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목령자, 잘 가라.
목령자가 다가온다.
이제 후공도 알아차렸다.
산 아래쪽에 이르렀고, 혼자였다.
목령자의 기세는 광풍이 불어오는 듯했다.
들떠 있음인가.
서두르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소요파를 위하는 길에 나서게 된 것이 기쁜 모양이었다.
후공도 기대되었다.
‘그때와는 다른 모습일 테지.’
목령자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이십여 년 전.
화령자와 함께 왔고, 제약에 대해 말했다. 소요의 혼이 될 것이라고 했다. 향후 다시는 뵐 수 없을지 모른다며 예를 갖췄었다.
당시 그 모습이 처연했기에 후공도 바라보며 안타까워했다.
그렇기에 오늘,
목령자를 갈기갈기 찢어 죽여야 한다.
우우웅!
강대하고 웅혼한 기세가 산야를 뒤흔든다.
한순간 목령자의 신형이 솟구쳐오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목령자는 허공에 멈춘 듯 잠시 머물렀고, 이내 천천히 내려앉았다.
오랜 만이다.
목령자를 보는 것이 그렇고, 소요파의 신법 중 하나인 능파부운의 견식도 오랜만이었다. 목령자가 능파부운을 보인 건 자신의 신법이 뛰어남을 과시한 것이 아니다. 잠시 허공에 머무는 사이 기감을 확장해 산 전체를 파악했음이다.
이제 서로는 혼자라는 걸 안 셈이다.
안색은 과거와 달리 편안해 보였다. 세월이 흘렀기에 그만큼 과거의 슬픔도 마모된 것이리라.
후공은 미소를 머금었다.
과거로부터 인사를 건넸다.
“왔느냐.”
후공은 이십여 년 만에 다시 만난 인사를 건넨 것이었지만. 목령자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왔느냐라…….’
이십여 장 너머에서 그저 갸웃했다가 피식 웃었다.
마주하여 듣게 되는 첫마디가 ‘왔느냐’가 되면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그 말을 한 자가 새파랗게 젊은 애송이가 아닌가.
하지만 그걸 문제 삼지는 않았다.
지적하는 건 우습다.
이 자리는 생사결.
죽고 죽이는 자리다. 나이가 무슨 소용이겠으며, 예법을 운운하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그러면서도, 목령자는 기분이 묘해졌다.
‘이 나이에 이 경지라……. 놀랍구나.’
경지를 가늠함이 꼭 손을 맞대야 하는 건 아니다. 대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모습은 그저 젊은 서생으로 보일 따름인데 자신을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일체의 흔들림이 없으니, 수양의 깊이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였다.
혼자라는 건 이미 확인을 마쳤다.
그래서 더 놀랍다.
혼자임에도,
두려움이 보이지 않고, 살의나 분노도 없다. 심지어 반드시 꺾겠노라는 의지조차 찾을 길 없다. 저 눈과 마주하고 있자니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마치 나무나 돌이 된 듯하다.
‘일념을 지닌 자는 한 점을 무너뜨릴 수 있으나, 일념마저 놓은 자는 천하를 뒤덮을 수 있다.’
심지어 저 무심함에 소요진환공의 심결이 저절로 떠오르기까지 하니, 목령자는 기이하고 또 기이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천화서고 대공자는 생사결을 청할 만한 자이며, 오늘의 승부 또한 장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령자, 넌 왜 혼자 왔느냐.”
목령자는 다시 갸웃했다.
“너도 혼자가 아니냐?”
“흐음…… 그럴까? 내가 얽매이지 않는 자란 걸 소요파에 여러 차례 보였거늘, 넌 전혀 보려 하지 않고 너의 길만 가는구나.”
“……?”
여러 차례 보였다?
목령자가 미간을 좁혔다.
