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바다 위 반가운 손님들.
소요파는 동요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그리되었다.
분노를 쏟아낼 대상이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공동의 적이 눈앞에 뚜렷하게 존재한다면 지혜와 힘을 모으는 과정 속에서 내부 결속이 강화될 터인데, 적의 종적은 묘연하고 상황은 불리해져만 가니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 상황이 다 뭔지……. 무극살부 부주 하나 때문에 일이 이 지경이 되다니, 이게 말이 되는 일이오?”
“휴우…… 동감이외다.”
“혹시 장로께선 그 살수놈이 무엇을 지니고 있는지 알고 있소? 재물 외에 말이외다. 재물뿐이라면 정녕 본파의 꼴이 우스워지는 것이 아니겠소?”
“나도 그것이 대체 무엇인지 모르겠소이다.”
답답해하며 한숨을 내쉬는 이들도 있었지만, 문파 내 여러 계파 중 소수 계파에서는 조금 더 노골적이었다.
“근자에 장문인의 결정들은 하나같이 최악입니다. 특히나 염화평의 죽음은 이해가 불가합니다. 염화평은 장문인의 제자이기 이전에 소요파의 제자가 아닙니까. 부주를 죽이고 염화평을 구했어야 마땅하거늘, 염화평을 버리고 부주를 택하다니요!”
“최악이다마다. 난 염화평을 옮겨 왔던 표사가 했다는 말만 떠올리면 아직까지 얼굴이 화끈거린다오.”
표사가 말했다.
이 표물은 소요파의 것이 분명하나 보물도 아니고, 또 소요파에 그리 소중하지도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전해 들었다고 했다.
“천화서고 대공자는 본파의 제자와 무극살부 부주를 저울에 달아본 것인데, 본파가 살수 따위를 지키고 스스로 제자를 버렸으니 그런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가 버린 것인가?”
“장문인이 버렸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장문인에 대한 의구심은 그렇게 점차 커져갔다.
염화평의 악행에 대해서도 문제가 제기되었다. 대제자가 무슨 일을 저질러도 장문인이 감싸고 돌았으니 일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 아니냐는 말들이었다.
도리어 민심은 잘 죽었다는 쪽이라, 대의명분마저 천화서고 대공자 쪽이 쥐게 된 상황이었다.
또 한편에서는 천화서고 대공자에 대해 두려워하는 목소리도 흘러나왔다.
“상대가 안 좋습니다. 그가 천재라는 걸 간과했습니다. 그자는 필시 이런 상황으로 흘러갈 것까지 예측했음이 틀림없습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밖에는…….”
천재라고 하여 암기력이며 이해력이 좋다는 정도겠거니 했는데 아니었다.
치명적인 약점이 될 만한 부분은 모두 대비되어 있었고, 또 그동안 도대체 어떤 길을 걸어온 것인지 내로라하는 강호의 가문들과 강호인들이 그의 친구를 자처하며 소요파를 적대시하는 형국이다.
종적을 감춰버린 것도 그렇다.
싸워야 할 대상이 없으니 원망과 의구심은 장문인에게로 향하여 가고, 계파별로 분열 양상까지 보이고 있지 않는가.
전쟁에 있어 최선의 승리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다.
천화서고 대공자는 그걸 보이고 있었다.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엄청난 일을 해내고 있으니 그야말로 뛰어난 전술가요, 전략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또한 강호의 생리까지 꿰뚫어보고 있는 듯하니, 도대체 소요파는 누구와 싸우고 있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
그러는 와중,
누군가는 부활했다.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 무덤에서 부활해버리면 야수의 눈이라도 눈물이 나게 마련이다.
푸욱!
낭인왕의 손이 땅을 뚫고 나왔다. 이어 머리가 빠져나오면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와아아, 살았다. 겨우 살았네. 시발, 어떻게 된 게 혈도가 안 풀려. 천공단주, 이 개새…… 허억!”
기쁨과 안도 속에 반쯤 몸을 빼낸 낭인왕은 부활하다 말고 흠칫 몸을 떨었다.
저만치 오 장여 앞쪽이다.
노중년인이 등불을 들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누가 쳐다보든 사람 하나 있나 보다 했을 낭인왕이었지만, 열흘 넘게 땅에 묻혀 있다 보니 간이 콩알만 해졌다.
무엇보다 상대가 태연한 것이다.
