하오문이 소문에 밝다 해도 이번 사건에 관하여는 아는 바가 없었다. 최근 일인 데다 최초의 공방은 은밀하게 오갔고, 사건의 발발도 번개처럼 한순간 번쩍였다가 소멸된 탓이다.
남궁연은 대답 대신 하오문주를 바라봤다.
“문주께선 두목께 따로 들은 게 없으십니까?”
“없네. 돌려서 물었는데 그냥 웃기만 하더라고.”
남궁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럼 저도 따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두목이 꺼내지 않은 이야기를 제가 할 수 있을 리가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실 겁니다.”
“아니 무슨, 그래도 대충이라도…….”
팔각주의 표정이 울 것 같았기에 남궁연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대충이라면…… 흐음…… 이 정도는 말씀드릴 수 있겠군요. 만약 두목에게 문제가 생기면 누구든 남궁세가와 모용세가를 비롯 여러 가문의 적이 되는 것이다, 정도로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남궁연이 나간 후,
팔각주는 멍하니 눈만 깜박여댔다.
검증 완료다.
이미 천화서고 대공자에겐 친구가 많다.
그것도 다 강호에서 쟁쟁한 이들. 그들의 신뢰를 받고 있는 것이다. 도리어 이쯤 되니 껴준 것을 고마워해야 하나 싶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개이득.
그런 팔각주를 보며 하오문주가 인상을 찡그렸다.
“시발 것들, 어떻게 된 게 하늘같은 문주가 말할 땐 구시렁대다가 남궁가주가 신뢰한다니까 ‘오오!’ 이 지랄하면서 감탄하고 자빠졌네. 니들이 정녕 사람 새끼들이냐.”
**
색황조는 후공에게 들킨 이후 더 이상 몰래 노려보지 않았다. 아예 영영 눈을 안 뜰 것처럼 눈을 꼬옥 감고는 바들바들 시름거릴 뿐이었다.
하지만 후공에게 그 모습은 이제 완벽한 연기로만 보였다.
색황조는 사기꾼이 확실했다.
분명 이 영특한 날짐승은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기에 대비해둘 필요가 있었다.
“형아, 묵언이 잘 날 수 있겠지?”
오전 나절, 장봉의 외곽 들판으로 걸어가는 길.
후공과 소천개를 비롯한 천공단만이 아니라, 하오문의 육백여 명에 달하는 문도들도 영물의 멋진 활공을 기대하며 함께 걷고 있었다.
“너무 잘 날 것 같아 걱정이구나. 잠깐 새장 좀 다오.”
“하하, 역시 그렇겠지? 여기.”
후공은 새장을 받아들고는 천향삼주의 무향을 일으킨 다음, 손가락을 튕겨냈다. 색황조의 목덜미에 무향이 닿았다. 그 순간 색황조가 흠칫 몸을 떨었다.
후공은 다시 소천개에게 새장을 건넸다.
소천개는 냉큼 받아들고는 색황조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묵언아, 힘을 내야 해. 이렇게 바들거려선 곤란하다구. 오늘 지켜보는 눈이 한둘이 아니기도 하고. 그리고 너도 언제까지나 어린아이가 아니잖아. 날 땐 어떻게 해야 한다고?”
대답은 없었다.
“힘차게! 빠르게! 그리고 끼이익, 끼이익, 끽끽끽! 소리도 크게 내도록 해. 알아듣겠어?”
색황조가 꾸우우, 하며 다 죽어가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만으로 소천개가 좋아죽었다.
“형아, 방금 들었어? 그러겠대. 잘한대. 하하하하하, 다 컸네. 우리 묵언이, 다 컸어.”
후공은 그저 뚱하니 바라봤다.
왠지 색황조 나이가 더 많을 것 같은데 누가 누구더러 다 컸다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외곽 들판에 도착해 색황조의 활공이 준비되었다.
터억.
은앙개가 들고 온 밧줄더미를 내려놓았다. 소천개가 새장을 열고 색황조의 왼쪽 다리에 밧줄을 묶었다. 밧줄의 길이는 백여 장에 가까웠기에 마음껏 활공하기에 충분했다.
“대공자, 이거 두근두근하네그려.”
하오문주가 기대된다는 듯 손바닥을 마구 비벼대면서 말을 이었다.
“자네 혹시 저 색황조가 특이종인 건 알고 있나?”
“눈동자가 파란색인 게 좀 신경 쓰이긴 합니다.”
하오문주의 입이 쩍 벌어졌다.
“와아아아, 소름. 개소름. 하하하, 자넨 진짜 모르는 게 없구만. 책을 얼마나 읽은 거여, 도대체. 어떤 삶을 산 거냐고. 하하하하!”
드디어 때가 왔다.
밧줄을 끌고 색황조가 새장 밖으로 나왔다. 즉시 날아오르진 않는다. 통통, 이런 소리가 날 것처럼 살짝 살짝 뛰었다.
그러다 목을 뒤로 크게 젖혔다가, 오른쪽으로 한 바퀴 돌리고, 왼쪽으로 한 바퀴 돌린다. 마치 몸을 푸는 것 같았기에 다들 어이없다는 듯 바라봤다.
이윽고,
촤악!
날개를 펼쳤다. 막상 펼치니 날개가 길고 넓었다.
이내 날아오르는데 수직으로 상승했다. 그러다 멈춘 지점은 밧줄이 팽팽히 당겨지기 직전이었다. 과연 영특하기 짝이 없었고, 이후의 비행 능력은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유유히 날다 한순간 직각으로 방향을 전환하는가 하면, 수직으로 하강하다 속도를 늦추지도 않고 바로 멈추기까지 했다.
“와아, 저렇게 나는 새는 처음 봐.”
“괜히 색황조 색황조 하는 게 아니었네.”
새가 대단해 봐야 얼마나 대단하냐고 이 난리냐며 기대하지 않았던 이들조차 감탄사를 연발했다.
묘빙빙을 비롯 소천개와 은앙개도 난리가 났다.
천공단 신입 멋지다고, 묵언이가 제일이라고 환호성을 내지르며 방방 뛰었다.
그렇게 모두가 감탄하고 있을 때였다.
색황조의 오른 발톱이 왼쪽 다리를 묶고 있던 밧줄에 닿았다 싶은 순간, 서걱! 밧줄이 맥없이 잘려나갔다.
이내 자유의 몸이 된 색황조가 높이 솟구쳐오르며 소리냈다.
[이 멍청이들아, 놀랐지! 나 묵언이 아니야. 난 색관조야. 까르르르르르르르르르.]
이어 구름 안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소리쳤다.
[내가 제일 잘 날아. 까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