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그래서 그가 뛰어난 자다.
하북성 남단에서 멈춘 그 밤.
천공단은 시끌벅적하게 주루로 향했다.
“내일 다시 승곡으로 돌아간다고요?”
“네, 그렇게 정해졌습니다.”
설영의 눈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그나마 대화가 통한다 싶은 남궁연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다시 돌아간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설영의 미간은 한껏 좁혀졌다.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 얼마나 부지런히 달려왔던가. 중간 중간 쉬긴 했어도 수고로운 여정이었다. 천공단의 태도는 내내 소요파 쪽은 앞으로 쳐다도 보지 않겠다는 식이었거늘,
‘다시 소요파가 있는 승곡으로 돌아간다고?’
주루의 계단을 오르며 남궁연이 미소 지었다.
“별일 아닙니다. 두목이 소요파에 들렀을 때 깜박 놓고 온 물건이 있어, 그걸 다시 찾으러 가는 겁니다.”
“놓고 온 물건요? 그게 무엇인지요?”
“모르겠습니다.”
“물어보진 않으셨고요?”
“네.”
“왜요?”
“하하, 제가 뭐라고 제 주제에 두목에게 하나하나 물어볼 수 있겠습니까.”
“아니, 그쪽은…….”
설영은 어처구니가 없어 도중에 말을 잃었다.
제 주제에라니, 이게 천하에 명성을 떨치는 남궁세가 대공자의 입에서 나올 소리인가. 천공단주가 대체 뭐라고.
“설 형, 전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두목이 가자고 하면 가고, 멈추라면 멈추고, 목을 따오라면 목을 따러 가는 사람일 뿐입니다.”
“…….”
그 말에 설영의 말문은 아예 콱 막혔다.
천공단이 이 층에 올라서자, 점소이가 함박웃음을 띠고 쪼르르 달려왔다.
열한 명.
단체 손님인 것이다. 탁자를 붙여 자리를 마련해주고 주문을 받기 위해 싱글벙글 대기했다. 오늘 매상이 평소보다 저조했는데, 밤에 난데없이 대박이 터져버린 것이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였다.
이 사람들, 통이 컸다.
“네, 네! 술과 말씀하신 요리와 안주로 십칠 인분. 곧바로 대령하겠습니다.”
“크흠, 먼저 선금을 지불해도 되겠습니까?”
“아이고야, 손님. 되고말고요.”
선금이라니 더 대박이라는 생각에, 점소이는 좋아서 머리가 어떻게 돼버릴 것 같았다.
그때 탁자에 돈이 딱 놓였다.
동전 한 냥이었다.
“손님, 이게 뭡니까?”
“선금입니다.”
젊은 서생이 태연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기에 점소이의 얼굴은 아주 딱딱해져버렸다.
“저기…… 계산이 틀립니다만.”
“여기 루주에게 이렇게 전해 보십시오. 천화서고 대공자가 동전 한 냥으로 십칠 인분을 원한다고.”
“아니 저기요, 손님, 천화서고가 뭔데 이러십니까? 저희 루주랑 아는 사이입니까? 친합니까?”
시비조에 항마삼협이 인상을 찡그렸다.
“거, 말 더럽게 많네. 너 앞으로 한마디만 더 하면 죽인다.”
점소이가 움찔했다.
항마삼협뿐 아니라 험악한 무산쌍웅까지 노려보고 있었기에 점소이는 일단 물러나기로 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 모습에 천공단이 낄낄거렸지만 설영만은 뜨악해졌다. 그녀가 놀란 눈으로 몸도 낮추고 목소리도 낮춰 좌중을 향해 빠르게 말했다.
“저기요, 천공단분들. 이게 대체 뭐하시는 겁니까? 이건 아니잖습니까. 원래 이런 분들 아니지 않습니까.”
소천개가 헤실거렸다.
“누나, 우리 원래 이래. 우리가 낭인왕 아저씨 묻은 거 벌써 잊은 거야?”
**
루주는 별채에서 점소이의 보고를 받았다.
곧바로 호통을 내질렀다.
“뭐가 어째! 동전 한 냥으로 십칠 인분이라니? 도대체 뭐하는 새끼들이야!”
그는 매우 뚱뚱했는데, 어찌나 격하게 소리질렀는지 뱃살이 다 출렁였다.
“루주님, 그놈들 조합이 아주 웃깁니다. 노인에다가 거지며, 인상 더러운 놈들에다가 화장 할 것 다 하고 남장을 한 정신 나간 년에, 천화서고 대공자라는 서생 놈은…….”
“어? 방금 누구라고?”