딱 봐도 기다린 것처럼 보인다. 사람이 땅속에서 기어나오면 보통은 그걸 지켜보는 쪽에서 놀라야 하는데, 멀뚱하니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누, 누구냐?”
“허허험, 나와버렸구려.”
“누, 누구냐니까!”
“허험, 긴장 푸시오. 난 그냥 부탁 받은 사람이라오.”
“부탁?”
낭인왕이 갸웃했다.
대운루 루주는 연신 헛기침하며 가까이 다가왔다.
“오늘 이 시간쯤이면 당신이 기어 나온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소. 근데 진짜 나올 줄은 몰랐구려. 나도 아까 땅이 꿈틀거리는 걸 보고 이미 깜짝 놀라버렸다오. 어째 천공단주는 겪을수록 소름 돋는구만.”
“천공단주?”
마저 기어나오다 낭인왕이 다시 굳어버렸다.
루주는 피식 웃고는 호리병을 던졌다.
“물이오. 목부터 축이시구려.”
“그러니까 천공단주가 이 시간에 내가 나올 것이라고 했다고?”
흙더미에서 빠져나온 낭인왕이 주저앉아 물을 벌컥거렸다. 이내 탄성을 내질렀다.
“캬아아, 물 맛 죽이는구만. 그런데 그게 가능한 건가?”
“점혈이 풀리는 시점을 제멋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것에 대해 묻는 것이라면, 낸들 어찌 알겠소. 도리어 몸소 체험한 당신이 내게 알려줘야 맞다 싶소만.”
“…….”
우문현답인 탓에 낭인왕은 할 말이 없었다.
통상 혈도는 반나절 이내 해혈할 수 있다. 심지어 해혈을 시도하지 않아도 이삼 일이면 저절로 혈도는 풀리게 마련이다. 그래서 묻혔을 때만 해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혈도만 풀리면 제대로 갚아주겠다고 이를 갈았는데, 혈도는 안 풀렸고, 그래서 이도 그만 갈았다. 어떻게 해도 혈도가 안 풀리는 것이다.
이후에는 추워졌고, 무서워졌다. 이렇게 서서히 썩어간다 싶으니 울기도 많이 울었고, 헛웃음도 얼마나 흘렸는지 모른다.
그러다 혈도가 풀린 것이 방금 전.
기적이요, 하늘이 도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천공단주가 예정해 두었던 것이라니.
정녕 듣도 보도 못한 점혈의 경지가 아닐 수 없어, 낭인왕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천공단주가 그런 고절한 점혈의 대가라면 한 달이든 두 달이든 혈도가 안 풀리게 걸어둘 수도 있었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하아…… 갑자기 왜 이렇게 춥냐.”
“하하하, 추워진다니 다행이오. 대책은 있는 사람이었구만.”
“당신도 천공단인가?”
“난 아니오. 오다가다 아는 사이 정도? 몇 가지 부탁을 받았는데, 여기 오는 게 그중 하나였소.”
“물 건네주는 거?”
“흐흐, 물은 내가 챙긴 거고, 천공단주의 말을 전하러 온 거요. 수고했다고. 미끼로 잘 썼노라고.”
호리병을 든 채로 낭인왕이 굳었다.
“미끼라니? 설마 다 계획된 것이었다고?”
“하하, 그런 셈이오. 큰 걸 낚으려면 뭐든 그럴싸한 미끼가 필요한 법이니까. 아, 이것도 난 그저 들은 것이니 오해는 마시구려.”
“천공단이 누굴 낚는데?”
“소요파.”
“……?”
멍청해진 낭인왕을 향해 루주가 빙긋 웃었다.
“지금 천공단이 소요파와 한판 붙었소이다.”
“무, 무슨…….”
“상황이 아주 흥미진진하다오.”
“그래서 결과는? 아직 진행 중인가? 아니, 시발 그 재밌는 일을 왜 자기들끼리 하는 건데! 천공단은 지금 다들 어디에 있는 거요?”
“다 도망쳤소.”
“뭔 소리야!”
“하하하하,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아니, 천공단이 어디에 있냐니까!”
**
천공단은 바다에 있었다.
유람선 위에서 바다 낚시 중이었다.
그야말로 휴양.
“사형, 원래 생선들 이렇게 안 잡히는 거였어?”
“그러게. 언제 잡아서 언제 회 떠먹냐. 벌써 배고파 돌아가실 지경인데.”
“쯧쯧, 낚시는 인내야, 인내. 진득하게 기다려야지.”
