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이쯤에서 묻자.
“…….”
낭인왕은 할 말을 잃었다.
겁 먹어서는 아니었다. 어이가 없어졌을 뿐이었다.
웃음이 나려는 걸 참았다. 주변에서 천재라고, 천공단주라고 띄워주니 이놈은 정녕 자신이 뭐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
고작 스무 살 정도에 불과하다. 어린 새끼가,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가 감히 내게 ‘넌 이제 어떻게 될까’ 라니.
애송이가 찻잔을 들어올린다. 그것도 태연히.
‘개새끼, 죽여버린다.’
낭인왕은 즉시 발도(拔刀)했다.
스악!
그의 도법에 예비 동작같은 건 없다. 한순간 이미 칼날은 애송이의 머리 위.
그 찰나의 순간, 후공은 낭인왕을 바라봤다. 그렇게 눈과 눈이 마주쳤고, 낭인왕은 애송이가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웃어……?’
의문이 채 가시기도 전,
터어엉!
칼날은 중도에서 막혔다. 가로막은 건 금적자의 금피리.
그 사이 후공이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고, 이미 항마삼협 중 둘의 장력은 낭인왕을 향해 짓쳐들고 있었다.
낭인왕이 급히 칼을 회수해 항마삼협의 장력을 해소해가던 순간, 남궁연이 탁자를 타넘었다.
스릉.
낭인왕의 목에 남궁연이 장검을 겨누었다.
낭인왕이 서늘한 감촉에 움찔한 순간, 이내 그의 등 쪽으로 화끈한 통증이 찾아왔다.
척, 처억!
“크윽!”
무산쌍웅이 낭인왕의 등에 각기 비수를 꽂아넣고는 이내 혈도까지 점했다.
“클클클, 누구 앞이라고 까부는 거냐.”
“클클, 이 새끼 다리 뻣뻣한 것 봐. 꿇어, 이 새끼야!”
무릎 안쪽을 걷어차자, 낭인왕의 두 무릎이 힘없이 무너져 바닥에 닿았다.
털썩.
낭인왕의 무릎이 꿇렸다.
‘……?’
‘……!’
‘……!’
그 광경에 멸살단 3인은 놀란 눈이 되었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고, 엄청난 대응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건 천화서고 대공자의 태도다.
낭인왕의 칼이 뽑힌 순간부터 마무리된 지금까지 천화서고 대공자는 미동조차 없었던 것이다. 움찔도 없었다. 그러긴커녕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긴 하냐는 듯 그저 내내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대범함도 대범함이지만, 천화서고 대공자가 보인 건 천공단에 대한 신뢰. 결코 칼날이 자신에게까지 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보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또한 그런 대공자의 모습을 천공단이 의아해하지 않는 걸 보면 익히 보아왔다는 뜻이다. 한순간에 불과했지만 단주와 천공단의 결속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꿀꺽.
낭인왕도 그제야 현실을 인식했다. 상대를 잘못 골랐다. 그의 귓가로 천공단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낭인왕, 소감이 어떠냐? 이쯤이면 느껴지는 바가 있을 것 같다만.”
“…….”
낭인왕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느껴지는 바가 없어서는 아니었다. 도리어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천공단주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 아무리 네놈이 모자란 놈이라도 이쯤이면 이해했을 테지. 아, 천공단도 어찌하지 못하는 주제에 내가 소요파를 응징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다니 한심하구만. 뭐 이 정도겠지. 널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원래 사람이 그렇긴 하다. 보물에 눈이 뒤집어지면 아무것도 안 보이는 법이거든.”
“내, 내가…… 주제 넘었다.”
낭인왕은 수긍했다.
냉정하지 못했다. 또 안목이 없었다. 천공단을 허술하게 봤을 뿐 아니라 천공단주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칼날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데 태연히 웃고 있는 자라니.
“그래, 좋다. 너의 태도가 마음에 든다. 그럼 이쯤에서 묻자.”
낭인왕은 감사의 말 대신 살짝 머리를 숙였다.
천공단주는 생각보다 그릇이 큰 사람이었다.
*
그렇게 생각했는데, 묻혔다.