같이 씩씩대던 루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네, 천화서고 대공자 어쩌고 하는데 새파랗게 젊은 놈입니다. 얼마나 뻔뻔한지 낯짝 두께가 장난이 아닙니다. 쪽수를 믿고 까부는 듯하여 제가 이미 칼잡이들을 불러두었…….”
“잠깐만.”
“네?”
루주가 품에서 종이를 꺼내 펼쳐보였다.
거기에는 한 젊은 남자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혹시 이렇게 생겼냐?”
“어라? 네, 그놈이 맞습니다. 어째서 루주님의 품에서 놈의 얼굴이 나와버리는 건가요?”
“그렇구만.”
루주는 혼자 고개를 끄덕거렸다.
전서를 통해 서신과 그림을 받은 것이 열흘 전이다.
“네?”
“가져다줘라. 아, 그리고 잘해 줘.”
“네??”
“귀빈이다. 동전 한 냥도 받지 마. 다른 요구사항은 없더냐? 날 보자든지.”
“그런 말은 없었습니다.”
루주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인가. 대충 무슨 의도인지 알 것 같다.”
“저기요, 루주님? 대체 그자가 누구길래 그러십니까?”
“천화서고 대공자. 하오문의 친구다.”
잠시 후, 설영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금 전까지 사십여 명의 칼잡이들이 이 층으로 우르르 몰려왔는데 한순간 다시 우르르 돌아가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내 술이며 술잔이 나오고, 간단한 안주부터 탁자에 놓이기 시작했다.
“헤헤, 손님들, 맛있게 드십쇼.”
아까 딱딱한 얼굴로 물러났던 점소이까지 싱글거리며 연신 굽신거리고 있었기에, 그녀는 다시 몸을 낮추고 목소리도 낮춰 좌중을 향해 소곤거렸다.
“천공단분들, 왜 갑자기 이렇게 되는 거예요?”
천공단은 그저 낄낄거릴 뿐이었다.
답한 건 남궁연이었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답해주었다.
점소이를 오라고 하고 은전을 꺼내 십칠 인분보다 더 많은 값을 치렀다.
점소이가 남궁연을 향해 연신 손을 저었다.
“손님, 넣어두십시오. 전부 무상입니다. 그거 받으면 저 죽습니다.”
“하하하, 받아주십시오. 안 받으시면 제가 죽습니다.”
설영은 여전히 어리둥절을 금치 못했지만 후공은 따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어디에서든 하오문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었음을 확인했고, 그 사실을 흡족히 여겼을 뿐.
**
그 밤,
천공단은 그 부근에서 묵었다.
후공이 좌정하고 있자니 창가로 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새까만 깃털의 새는 창문 안으로 들어서면서 화려한 색상으로 변하였다.
좌정한 후공 앞에 내려앉아 폴짝폴짝 춤추듯 뛰었다.
후공이 미소를 지으며 눈을 떴다.
“어서 와라.”
[네, 주인님. 제가 굉장하게 날고 날아서 천화서고에 다녀왔답니다. 까르르르르르르.]
“그래, 너이기에 말은 잘 전하였을 테고, 그쯤은 수고도 아니었을 테지? 넌 똑똑하고 세상에서 가장 빠른 새니까.”
[까르르르르르르. 신나!]
칭찬을 들어 기분이 좋아진 색관조가 까르르대며 방 안을 휘저으며 날아다녔다.
[맞아요. 제가 너무 빨라서 날아가던 전서매 두 마리 옆을 지나쳐갔는데, 둘 다 놀라서 기절해버렸어요. 까르르르르르. 얼간이 새끼들인 거여요. 까르르르르르.]
“후후후.”
후공은 그만 웃고 말았다. 거지들과 어울려서 그런지, 안 그래도 좋은 색관조의 어휘력이 더 좋아지고 날로 개방스러워지고 있었다.
“내게 가까이 와라.”
후공이 손을 내밀자, 그 앞에 색관조가 내려앉았다.
후공은 천향삼주를 운용해 검지에 무향 하나를 맺혔다.
“이 향을 맡을 수 있겠지?”
[물론이에요, 주인님.]
무향이지만 색황조는 주인이 자신의 몸에 남겨놓은 무향과 다르다는 것을 구분할 수 있었고, 또 맡을 수 있었다.
“기억해라. 이 향이 소요파 장문인 월령자에게 남겨놓은 향이다.”
[월령자! 월령자! 월령자! 까르르르르르르르.]
“그가 하는 모든 말을 들어라. 매순간 신중해야 하고, 깃털 색을 한 번씩 바꾸어주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월령은 제게 맡겨 두세요, 주인님! 까르르르르르!]
