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132화 (132/460)

132화. 왜 말을 안 해.

날은 화창했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고 맑았다.

의미 없었다.

마음이 흐려진 이들에겐 그저 잿빛일 뿐이었다.

소요파가 그랬다.

적의 종적은 실체가 없는 듯 묘연하고, 장문인에 대한 의구심은 커져만 간다. 결실의 날은 기대하기 어렵다.

아니, 그 전에 소요파가 원하는 결실은 무엇인가?

누군가는 더 지켜보자고 말하였지만, 소요파 내 다수의 의견은 생각이 달랐다. 장문인이 답을 내놓아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소요파 수뇌부들이 장문인을 찾아갔다.

장로들과 각주들.

현재 임무를 부여받고 외부에 나가 있는 이들을 제외한 거의 모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장문인! 모두가 웅성거리고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억측이 나돌고, 그것들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진실인 양 이야기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것은 무극살부 부주와 소요파가 연관되었다는 이야기들이며, 그 내용은 차마 입에 담기도 참담한 말들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굳이 말씀을 드리지 않아도 장문인께서 익히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곧바로 다른 장로가 뒤를 이었다.

“장문인, 본파가 세상을 설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이 무슨 소리를 떠들든, 이를 해명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들만은 알고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 스스로가 납득하고 확실한 명분 아래 확신하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부디 답을 주십시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두가 입을 모았다.

“장문인, 답을 주십시오!”

“무극살부 부주가 가지고 있는 보물은 무엇입니까?”

“장문인께서, 그리고 본파가 그자를 옹호해야만 하는 온당한 이유를 들려주십시오!”

목소리가 컸다.

하지만 비난의 기색은 없었다.

장문인의 모습이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평정심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도리어 기대하는 마음이 되었다.

월령자가 옅게 미소 지었다.

“그대들을 이해하오. 그동안 많이들 답답했을 것이오.”

“……!”

“……?”

모두가 자세를 고쳐 앉을 정도로 집중했다.

월령자가 말을 이었다.

“본래 무엇이든 때가 있기에 말하지 않으려 했으나, 이쯤 되니 더 감춰두긴 어렵겠구려. 늦었지만 말하리라. 무극살부 부주를 보호한 이유는 그가 본문의 잃어버린 보물에 관해 말했기 때문이오.”

“잃어버린 보물이라면?”

“설마?”

“……?”

몇몇이 짐작했는지 눈을 부릅떴다.

월령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오래 전 사라진 본문의 비기를 그가 수중에 넣었고, 자신의 목숨을 보전 받는 대가로 본파에 청하여 왔소.”

“비, 비기?”

“아!”

“그런 일이…….”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비로소 의문이 풀리고, 의아하게 여겼던 장문인의 결정이 한순간에 이해되었다.

장문인이 자신의 대제자를 버리면서까지 무극살부 부주를 지켜야만 했던 건 부주를 지킨 것이 아니었다. 소요파의 비기를 지킨 것이다.

“이러한 내막에 관하여 알고 있는 이는 본문에 오직 세 사람. 본 장문인과 소요의 혼이라 불리는 나의 두 사형뿐이라오.”

소요의 혼.

장문인의 두 사형을 뜻함을 모르는 이는 없다. 소요파 내에서 독보적인 무공의 경지에 이른 존재들.

목령자, 화령자.

의구심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장문인이 무극살부 부주를 통해 살인 청부를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늘…….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인가.

월령자가 긴 한숨을 토해냈다.

“무극살부 부주는 자신의 안전이 보장되기 전까지는 결코 입을 열지 않겠다고 하였소. 그는 홀로 남았고 불안해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언제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준비가 되어 있는 자라오. 만약 그가 잘못된 선택을 하여 비기를 되찾을 기회를 놓친다면 본 장문인은 죽어서도 선대를 볼 낯이 없을 것이오.”

비기는 값으로 환산할 수 없다. 그 어떤 보물과도 견줄 수 없다. 또한 그 비기가 소요능선환이요, 소요육양공이라면…….

