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128화 (128/460)

128화. 소중함의 무게를 측정하다.

초연.

그녀는 서신이 되었다.

밤을 꼬박 지새웠고, 다음날 아침 일찍 서신이 되어 소요파를 찾아갔다.

그녀를 맞이한 건 소요파의 이대와 삼대제자.

반신반의했다.

이런 날은 가끔 있는 것이다. 염화평이 밤에 몰래 빠져나갔다가 다음 날 돌아오는 것이며, 여인이 찾아오는 경우도 이례적인 건 아니었다. 여인이 비록 그녀의 아버지와 함께 찾아왔지만 동요하지 않았다.

산문에서 돌려보내졌고, 장문인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했다.

그래야 했고, 그럴 만했다.

염화평이 핏덩이가 되어 끌려갔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것이다. 그 누가 소요파 장문인의 대제자를 건드린단 말인가. 산서성 어느 곳에서 벌어졌다 해도 갸웃할 일이거늘, 승곡현 내에서 벌어졌다는 건 황당무계한 소리였다.

그렇기에 일단 기다려보기로 했다.

하지만 후공은 기다리지 않았다.

증명을 할 때는 두 번이 좋다.

그래야 믿음이 간다.

한 번은 되었기에 두 번째 증명 차례였다. 소요파에 보낼 서신을 작성했다.

전달 임무는 남궁연과 설영이 맡았다.

부근 표국으로 향했다.

“천공단주는 사람이 왜 그런가요? 아무리 스승님이 편한 대로 하라고 했다고 해도, 이건 정말 너무 심하잖아요.”

가는 길에 설영이 투덜거렸다.

그녀는 남자였다가 아름다운 여인으로 돌아왔지만 그게 또 눈에 띈 탓에 다시 조치가 취해졌다.

지금은 여자 거지가 되었다.

머리는 산발에 헝클어졌고 얼굴은 꼬질꼬질해, 아름다운 부분이라곤 그녀의 두 눈동자뿐이었다.

그 덕분에 은앙개는 친절한 목소리로 설거지님이라고 불렀고, 소천개는 설거지 누나라고 부르는 형국이었다.

“제가 볼 땐 소저의 모습 중 지금이 가장 낫다 싶습니다만.”

“하하, 말도 안 돼.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에요. 남궁공자 당신의 말하는 투는 어떻게 된 게 점점 천화서고 대공자를 닮아 가는군요.”

“그래요?”

“틀림없어요.”

“극찬이군요. 감사합니다.”

남궁연이 짧고 투박하게 자른 머리를 살짝 숙이며 감사를 표했기에, 설영은 다시 웃고 말았다.

“근데 남궁 공자는 왜 갑자기 머리를 자른 건가요? 뭔가 심경에 변화가 있었던 건가요?”

“아닙니다. 그저 두목과 함께 다니는 중에 돋보이지 않으려 합니다. 개중에 안목이 없는 자들은 저를 주시하거든요.”

“흐음, 참 이상한 말도 다 있네요. 천공단주의 나이가 훨씬 어린데, 괜찮나요?”

“괜찮은 정도가 아닙니다. 전 쫓겨날까 봐 하루하루 노심초사입니다.”

설영은 웃음을 터뜨렸지만 동시에 그녀의 내심에서는 의문이 커졌다. 천화서고 대공자가 어떤 사람이기에 남궁세가 대공자며 천공단이 추종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대충 듣기론 다른 이들은 약왕문에서 이미 탄복하였다고 하고, 남궁 공자는 남궁세가에서 처음 접하고 혼이 나갈 정도였다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들려주지 않으니 그저 궁금증만 커질 뿐이었다.

“그나저나 서신의 내용은 무엇인지 들은 것 있어요?”

“네, 저울이라고 들었습니다.”

“저울이라뇨?”

“생명의 무게. 두목은 소중함의 무게를 달아보려 하십니다.”

**

- 월령자는 보아라.

서신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내용인즉,

그대의 대제자 염화평은 내게 있다.

아직은 살아있다.

그대가 내게 가르침을 주어 그에 깨달은 바가 있어 그대로 돌려주려 한다. 이미 그대와 소요파가 주양과 만박자를 인질로 잡았던 일이 있으니 나를 탓할 순 없을 것이다.

입장은 바뀌었다.

이제 그대의 차례다.