“그래, 넌 잘할 테지. 오늘 밤은 이곳에서 머물고 내일 아침 소요파로 떠나도록 해라.”
[너무 좋아요! 까르르르르르르.]
색관조가 소천개에게로 날아갔다.
후공은 다시 좌정에 들었다.
그로부터 한 시진 정도가 지났을까.
자신의 객방에서 잠을 청하던 설영이 슬그머니 일어났다. 그녀는 검을 챙겨들고 창가에서 잠시 주변의 기척을 확인한 다음, 고요할 뿐임을 확인하고는 창밖으로 신형을 날렸다.
좌정하고 있던 후공의 입가에 한줄기 미소가 떠올랐다.
*
잠시 후, 설영은 숲에 있었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달빛이 간간히 새어들어, 숲 안의 풍광은 밤의 정취로 멋들어졌다. 설영은 그곳에서 한 여인과 나란히 앉아 있었다.
설영은 주로 말했고, 하얀 면사의 여인은 한 번씩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말을 마쳐가며 설영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스승님, 이 제자 아둔하여 어찌하여 스승님께서 천화서고 대공자를 높이 평가하시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하, 답답한 게로구나. 그래도 몇몇 느낀 바는 있지 않더냐?”
면사 안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물론 그가 낭인왕의 공세 앞에서 초연하던 모습은 실로 놀라움을 금치 못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제자 그 외에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후 그가 보인 행보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으니까요. 사람을 산 채로 땅에 묻어버리질 않나, 천공단과 나누는 대화는 진지함이 없고 매사 농담이고, 아까 전 주루에서는 돈을 안 낸다고 했다가 또 낸다고 하는 식이었습니다. 또 소요파에 물건을 놓고 왔다는 걸 보면 사람이 얼마나 덤벙대는 자인지요.”
“후후, 그래, 그럴 수 있겠구나.”
스승이 웃었기에 설영은 침울해졌다.
그녀도 이 웃음의 의미가 다른 뜻을 품고 있다는 것쯤은 아는 것이다.
“스승님, 제가 보지 못한 부분이 무엇인지 가르침을 내려주십시오.”
“아영, 보이는 것이 전부란다.”
“네?”
“그는 이미 많은 것을 보였다. 하지만 네가 보지 못했다면 기다려 보거라.”
“……네.”
제자가 시무룩해졌지만, 여인은 면사 안에서 그저 미소를 머금을 뿐이었다.
그녀는 많은 것을 알게 되었지만 제자에게 설명해줄 생각은 없었다. 들어서 알게 되면 그건 깨닫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문과 의아함과 수많은 물음표 속에서 갈망하다 비로소 알아차렸을 때 몸에 새겨지는 것이니.
‘그때가 되면 많이 놀랄 테지.’
그래, 놀랄 것이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아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가 누구와 어울리는지를 보는 것. 그런 점에서 천화서고 대공자의 곁에 있는 이들의 면면은 실로 놀랍다.
기괴하고 독특하며 엉망이다.
같은 부류로 생각하기 쉬우나 묘하다.
그들과 자유롭게 어울릴 뿐 아니라, 아우르고 심지어 우러름까지 받고 있지 않는가. 물들지 않고, 도리어 천공단이 물들어 가는 모습이라니.
또한 소요파에 고개를 숙였다는 걸 보면 자존심이라는 허울에 얽매이는 자도 아니다. 필요하다면 고개를 숙이는 일 따위는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자. 이는 세인의 평판으로는 결코 그를 흔들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 낭인왕도 망설임 없이 묻어버릴 수 있었을 테지.
소요파에 놓고 온 물건이라면?
무극살부 부주의 목일 것이다. 어떤 수단을 가지고 있음인가, 그녀도 궁금해진다. 그리고 거기에서 끝날 것 같지도 않으니 기대되기도 한다.
“아영.”
“네, 스승님.”
“조급해할 것 없다. 그가 너에 대해 물은 것이 있느냐?”
“그는 제게 어떤 말도 묻지 않았습니다. 이 제자는 그것도 의문입니다. 왜 아무것도 묻지 않고 궁금해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후후, 그래서 그가 뛰어난 자인 것이다.”
“네?”
“그는 너에 대해 궁금한 것이 아니라, 나를 궁금히 여기고 있기 때문이지. 그렇지 않나요, 천화서고 대공자?”
“……?”
갑자기 무슨 말인가 싶어진 설영이 스승의 시선을 따라 옆을 바라보았다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좌측편, 오 장여 너머. 나무 위였다.
언제부터 있었던 걸까?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디딘 채로 한 청년이 뒷짐을 진 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천화서고 대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