모두 이해하였기에 함께 탄식했다.

과연 장문인이다.

장문인은 그동안 얼마나 외로웠을 것인가.

그는 아무에게도 내색하지 않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었다.

이제 해야 할 일은 한 가지뿐.

모두가 머리를 조아렸다.

“천화서고 대공자의 간계에 휘말려 장문인께 불손한 마음을 품었으니, 부디 저희 모두를 벌하여 주십시오!”

**

그 밤.

월령자는 소운암으로 향했다.

그곳 암자에서 두 사형과 마주 앉았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의 연기가 서로 간에 놓였고, 월령자의 자리는 상석이었다.

“모두에게 밝히셨다니 잘 하셨습니다. 그동안 장문인께서 마음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청수한 노인이 포근한 미소로 말을 건넸다.

월령자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해를 받는 건 괜찮습니다. 하지만 이 장문인의 위가 제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군요. 대사형께서 장문의 위를 받으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나날입니다.”

“허허, 누구보다 더 잘 해내고 계시니 그런 말씀 마십시오,”

목령자의 위로에도 월령자의 안색은 어두웠다.

“아닙니다. 이 장문인은 어리숙하여 고작 스무 살 남짓에 불과한 천화서고 대공자에게 휘둘리고 있지 않습니까. 제자까지 잃었으니, 제 무능에 밤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입니다.”

목령자의 낯빛도 어두워졌다.

“장문인, 그 아이의 행방은 아직입니까?”

“부끄러운 말이나 그렇습니다.”

“흐음…… 정녕 비상한 아이입니다.”

월령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월령자의 안색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윽고,

“사실 오늘 뵙고자 한 이유 중 하나도 그 아이를 처리하는 일을 상의하고자 함입니다.”

“말씀하십시오.”

“아무래도 두 분께서 나서 주셔야겠습니다.”

“……?”

“……?”

목령자와 화령자의 눈이 커졌다.

그 뜻을 모를 월령자가 아니다.

미소 지었다.

“제가 그동안 두 분께 제약을 걸어둔 건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대사형께서 가문의 흉수를 찾아 언제까지라도 강호를 떠돌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잊을 수 없는 일임은 분명하나, 지금에 이르러 두 분께서 마음을 다스리는 데는 문제가 없으실 테지요.”

목령자와 화령자는 수긍했다.

방황하던 시기. 그것을 잡아준 것이 막내 사제다.

만약 장문인의 제약이 없었다면 아직까지도 방황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정녕 삼 년여를 미친 듯이 찾아다녔지 않던가.

그걸 보다 못한 장문인은 장문영부로 제약을 걸었다.

소요파의 혼으로 남으라 명했다.

소요파를 품고 있는 소운산으로부터 오백여 장을 벗어날 수 없게 했다.

그리하여 머무는 혼이 되었다.

소요파를 적대시하며 오백여 장 안에 들어오는 이들에겐 귀신이 되었다. 죽음을 선사하기도 하고, 공포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어언 이십 년의 제약이 해제되려 한다.

문파의 번영과 영광을 위해 이제 소요파의 혼은 오백여 장을 넘는다.

적은 척살당할 것이다.

천화서고 대공자는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목령자와 화령자가 자세를 고쳤다.

장문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월령자는 근엄히 좌수를 내밀었다.

장문심법을 따라 진기를 운용되니 손목을 휘감은 장문영부가 붉은 빛을 발했다.

둥그런 빛의 테두리가 나타났고, 그 빛 속에 소요의 율법이 맴돌았다.

**

그 밤.

색관조는 나뭇가지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물론 사실은 달랐다.

그저 졸고 있는 척하고 있었다.

내심으로는 화가 단단히 났다.

아주 나쁜 새끼인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아주 나쁜 새끼들이었다.

소요파 장문인과 무극살부 부주가 말을 안 하는 것이다. 주인님은 분명히 월령자의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들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월령자는 어떻게 된 게 이 사람하고만 있을 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말을 안 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건 확실했다.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지금도 월령자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고, 무극살부 부주는 미소를 짓고 있다.

