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위.소.현.
장문인 앞에서?
장로들은 내심 실소를 터뜨렸다.
‘허허…… 이자의 걱정과 근심은 바다와 같구나.’
천재이기 때문인가.
천재의 단점이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 생각이 많은 자는 그만큼 염려도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해는 된다. 어떤 사안이든 문서화가 되면 심리적 압박감은 다르게 작용하는 법이니. 천화서고가 최근 서문세가와 맞서 당당히 승리를 쟁취했다곤 하나, 소요파는 다르다. 두려운 존재일 터.
장문인과의 면담을 청한 건 최대한 환심을 사기 위함이리라.
“기다리게. 장문인께 뜻을 전하도록 하지.”
“부탁드립니다.”
**
인상은 부드럽다.
눈매는 서글서글하고, 미소는 다정함이 감돈다.
목소리는 어루만지듯 부드러웠다.
세월의 흔적이 주름의 깊이로 남아있긴 했지만, 월령자는 과거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후공이 볼 때는 그랬다.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허허, 나 또한 그대가 궁금하여 청할까 하던 참이었다네. 따로 할 이야기가 있는 것인가?”
소요파 장문인 월령자가 정감어린 미소를 보냈다.
“하나의 선물을…… 드리고, 또 하나의 청을 드리고자 용기를 내었습니다.”
“흠, 선물과 청이라니 궁금해지는군. 하지만 그 전에, 가면을 벗고 말하는 건 어떠한가?”
“가, 가면이라시면?”
당황하여 더듬는 목소리에 월령자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대는 천공단주가 아닌가.”
“……?”
“금적자와 항마삼협, 거기에 무산쌍웅. 어디 그뿐인가. 그대는 개방의 제자들과 남궁세가의 대공자를 아우르는 자일세. 무슨 뜻인지는 알아 들었을 것이라 믿네.”
물론 후공은 알아들었다.
누구 앞에서라도 위축될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으니, 더 이상 말을 더듬거리거나 눈길을 회피하는 따위의 연기는 그만두라는 뜻이다.
“과연 장문인이십니다. 속이려는 불손한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그저 제 나름대로는 이런 모습으로라도 성의를 보여야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품었습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기세를 조금 끌어올렸다.
그 정도만으로도 기백이 달라졌다. 월령자는 갸웃하다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대는 천재라더니, 정말 놀랍군. 기세조차 자유자재라니. 거기에 사람을 띄워주는 솜씨조차 훌륭하니, 묘한 사람이네.”
“과찬이십니다.”
“자, 그럼 이야기를 나눌 준비는 된 듯하니 들어봄세.”
“먼저 선물입니다. 진정한 선물은 조만간 다시 찾아뵙고 드려야 옳고, 그리할 터이나 그 전에 급하게 마련해보았습니다.”
“무엇인고?”
“낭인왕입니다. 그가 소요파와 일전을 벌여야 한다며 주장하니 소요파에 해가 될 듯하여 그를 죽였습니다.”
“허허, 그대는 본파를 오해하고 있군.”
“무슨 말씀이신지…….”
월령자가 고개를 저었다.
“낭인왕이라……. 아마 그대는 그자로 인해 본파의 분노를 사게 될 것이 두려웠을 테지. 하지만 소요파는 낭인왕 정도의 인물에 영향을 받는 곳이 아니네. 그런 자가 무슨 소리를 하든, 뭘 꾸미든 신경 쓸 일이 무엇일까. 허허, 괜한 짓을 하였어.”
“아…….”
후공은 탄성소리를 들려주었다.
하지만 개소리다.
감시의 눈을 붙이고, 맹약서를 쓰라는 놈이 신경을 안 쓴다니.
서글서글한 눈빛으로 태연히 헛소리를 하는 재주가 놀라워 당장이라도 다 집어치우고 이 자리에서 구겨버릴까도 싶었지만 애써 마음을 다스렸다.
무엇보다 주양과 만박자를 구하는 것이 우선이다.
마음에 둔 계획대로 진행해야 한다.
그것이 옳다.
그래, 지금은 바짝 엎드려 주마.
“송구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허허, 그 마음이야 모를까. 선물로 받음세. 청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다름이 아니오라, 소요파에서 무극살부 부주를 거두었다는 소식을 접한 후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월령자가 갸웃했다.