거지들이 투덜대자, 그 곁에서 거지꼴인 설영이 나무랐다.
“누나, 바다는 처음이라고 하지 않았어? 산에서만 살았다며?”
“……어.”
“그럼 좀 닥쳐줘.”
“……어.”
선상의 한쪽에선 항마삼협과 남궁연이 널브러져 자고, 유람선 돛대 위에 앉은 금적자는 피리를 불고 있었다. 무산쌍웅은 조금 더 활발했다. 유람선 뒤편 바다에서 헤엄치는데 수영 솜씨가 좋았다.
그리고 후공은,
“대공자, 아예 이곳에서 한 달 정도 머무르는 건 어떤가? 그때쯤이면 소요파도 제 풀에 지쳐 쓰러질 듯하네만.”
“하하, 가주의 말씀이 꽤 근사합니다.”
“허허, 그리 하진 않겠다는 말로 들리는군.”
산동악가 가주와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산서를 떠난 후 곧장 향한 곳은 산동악가였고, 그곳에서 하루를 머물다 다시 산동성 동쪽 해변에 도착했다.
해변에는 산동악가의 별장이 있었고, 후공은 한차례 와본 적이 있었기에 애초에 목적지는 해변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유람선을 빌려 바다에 나온 터. 온통 뒤집어놓은 주제에 이보다 태평할 수가 없으니, 만약 소요파가 이런 광경을 보았다면 각혈을 토했으리라.
“소요파가 사마외도의 길을 걸어온 이들이라면 모를까, 역사가 깊고 균형을 유지해온 문파이니 문파 내부에 인물이 없을 리 없습니다. 장문인 월령자가 받을 압박은 적지 않을 테죠. 그럼 곧 답이 튀어나올 겁니다. 앞으로 길면 닷새, 짧으면 오늘 내일 중이라도 확증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허허, 이거 아쉽구만.”
악가주가 너털거렸다.
그는 정작 소요파의 일이야 어떻게 되든 별 관심없었고, 대공자와 조금 더 시간을 갖고 싶었던 것이다.
남궁세가에서 경탄했던 그로선, 대공자가 도피처로 자신의 가문을 찾아주자 기쁨이 말로 할 수 없었던 터.
“이곳이 마음에 드니 언제 또 가주께 신세를 지겠습니다.”
“하하, 영광일세.”
악가주의 말이 진심임을 알기에 후공도 미소를 머금었다.
불시에 찾아갔음에도 가주의 태도는 내내 극진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 선미에 있던 천산신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공자, 그나저나 고기가 잡히지 않으니 큰일이네요.”
그녀는 이처럼 큰 배를 처음 타보아, 방향타를 잡고 나름 신을 내고 있던 터였다.
“신녀께선 걱정 놓으십시오. 물고기를 꼭 저희가 잡아야 하는 건 아닙니다.”
“그럼 누가 잡나요?”
천산신녀가 갸웃했다.
후공은 바다 저 멀리 손을 내뻗었다.
“저기 어부들이 오는군요.”
“네?”
“응?”
천산신녀뿐 아니라 악가주도 갸웃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두 사람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윽고, 낚시하던 거지들도 빠르게 다가오는 배를 보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해, 해적이야? 사형, 누나! 저거 해골바가지 맞지?”
“와아, 사제야 우리 대박나버렸다. 우리가 해적을 만난 거라고! 살다 살다 해적을 다 보게 되네.”
“우와아~~ 해적이다~~~ 해적님들~~~.”
틀림없었다. 안력을 돋워 보니 배 위에 해골 깃발이 펄럭이고 있고, 배 위에 구릿빛 근육에 문신을 한 해적들이 바글거렸다.
해적선은 빠르게 다가왔고, 유람선 곁에서 멈췄다.
갑판에서 해적들이 노래를 낄낄대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는 시끄러웠기에, 곤히 자던 항마삼협과 남궁연이 깨어나 오만상을 찡그렸다.
“뭐하는 새끼들인데 정신 사납게 노래를 불러!”
“신입, 가자!”
“네!”
노래하며 유람선에 긴 나무 발판을 내리던 해적들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유람선에서 넷이 솟구쳐 날아오는 것이다. 햇빛을 등진 탓에, 항마삼협과 남궁연의 모습은 해적들의 눈에 검은 그림자로 보였다.
‘뭐, 뭔데?’
‘왜 날아와?’
해적들은 직업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