묻자라는 게 없었던 일로 하자는 뜻인 줄 알았는데, 묻어버리자였기에 낭인왕은 땅에 묻혔다.
척, 척, 처어억.
천공단이 부근 야산으로 끌고 갔고, 깊이 구덩이를 판 다음 처박아넣었다. 흙이 덮여 갔다.
이윽고, 땅땅땅!
다 묻고 은앙개와 소천개가 삽으로 바닥을 단단하게 다졌다.
마치고 소천개와 은앙개가 소매로 땀을 닦았다.
“아, 힘들었네.”
“두목, 이 정도면 거의 평지 수준이지 않아? 아무도 모를걸?”
후공은 엄지를 들어보였다.
“후후, 감쪽같은걸.”
그 뒤에서 금적자가 피리를 불었다.
구슬펐다. 장송곡이었다.
그 곁에서 항마삼협과 무산쌍웅이 낄낄거렸다. 남궁연도 따라서 낄낄거렸지만 어쩔 수 없이 어설픔이 묻어났다.
멸살단은 웃지 않았다. 그저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늘 숫자가 줄어가던 멸살단인데 방금 또 줄었다.
이제 셋이 남았다.
내심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냐고, 사람을 산 채로 매장해버리는 게 어딨냐고 소리를 내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다 멸살단이 또 줄어들 수 있는 데다, 그것이 자신이 될 수도 있는 터라 다들 표정을 관리했다.
천공단주가 천공단과 함께 걸어오며 떠들었다.
“죽어 마땅하다마다. 천하의 소요파와 싸우자니, 정신이 나가도 유분수가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까, 신풍채주?”
“하하하, 당연한 이야기일세. 돈 자가 아니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지!”
신풍채주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
그날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녹림서열 8위 신풍채주가 도망쳤다.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그렇게 되어, 멸살단은 이제 둘.
남장여인 추혼검 설영은 슬슬 눈치를 보기 시작했고, 불평진인은 노래를 덜 불렀다.
그런 일련의 과정은 관찰되었다.
소요파의 눈이 지켜보았고, 귀가 들었다.
그들의 귀는 낭인왕의 분노를 들었으며, 천화서고 대공자의 의도를 명확히 확인했으며, 낭인왕이 땅에 묻히는 것도 지켜보았다. 신풍채주가 도망간 것까지도.
흡족했다. 알아서 기는 놈들을 보는 건, 소요파를 두려워하는 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건 기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내일 오전에 소요파로 갈까 합니다. 금적선생과 불평진인께서 저와 동행해주셨으면 합니다. 모두 함께 가는 것은 자칫 소요파에 도전적으로 보일 수 있고, 또 저 혼자 가기에는 두렵습니다. 모양새라는 측면에서 볼 때도 두 분은 천공단과 멸살단을 대표하는 분이라 할 만하니, 저와 두 분만 들어가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천화서고 대공자가 객방의 창가에서 내일 일정을 말하는 소리를 들은 후, 소요파의 눈과 귀들은 사라졌다.
창가에 선 후공은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소요파의 귀신들은 아니다.
이들은 그저 정탐꾼일 뿐이다.
하지만 귀신들도 조만간 볼 수 있을 것이다.
‘기대되는구나. 목령자, 화령자.’
**
다음 날, 오전.
후공은 미리 밝힌 대로 금적자와 불평진인과 함께 소요파를 찾았다.
방문 시간과 의도는 서로가 인지하고 있는 상황.
일사천리로 안내되었다.
접객당에서 기다리며 후공은 감회에 젖었다.
‘거의 이십 년 만인가.’
생각해 보니 심히 오래전 일이다.
몇 차례 왔지만 마지막 방문은 더 기억에 남아 있다.
전대 소요파 장문인 목응자가 유명을 달리했을 때였다.
후공에게 있어 목응자는 강호의 선배였다. 당시 후공이 선배라는 호칭으로 부른 이들은 몇 없었는데, 그중 한 명이었다.
목응자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후공도 무공의 경지와는 별개로 예의를 갖추면서도 편하게 대하곤 했다.
목응자가 떠난 후에는 소요파를 찾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십 년 만이다.