‘제발 말 좀 해. 나도 바다에 가고 싶어. 주인님이 기다리셔. 주인님이 보고 싶어. 소천개가 보고 싶다고~~~.’

그러던 한순간,

한 번씩 머리를 떨구던 색관조의 귀가 번쩍 뜨였다.

“월령자, 지금 나를 겁주는 건가?”

“무…… 무슨. 전음으로 하라.”

월령자의 안색이 급변했다.

무극살부 부주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월령자, 당신 우습구만.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 벌써 잊은 건가? 살인 청부한 것이 당신이란 걸 목령자와 화령자가 알면 어떻게 될까?”

“내, 내가 실언했다. 더 이상은 입을…….”

“말을 할 땐 예의를 갖춰. 소요파의 비기? 후후, 참 그럴싸해 보이긴 해.”

“아…… 알겠으니 전음으로 하자.”

“쯧쯧, 겁먹긴. 이 외친 암자에서 도대체 누가 듣는다고.”

“…….”

“월령자, 예정해둔 시일이 다가오고 있어. 이건 바뀌지 않아. 그 안에 천화서고 대공자를 정리해야 할 것이다.”

“그, 그리하겠다.”

더 이상 대화는 없었다.

월령자의 안색이 울그락불그락 변할 뿐.

하지만 그것이면 충분했다.

색관조가 날아올랐다.

웃음을 참았다.

한참을 높이 솟구쳐 구름 위까지 올라간 다음, 노래하듯 웃음을 터뜨렸다.

[까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

밤의 해변가.

스승과 제자는 모래사장을 거닐었다.

바다가 처음인 설영은 해변의 정취는 물론이고 딛을 때마다 맨발을 감싸오는 모래의 촉감에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천산신녀는 또 그런 제자를 보고 있는 것이 좋았다.

“아영.”

“네, 스승님.”

“넌 지금 모습이 마음에 드나보구나.”

이곳에서는 굳이 거지 차림을 하고 숯검정을 묻히지 않아도 되는데 제자가 이 모습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설영이 머리를 긁적였다.

“마음에 드는 것보단 이 모습에 익숙해져 보려 합니다. 또한 천공단주와 약속하기도 하였기에, 그 약속을 지켜보고 싶습니다.”

천산신녀가 미소지었다.

“넌 대공자를 보고 느낀 바가 있는 듯하구나. 어디 들어보자.”

설영이 떠올리는지 눈동자를 위로 올렸다.

그러다 이내 배시시 웃었다.

“스승님, 그는 엉뚱한 사람입니다.”

“하하하, 그래 옳게 봤다.”

“으음…… 하지만 이 제자, 그가 엉뚱해도 놀라운 사람이란 건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점이 그렇더냐?”

“그는 싸우지 않고도 싸울 수 있음을 보였고, 좋은 친구를 곁에 두길 망설이지 않으며, 그 자신도 좋은 친구가 되려 합니다. 또한 생각과 행동이 유연하니 대처가 자유롭고, 그것이 종잡을 수 없는 듯보이나 그러면서도 결코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잃는 법이 없습니다.”

천산신녀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설영의 말이 이어졌다.

“왜 스승님께서 함께하라고 하셨는지, 또 왜 남궁 공자가 천화서고 대공자를 마치 주군 모시듯 따라다니며 그 언행 하나하나를 배우려 하는지, 이 제자는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흐음…… 이 사부는 왠지 불안해지는구나.”

“네?”

“네가 이 사부를 버리고 천화서고 대공자를 계속 따라다닐 것 같으니 말이다.”

“하하하하, 말도 안 돼요.”

스승과 제자의 웃음소리가 밤의 해변에 울려퍼졌다.

그리고,

그 웃음에 호응하듯 쾌활한 웃음소리가 멀리 밤하늘로부터 들려오기 시작했다.

[까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주인님, 제가 왔어요.]

좌정하고 있던 후공이 피식 웃었다.

시끄러운 수하가 돌아온 것이다.

‘어서 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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