내가 두 사람을 구하기 위해 몸을 낮춘 것처럼,

그대 또한 제자를 위해서라면 마땅히 몸을 낮춰야 할 것이다.

이대로 하라.

시간은 오늘 정오까지.

무극살부 부주의 목을 함운산 정상에 걸어라.

시간을 넘기면 염화평은 죽는다.

혹여 그대는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저 객기일 거라고, 떠보는 것일 거라고.

그 생각이 들거든 낭인왕이 죽은 것을 떠올려라.

시간이 많지 않다.

나는 머뭇거리는 사람이 아니다.

나와 천공단, 그리고 천화서고는 이미 소요파와 일전을 벌일 준비가 되어 있다.

당혹스럽고 광오한 서신이었다.

소요파 장문인 월령자와 열두 명의 장로들이 둘러앉았다.

모두는 이미 서신을 보았다.

또한 아침 일찍 한 여인이 찾아왔음도 인지한 상태였다.

장로들은 한동안 분을 토해냈고, 염화평의 평소 행실에 대해서도 성토를 쏟아냈다.

그러나 분노가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내 진정하고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장문인,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우선 염화평을 구하고 봐야합니다. 당장 무극살부 부주를 죽여 목을 걸어야 합니다.”

“동감이오.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보복은 그다음 일입니다. 천화서고와 천공단에게 혹독하고 성대한 보복으로 갚아주면 되는 일입니다.”

다수가 같은 의견이었다.

생각하고 말 것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장로 중 청령자는 다른 견해를 보였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무극살부 부주가 그동안 모아놓은 재물과 보물이 많다고 하였기에 본문이 중재자로 나섰던 것 아닙니까.”

즉시 반발이 쏟아졌다.

“말 같지 않은 소리요!”

“당신은 무슨 말을 떠드는 것인가! 지금 그깟 재물 때문에 염화평을 버리자는 것인가!”

청령자가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어허, 말을 끝까지 들어보시오. 무극살부 부주가 뭐라고 염화평과 바꾼단 말이겠소. 단지 본인은 두 가지를 다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오.”

“두 가지?”

“그렇소. 정오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소이다. 지금 서둘러 무극살부 부주를 고문하여 보물을 숨겨놓은 장소를 알아낸 다음 죽이면 그만 아닙니까. 어차피 언제 죽여도 죽일 자인데 무슨 문제가 있겠소.”

일부는 탐탁치 않게 여겼지만, 또 일부는 묘수라고 생각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은 갈렸지만 과정만 다를 뿐 최종 의견은 무극살부의 목을 걸어두어야 한다는 쪽이었다.

이제 모두의 시선은 장문인에게 향했다.

월령자가 미소를 머금었다.

“여러분들의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장로들께선 상대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듯하군요. 정녕 여러분들은 그들이 본 장문인의 제자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오?”

“하지만 장문인?”

반대 의견이 나올 줄 몰랐던 장로들이 미간을 좁혔다.

월령자의 미소는 더 짙어졌다.

“이 험한 강호를 살아감에, 또 거대한 문파를 유지함에 있어 잘못된 선례를 만드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고작 천화서고 따위에 휘둘린다면 이러한 형태의 일은 반복될 것이고, 계속 휘둘리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 어느 누구도 소요파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오. 그렇기에 본인이 장문인으로 있는 한 잘못된 선례를 남길 순 없소.”

말이야 백번 옳았다.

하지만 상대가 좋지 않다는 걸 상기할 필요가 있었다.

“장문인, 천화서고 대공자는 한낱 서생나부랭이가 아닙니다. 그자가 본문을 찾아와 몸을 낮춘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거리낌 없이 맹약서를 쓴 다음, 떠난 척하고는 즉시 돌아와 이와 같은 일을 벌였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이미 처음부터 작정하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다른 장로들도 근심에 휩싸였다.

“그렇습니다. 장문인께서 말씀하신 바를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나 천화서고는 이미 서문세가를 상대하였고, 그 과정에서 서문가주와 그의 아들이 참혹한 죽음을 맞았다는 걸 생각하셔야 합니다. 또한 그자와 함께 있는 이들 중 다수는 미치광이로 불리는 자들이어서, 일반적인 범주로 봐선 안 됩니다.”

“다들 그만하시오.”

월령자가 얼굴을 굳히며 왼쪽 손목을 매만졌다.