현 장문인은 월령자.
목응자의 제자인데, 후공은 가까이 하지 않았다.
월령자는 그리 맑아 보이지 않았고 별 기대도 없었다. 그래서 월령자가 소요파의 장문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요파가 큰 문제를 일으키는 일이 없고 소문도 크지 않아 관심을 끊었는데, 무극살부의 일로 이처럼 조우하게 되니 기분이 묘해졌다.
“하하하하!”
화통한 웃음소리에 후공은 상념을 접었다.
문이 열리고 세 명의 노인이 들어섰다.
소요파의 장로들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췄다.
이윽고 서로 간에 뻔한 인사말이 오갔다.
천화서고에서 먼 길을 와주어 고맙다고도 하고, 금적자의 명성이며 불평진인의 명성에 대해서도 한참을 이야기하니 또 그 말에 겸양한다고 쓸데없는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윽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후공이 입을 열었다.
“솔직히…… 소요파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많이 놀랐습니다. 강호에 대해 문외한인…… 저조차 산서제일파의 명성은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소요파에서 무극살부 부주를 잡아두었다는 말에…… 흐으음, 제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두 분은 모르실 겁니다.”
후공은 중간 중간 말을 더듬었고, 긴장을 드러냈으며, 눈을 똑바로 마주보지 않았다.
그 모습은 어떻게 봐도 위축된 모습이었기에 소요파 장로들은 만면에 웃음이 가득해졌다. 그러면서도 문제의 소지가 있는 말은 그냥 넘기지 않았다.
“허허…… 기뻤다라. 그건 무슨 의미인가?”
“소요파 아래에서…… 무극살부 부주가 벗어날 수 있을 리 만무하니 그에겐 감옥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저희 입장에선 그의 목숨을 취한 것보다 실로 더 안심이 되는 상황입니다.”
“하하하, 그건 그렇지. 아무렴. 그대는 나이는 어려도 제법 식견이 있군.”
“과찬이십니다. 식견은 한없이 부족합니다. 그저 아는 것이 있다면 어디로 발을 뻗어야 하는지 정도만 겨, 겨우 구분하는 정도입니다.”
“하하하하, 그대의 처신은 놀랍군. 과연 천화서고의 천재라고 할 만하네. 만박자와 주 공자가 그대의 반만 되었어도 서로 얼굴을 붉힐 일은 없었을 듯하군.”
대화는 의미없었다.
그저 형식일 뿐이다. 이미 서로의 의중은 지난 밤 정탐꾼이 확인하였기에, 이미 합의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저 누가 누가 더 듣기 좋은 말을 잘하느냐에 불과했다.
“자, 그럼 이제 마무리하도록 하지.”
“마무리라 하심은?”
장로는 빙긋 웃으며 지필묵을 탁자 가운데로 끌어오며 말을 이었다.
“맹약서를 한 장 남겨뒀으면 하네.”
“맹약서라니요?”
“하하, 말 그대로일세. 이후 문제 삼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과 더불어, 결코 이번 일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다고 기록한 후 서명하면 되네. 서명이 끝나면 곧바로 주 공자와 만박자를 만날 수 있을 것이네.”
“……?”
후공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려 했지만 애써 참아냈다. 소요파가 이리도 망가졌단 말인가. 소요파의 그릇이 이토록 작아졌단 말인가.
후공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맹약서는…… 써드릴 수 없습니다.”
“허허…… 이제 와서?”
장로들의 안색이 굳어졌다.
또 언짢은 기분을 그대로 목소리에 실었다.
“여태까지 한 말은 입에 발린 소리였던 것인가? 이깟 맹약서가 뭐라고 거부한다는 거지?”
“흐음…….”
후공은 고심하는 척 시간을 끌었다.
짐짓 미간도 찡그리고 긴 한숨도 내쉬었다.
충분히 인지시킨 후,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하지만…… 청이 하나 있습니다.”
“말해보게.”
“세 분께는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소요파 장문인을 뵙고 싶습니다. 장문인을 뵙고 장문인 앞에서 맹약서를 쓰겠습니다. 세 분을 믿지 못해서는 아니고…… 그렇게 해야 제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