미소는 잃지 않았으나 눈매는 가늘어졌다.
“소요파의 품에 그가 머문다고 생각한 순간, 무극살부 부주가 갑자기 커 보였습니다. 보잘 것 없다고 여겼는데 영영 닿을 수 없을 듯하고, 안전해 보였으며, 그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허허허, 그러한가.”
가늘어졌던 월령자의 눈에 웃음꽃이 피었다.
천화서고 대공자의 말은 이어졌다.
“그 생각의 끝에 이런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소요파의 품이 그리 넓다면 천화서고 또한 그 품에 들어가면 좋지 않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천화서고가 보다 커지고 안전해지지 않을까. 소요파의 그늘에 머물고 싶노라 청하고 싶었습니다.”
“하하하!”
월령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흡족했다. 이 정도면 거의 오체투지인 것이다. 거스르지 않겠다고, 살려달라고 말하고 있음이다.
“품이라니, 그대의 말은 과하군. 천화서고는 소요파를 얻고, 소요파는 천화서고를 얻은 것으로 하지.”
“영광입니다.”
천화서고 대공자가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손을 내민다. 월령자는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비릿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악의가 서린 미소는 나타났을 때보다 빠르게 사라졌다.
어느샌가 포근한 미소를 띤 채, 월령자가 천화서고 대공자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 손에,
천향삼주의 무향이 남겨졌다.
**
모두가 한자리에 모였다.
주양과 만박자가 풀려난 것이다.
떠들썩했다. 고생했다고, 힘들지 않았냐며, 위로하고 투덜거리고 술잔이 오갔다.
하지만 주양만은 방향이 달랐다.
“만 선생, 그리고 여러분! 이제 무극살부 부주가 문제가 아닙니다. 이번에는 더 많은 고수를 끌어모아 소요파를 쓸어버립시다. 아니, 사람을 가둬놔 버리다니 얼마나 흉악한 자들입니까!”
주양은 본전도 못 찾았다.
즉시 한심하다는 시선이 쏟아졌다.
“주 공자, 그만하세. 사람이 멈출 때도 알아야 하는 법이네.”
만박자를 필두로,
“랄라라라~~~. 적당히 하자고. 라랄라~~~.”
“형아, 그러다 죽어.”
“주 공자, 그만 좀 합시다! 시발, 누가 보면 강호 협객인 줄 알겠네. 내공 한 줌 없으면서 어떻게 된 게 제일 호전적이여 아주!”
멸살단과 천공단이 혹독하게 비난을 퍼붓는 바람에 주양은 찌그러졌고, 시무룩해졌다.
그런 주양을 구한 건 절친이었다.
밖으로 따로 불러낸 후공은 주양과 함께 한적한 산책로를 거닐었다.
“하아…… 끝을 못 내서 미안하네.”
주양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기에 후공은 웃고 말았다.
이놈은 진짜배기였다.
어떻게 봐도 진심이다.
하긴, 청부가 성공하면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녀석이기도 하다. 미친 우정이고, 또 범상치 않은 놈인 건 확실했다. 은하전장은 번창할 듯하다.
“주양.”
“응?”
“이 일은 누가 시작한 거냐?”
“내가 시작했지.”
“아니, 내가 시작했다.”
“하지만…….”
“그건 알고 있겠지?”
“뭐?”
“내가 너의 생명의 은인이란 거.”
주양이 멍해졌다가 이내 깨닫고 웃었다.
“하하하, 그렇게 되네.”
말은 된다.
청부가 성공했다면 자신도 함께 죽었을 테니까,
친구가 걸음을 멈췄기에 주양도 멈췄다.
친구가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한다.
“고마웠다.”
“……어?”
“전부. 내게 해준 모든 것, 언젠가 보답하마. 그 무엇이라도, 어떤 것이라도.”
이는 범항과 주양 사이의 약속이었지만, 후공은 이뤄주고 싶었다.
주양은 코를 찡긋하다 하늘을 올려다봤다.
떠오른 것이다.
어릴 적 두 사람의 약속.
[주양, 언제라도 서로 원하는 소원 하나를 들어주기로 하자. 그것이 무엇이라도.]
[고작 하나?]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내가 말한 한 가지는 특별하거든. 목숨을 걸어야 하더라도, 세상 모두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더라도 반드시 들어주는 거지.]