정확히는 손목에 걸린 둥그런 옥빛 환이었다.

이 자리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이는 없었다.

소요파 장문영부.

매만졌을 뿐이나 더 이상 장로들은 입을 열지 못했다.

월령자는 다시 미소를 찾았다.

“본인은 휘둘릴 생각이 없습니다. 아직 대응할 여지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다음 서신을 기다려 봅시다.”

장로들 몇은 수긍했지만, 다수는 귀를 의심했고, 초조함과 근심에 휩싸였다. 하지만 어쩔 도리는 없다. 누구보다 장문인이 아끼던 염화평이 아닌가.

이와 같은 결정은 수뇌부만 인지했다.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모두가 알아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낮말은 새가 듣는다고 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색관조가 들었다.

**

정오가 가까워지는 시간.

후공과 천공단은 송옥산 만연봉에 있었다.

만연봉은 송옥산에서도 가장 높은 봉우리였다.

함운산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작고 낮은 산인 함운산을 바라보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일반인의 시선으로는 볼 수 없지만 후공과 천공단은 볼 수 있었다.

이미 색관조는 다녀갔다.

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그사이 달라질 수도 있고, 눈으로 확인할 필요도 있었다.

정오는 이내 지났다.

지나고도 일식경.

함운산 쪽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던 천공단에서 탄식이 터져나왔다.

“말도 안 돼…….”

“와아, 이걸 무극살부 부주가 이겨버리네?”

“제자를 버렸어. 대제자면 거의 아들 아니냐?”

“와아아아, 이게 되네?”

“아니 시발, 일단 살려야 하는 거 아냐? 후일을 도모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천공단 내에서는 이미 내기가 걸리기도 했는데, 내기가 성립이 안 되었다. 모두 무극살부 부주의 목이 떨어져나갈 것이라고 생각한 탓이었다.

이런 상황에 천공단보다 더 당황한 건 염화평이었다.

어제는 핏덩이였다가 오늘은 멍투성이가 되어 천공단 뒤편에 널브러져 있던 염화평은 거의 공황 상태였다.

“아니야, 절대 그럴 리 없어! 시간을 착각한 게 틀림없어! 사부님께서 날 버릴 리가 없다고!”

그런 염화평에게 은앙개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쯧쯧, 다 끝났어. 넌 버려진 거야.”

“사형, 무극살부 부주 굉장한 사람이지 않아? 보물이 얼마나 많은 걸까? 설마 주양 형아네보다 더 부자인 거 아냐?”

“야, 멍청한 거지야! 은하전장이 동네 전당포냐. 살수조직이 그 정도 부를 축적하려면 온 세상 사람들 다 죽이고 다녔어야 해.”

“하긴 그렇네. 그럼 뭐지?”

소천개가 갸웃할 때, 후공은 남궁연을 불렀다.

“남궁 형.”

“네.”

남궁연은 두목이 고개를 끄덕였기에 곧바로 염화평에게로 다가갔다.

염화평은 분위기가 이상했기에 눈이 커졌다.

“뭐? 뭐하려는 거요? 설마, 아니겠지? 당신들, 정말 날 죽이려는 것은 아니겠지? 이대로면 천화서고며 남궁세가가 소요파와 전쟁을 벌이는 것이 될 텐…….”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남궁연이 우수로 염화평의 관자놀이를 가격했다.

퍼석!

그걸로 끝이었다.

염화평은 입을 벌리고 눈을 눈 채로 죽음을 맞았다.

“남궁 형, 다른 표국을 이용하세요. 충분히 먼 곳에 있는.”

“그리하겠습니다.”

이미 염화평을 운반할 나무상자 또한 준비된 터였다.

후공이 뚱하니 있자니, 그 곁으로 천산신녀가 다가왔다.

“대공자, 천화서고에 위협이 가해질 텐데 대비는 되어 있습니까?”

“네, 이미 색관조가 다녀왔습니다. 천화서고는 제가 다시 연락할 때까지 외부 출입이 없을 겁니다. 천화서고는 허락 없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며, 또한 반년이라도 내부에서 자급자족이 가능합니다.”

“하하, 역시 그대는 기대대로군요. 자, 그럼 이제부터는 어떻게 할 건가요? 흔들었더니 소요파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왔으니 말입니다.”

후공이 미소지었다.

그녀의 말대로다.

이상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후공은 무극살부 부주와 월령자의 관계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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