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조각 같은 외모가.
‘너로구나.’
후공은 의문이 풀렸고, 반갑기도 했다.
누구인가 했더니 천산신녀였다.
당대 천산의 주인이다.
일인계승이며, 오직 여인에게서 여인으로 계승된다.
그래서 칭호는 언제나 천산신녀다.
주로 심산유곡에 틀어박혀 자연을 벗삼기에, 강호인들은 좀처럼 마주칠 수 없는 인물이다.
하지만 후공은 전대의 천산신녀와도 인연이 있었고, 지금 보이는 천산신녀도 알고 있었다. 무림맹에 초빙하기도 하였고, 천산에서 보기도 했다.
설영이 모자란 것도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산에서 도통 나오지 않고 지내다 보면 피부만 뽀얗게 되는 것이 아니라 머리도 뽀얘지는 것이다.
그때쯤 스승은 제자를 데리고 강호를 유람하며 경험시킨다.
그 속에서 제자는 세상 물정을 배우고, 강호의 생리를 알아간다. 천산에 있어 가장 강호 활동이 왕성한 시기라 할 수 있는데, 설영이 지금 그 시기인 것이리라.
운이 좋다고 해야겠다.
천산의 후인은 소요파를 상대하는 경험을 얻어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운이 좋은 건 비단 천산만은 아니다.
후공도 자신이 운이 좋다고 여겼다.
천산신녀가 나서준다면 소요파를 상대하기가 훨씬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천산의 무공은 심오하며 검공과 장법에 두루 능하다. 천산의 이매검법은 화산의 매화검법에 견줄 만하고, 장법 중 천산무흔장은 흔적 없는 현란함이다.
천산신녀라면 소요의 귀신 중 하나와 맞서도 밀리지 않으리라.
그나저나,
‘나만 젊어진 줄 알았더니…… 넌 아예 늙지를 않는구나.’
나이가 오십 후반은 되었을 텐데, 면사 너머로 보이는 천산신녀는 삼십 대 초반 정도로 보일 뿐이었다. 하긴 전대 천산신녀도 그러하긴 했다.
“이 불청객이 두 분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후공은 신법을 휘날려 천산신녀 앞에 이르러 정중히 예를 취했다. 면사 안에서 천산신녀가 웃음지었다.
“어서 와요. 그렇지 않아도 올 때가 되었다 싶었는데, 이렇게 보게 되는군요.”
그녀가 이어 자신을 소개했기에 후공은 짐짓 감탄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신비에 휩싸인 고수가 천산에 머물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는데, 이렇듯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더 일찍 찾아뵈었어야 마땅하나, 때가 되지 않아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하, 신비에 휩싸였다는 말은 과하군요. 하지만 듣기 싫지는 않으니 그대의 언변을 칭찬해야겠군요.”
그렇게 답한 천산신녀는 천화서고 대공자의 뒷말에 주목했다.
때가 되지 않아 머뭇거렸다는 건,
이제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천산신녀는 명확히 의미를 이해했지만 확인하고 싶어졌다.
“그대는 정녕 소요파와 맞설 생각인가요?”
“그렇습니다.”
천산신녀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곁에서 듣던 설영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잊고 온 물건이 아니었어? 소요파와 일전을 벌인다고?’
도대체 무슨 일이?
갑자기 나타났는데 왜인지 스승님과 천화서고 대공자는 서로를 아는 듯 말하고 있다.
거기에 대화도 훅훅 건너뛰어 따라잡기 힘들었건만, 또 다시 한순간 훅 넘어가 갑자기 소요파와의 일전이 나오니 설영으로선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대는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누가 봐도 승산이 없습니다.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입니다.”
“한데?”
“그 계란이 보이는 것과 다르다면 결과도 다를 겁니다.”
“……?”
천산신녀가 갸웃했다.
천화서고 대공자가 미소 지으며 말한다.
“알고 보니 계란이 쇠계란이고, 그 친구까지 불러온다면 능히 해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하하하하하!”
천산신녀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쇠계란이라, 그대는 말을 참 재밌게 하는군요. 그대가 쇠일지도 모른다고 나 또한 생각하고 있으니 적절한 표현 같군요. 그럼 그 친구는 본녀를 말하는 것인가요?”
“물론입니다.”
“만약 본녀가 함께하지 않겠다면 그대는 어떻게 할 생각이죠?”
“상관없습니다. 조금 수월하냐, 아니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
순간 천산신녀는 말을 잃었다.