[좋아.]
[그럼 기념으로 우리만의 암호를 만들자.]
그때만 해도 서로 몰랐다. 소원이 청부가 될 줄은.
그리고 지금, 그날의 약속 하나가 이뤄졌다.
주양의 눈이 촉촉해지며 울 것 같았다. 그 꼴은 보고 싶지 않았기에 후공은 어깨를 툭 쳤다.
“울려면 얼른 울어라. 퍼 마시러 가야지.”
“누가 운다고 그래.”
*
모두가 밤이 늦도록 마셨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할아버지, 근데 할아버지는 왜 노래를 맨날 맨날 불러요?”
“랄라라~~ 화가 많아서 그래. 라랄라라~~~.”
소천개가 묻고 불평진인이 답했다.
“무슨 말이에요? 자꾸 화가 난다는 거예요? 그래서 불평? 아니, 근데 화가 나는데 왜 노래를 불러요?”
“랄라라라~~ 후공이 어느 날 그랬거든. 화가 날 때면 노래를 부르면 좋다고. 화가 가라앉을 거라고. 라라라라~~~.”
“하하하, 말도 안 돼. 후공은 웃겨. 근데 효과는 있었어요?”
“랄라라~~ 아니.”
“근데 왜 계속 불러요?”
“라라랄라~~~ 노래를 안 하면 패니까, 안 맞으려다 보니, 랄라라라~~. 버릇이 됐어. 랄라라~~~ 근데 계속 하다 보니까 화가 또 줄긴 주는 거다. 하하하, 랄라라라~~~.”
이렇듯 쓸데없는 말들이 오갔고, 추혼검 설영이 어느 순간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향했지만, 후공은 내버려 두었다.
**
객잔으로 돌아온 설영은 만박자와 따로 이야기를 나누었고, 만박자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에야 술자리로 돌아와 자리를 차지했다.
설영이 의도한 건지, 그 자리는 마침 후공의 앞쪽이었다.
후공은 툭 한마디를 던졌다.
“설 공자, 도망간 줄 알았습니다.”
“하하, 그럴 리가요.”
“하긴 내일이면 작별이군요. 설 공자 같이 감쪽같은 남장여인은 처음이라 신기했는데, 아쉽습니다.”
곁에 있던 남궁연이 웃음을 터뜨렸고, 설영은 얼굴을 붉혔다. 날이 덥다며 몇 번 손부채질을 하고, 한참 머뭇대다가 입을 열었다.
“저기…… 제가 강호를 돌아보며 경험을 쌓고 있는 중입니다.”
“아하! 그러셨군요.”
“그런데 이제 멸살단이 해체되는 터라…… 이후로는 천공단과 함께하고 싶습니다만.”
“그래요?”
“네, 부탁드립니다.”
“흐음, 혹시 천공단에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도 있나 봅니다? 저라든가, 남궁 형이라든가.”
“푸우우!”
술을 막 들이켜 가던 남궁연이 뿜어버렸고, 설영은 얼떨떨한 표정이 되었다.
후공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선택을 잘하셔야 합니다. 잘생긴 건 남궁 형 쪽이지만 저는 무려 단주니까요. 에헴~.”
“그보단……. 어쨌든 동행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자란 녀석이 고개를 숙였기에, 후공은 한 번 더 ‘에헴’ 소리를 내주었다.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만날 때가 아니다.
이 녀석 너머에 있는 존재.
**
다음 날 밤.
천공단은 하북성 남단에 이르러 멈췄다. 비로소 소요파의 추적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소요파는 천공단의 이동 방향이 안휘의 천화서고 쪽이었기에 안심했으리라. 거치적거리는 것들은 모두 끝났다고.
하지만 아니다.
천공단은 이제 시작이었다.
위(僞) - 소(消) - 현(現).
모두가 재회한 첫째 날 천공단은 단주에게 들었다.
전음으로 은밀히 오갔다.
거쳐야 할 길, 해야 할 말들, 그 모든 예정은 전해졌고, 숙지되었다.
위소현.
마음을 놓게 하고, 자취를 감추고, 나타나 반격한다.
이제 천공단의 차례였다.
무극살부의 부주의 목을 치고, 보물을 빼앗는다.
천공단은 소요파와의 일전을 벌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