당연하게 기대하고 있던 말이 아니라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말이 들려온 것이다.
‘설마 내 짐작보다 훨씬 더 뛰어난 자인가?’
기분이 묘해졌다.
분명 약관에 불과한 젊은 서생이거늘 도대체 이 자신감은 무엇이란 말인가. 한데 기대되는 마음이 떠오르니 그것이 또 묘하다.
‘도대체 이자는 무슨 생각인 걸까?’
허투루 들리진 않는다.
지금 바로 눈앞에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빙긋 웃고 있으니.
또한 보고 있기도 하다.
대공자의 눈은 은잠사로 만들어진 면사를 뚫고 자신의 눈을 정확하게 응시하고 있다.
“본녀가 함께하길 원하는 걸 보면, 그대가 소요파의 귀신들에 대해 알고 있다는 뜻이겠군요.”
“알고 있습니다. 목령자와 화령자.”
“오호!”
천산신녀는 탄성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강호의 소문을 통해 막연히 귀신들의 이야기를 들었나 보다 했는데, 이름이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그대는 추측이 안 되는 사람이군요. 혹시 생각해둔 복안은 있나요?”
“단순하게 가려고 합니다.”
“정면으로 부딪힌다는 뜻은 아닐 테고…….”
“먼저는 흔들어 볼 생각입니다. 흔들리면 무엇이든 소리가 나기 마련이니, 이후 그 소리를 따라 판단하고 방향을 잡아 가려 합니다.”
천산신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뭘 어떻게 흔든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굳이 그 부분까지 자신이 참견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묻고 싶은 것이 갑자기 요란하게 머리에서 우후죽순 떠오른 탓이었다.
그녀는 그중에 하나를 골랐다.
“대공자, 그대가 소요파와 맞서는 진정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근본적이면서도 모든 것을 포괄하는 질문이자, 가장 궁금한 것이기도 했다.
후공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대답할 말을 찾았다.
“오직 하나입니다. 저는 무극살부 부주의 보물에 관심이 있습니다.”
“……?”
뜻밖의 대답에 천산신녀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되묻지는 않았다. 천화서고 대공자가 여전히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을 보니, 아직 남은 말이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소요파 장문인이 탐낼 만한 거래라는 점에서 그 보물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것이 반짝이는 보물이든,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이든, 어떤 감정이든, 제가 취할 생각입니다.”
“……!”
천산신녀는 면사 속에서 눈을 빛냈다.
‘보물이 보물이 아니다? 이자는 무엇을 보고 있는 거지?’
정녕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무극살부 부주로 인한 갈등이라고 여겼거늘, 그 차원이 아니었다.
‘과거에 얽힌 실타래라도 있는 것일까.’
목령자와 화령자를 알고 있다는 점에서는 소요파와 깊이 연관되어 있는 듯도 보인다. 그녀는 궁금해졌고, 보고 싶어졌다.
“좋아요, 본녀도 그대를 돕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곧바로 감사의 말이 들려왔지만, 천산신녀는 면사 속에서 살짝 시무룩해졌다. 어째서인지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들리는 것이다.
후공은 당연하게도 면사를 뚫고 그 표정을 읽었기에 내심 웃음이 났다.
“진심입니다.”
“하하, 그대는 모른 척해주지 않는군요.”
“염려 마십시오. 신녀께서 젊고 아름다운 모습인 건 끝까지 모른 척할 생각입니다.”
“하하하하!”
천산신녀가 유쾌함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 아래 후공이 입을 열었다.
“한데 한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씀해보세요.”
“다름이 아니라, 설 공자가 계속 설 공자이면 함께 다닐 수 없습니다. 차라리 설 소저가 되면 모를까, 지금의 모습으로는 곤란합니다.”
천산신녀가 다시 웃음짓고는 바로 수락했다.
“그건 그대에게 맡기도록 하죠. 아영, 괜찮겠지?”
“네, 스승님.”
어리둥절해 있던 설영이 얼른 답했다.
천산신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천공단과 함께 하는 시간은 너에게 뜻깊은 경험이 될 것이다. 자, 대공자! 그런 의미에서 천공단은 언제 소개시켜 줄 생각인가요?”
“지금 바로 하겠습니다.”
설영이 또 뭔 소리인가 하고 눈을 연신 깜박일 때, 숲 너머에서 일단의 그림자가 솟구치며 신형을 드러냈다.
천공단이었다.
*
그 밤,
설영은 남자에서 여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의미로 눈에 띄었다.
너무 아름다운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조치가 취해졌다.
그 변모에는 남궁연도 깨달은 바가 있었다.
돋보이지 않게, 조금은 평범해 보이기 위해 머리카락을 잘라냈다. 긴 머리는 사라지고 제법 짧고 투박하게 되었다.
검집도 손을 봤다.
검결지를 맺어 기운을 일으킨 다음 가문의 문양, 대나무잎사귀 세 개를 지워냈다.
**
다음 날, 승곡.
대운루 루주는 손에 쥔 초상화를 봤다가 눈앞에 있는 젊은 서생을 봤다가 그렇게 번갈아 바라보면서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루주, 무슨 문제라고 있습니까?”
“대공자, 뭐 별건 아니고……. 흐음, 어째서인지 그림보다 잘생겼습니다?”
“아, 그래요? 어떻게 그려놓았는지 제가 좀 봐도 되겠습니까? 어쨌든 제 얼굴이니.”
“그러시구려.”
하오문의 루주가 건넸고, 후공이 받아들었다.
후공은 즉시 뚱해졌다.
그게 또 궁금했는지 그 곁에 있는 천공단이 머리를 들이밀며 바라보다가 터져나갔다.
빼닮긴 했는데 세밀한 음영으로 범죄자인양 그려놓은 것이다.
“와아, 똑같네. 완벽하네, 이거.”
“이게 그러니까 하오문에 다 뿌려졌다는 거지?”
“천공단주의 목에 현상금 얼마나 걸린 거냐고!”
거의 현상수배범이었다.
루주도 껄껄 웃었다. 그도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분위기를 살리고 싶을 뿐이었던 터.
“자,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답을 해드려야지. 소요파 장문인이 아끼는 사람이라……. 보자. 그래, 그렇군. 딱 한 사람이 떠오르는구려.”
“……?”
“대제자 염화평이란 자라오.”
“어떤 사람입니까?”
“흐음…… 문제가 좀 있는 놈입니다. 드러난 평판은 좋은데, 실상은 다르지요. 여자를 꽤 밝히는데, 석 달을 못 갑니다. 여자들 중에 거머리처럼 들러붙은 몇은 끽!”
루주가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죽여버리기도 했다오. 하지만 그러고도 새로운 여자를 만나면 한동안은 부지런히 정성을 쏟는다오. 그리고 지금 만나는 여자는 이름이 초연이고, 가문은…….”
***
야심한 밤.
초연은 그를 기다렸다.
그녀는 혼자였지만, 괜찮았다.
이곳 승곡에서 그녀를 건드릴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녀의 정인은 소요파요, 그 안에서도 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저 꿈을 꾸었다.
오늘은 얼마나 달콤할까.
이 밤은 또 얼마나 달아오를까.
기다리는 동안 기대되어 저절로 시가 떠올랐다.
사랑에 빠지면 시인이 된다.
그녀는 요즘 시상이 감당이 안 될 정도였다.
나는 바라고 있습니다.
꿈꾸고 있습니다.
모두의 시선 속에 당신과 함께할 순간.
당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요?
당신이 머물고 있는 그곳은 어떤가요.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더 이상 내가 묻지 않도록
그대와 함께이고 싶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늠름하고,
또 섬세하죠.
당신의 외모는 조각 같……
그녀는 시를 멈췄다.
저만치서 소리가 났다. 두 남자였다. 단지 그뿐이라면 태연했을 텐데, 소리가 문제였다.
질질질.
검붉은 뭔가를 끌고 오고 있었다.
조금 더 가까워지자, 그녀는 놀라 뒷걸음질 쳤다.
끌고 오는 건 핏덩이가 된 사람이었다.
‘무, 무슨…….’
두 남자가 바로 앞까지 오더니 말을 걸어왔다.
아주 흉악스럽게 생긴 놈들이었다.
“예쁘장하게 생겨서는 겁이 없는 분이네? 처자는 야밤에 무섭지도 않소?”
“흉악한 놈들을 만나지 않으려거든 얼른 집으로 들어가시오.”
초연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
흉악하게 생긴 놈들이 지금 누굴 보고 흉악한 놈들을 만나지 말라고 조심하라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모습에 무산쌍웅이 핏덩이를 들어 보였다.
“처자, 이놈을 잘 보시오. 이런 놈들을 조심해야 하니까.”
초연이 놀라 연신 뒷걸음질쳤다.
자신의 연인,
소요파 장문인의 대제자인 염화평인 것이다.
조각 같은 외모가 조각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