맞다. 그랬다. 상황을 인지한 후 그간의 행적을 파악해가면서 자신 또한,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자라며 몇 번이고 중얼거리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설마 도울 자들을 산 너머에서 기다리게 했다? 그 생각의 끝에 목령자가 주변을 먼저 확인하고, 이어 기감을 확장하려 할 때,
“하하하하하!”
멀리서 여인의 웃음소리가 산야를 휘감고 돌았다.
‘……?’
웃음소리는 빠르게 커졌다. 다가오는 속도가 경이로울 정도. 내력이 실린 웃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며 자신의 진기마저 흔들릴 정도였기에, 목령자는 운기로 다스리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도대체 누구기에?’
이내 희끄무레한 안개덩어리가 번뜩이며 나타났다 싶은 순간 멈추었고, 모습이 드러났다. 신비로운 분위기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목령자의 눈이 가늘어졌다가, 알아보아 커졌다.
“다, 당신은……?”
“목령자, 반가워요. 날 알아보는 걸 보면 그대의 기억력만은 아직 괜찮아 보이는군요.”
말에 뼈가 담겨있었지만, 그걸 추궁할 때는 아니었다. 짐작조차 못한 존재가 나타났다.
“천산신녀…… 당신이 왜 이곳에 있는 것이오?”
“하하, 왜일까요?”
천산신녀는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걸음을 옮겨 천화서고 대공자 곁에 나란히 서며 빙긋 웃었다. 그 모습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했지만, 천산신녀는 친절을 베풀었다.
“당신을 죽이러 왔어요.”
“무, 무슨…….”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점입가경이다.
진주언가며 하북팽가를 비롯한 여러 세가들이 소요파를 대놓고 적대시하여 놀랐거늘, 이제는 천산신녀라니. 그녀는 심지어 직접 나서 천화서고 대공자를 도와 자신을 죽이겠다는 상황.
그 상념도 잠시,
목령자는 주춤 한 걸음 물러났다.
다른 기운을 감지한 탓이었다.
또 누군가 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 움직임은 천산신녀보다는 더뎠지만, 그렇다고 얕잡아볼 수 있는 수준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인원이 많았다.
‘하나, 둘…….’
모두를 헤아리니 열하나.
이내 사방에서 신형이 솟구쳤다. 그렇게 차례대로 모습을 드러내니 악가주와 천공단이었다.
목령자는 면식이 있는 금적자와 산동악가의 가주를 알아보았지만, 천산신녀에게 물은 것처럼 묻지 못했다. 누구 할 것 없이 비웃음을 머금고 있으니 이미 답이었다.
‘덫에 걸렸구나.’
천산신녀 한 사람조차 감당하기 버겁거늘, 거기에 금적자와 산동악가의 가주까지.
어디 그뿐인가.
그 외의 천공단 면면은 처음 접하지만, 상황을 파악하는 중에 인지한 상태. 대충 모습을 통해 누가 누구인지 짐작은 된다. 그중 항마삼협과 무산쌍웅은 실력뿐 아니라 손속의 잔혹함으로도 명성이 자자하다고 했다.
‘오늘 이곳이 내 무덤이 되겠구나.’
하지만 아직 포기할 때는 아니었다.
목령자는 도발해보기로 했다. 천화서고 대공자를 노려봤다.
“네놈은 간교함이 말로 할 수 없구나. 강호에도 법도가 있거늘, 넌 어찌 너와 나 둘만의 생사결의 약속을 청하여 놓고 이리 비열할 수 있단 말이냐! 너는 정녕 세상의 비웃음을 살 것이 두렵지 않느냐!”
승리를 취한다 해도 그것이 과연 진정한 승리인가.
그렇게 목령자가 물으며 답을 청하였지만, 후공은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천공단이 곁에 있으니 자신은 나설 필요가 없다.
“여어어~~. 여러부우운! 방금 내가 이상한 말을 들어버린 것 같은데, 나만 들은 건 아니겠지요?”
항마삼협 중 이열이 낄낄대며 고개를 갸웃해대자, 무산쌍웅이 말을 받았다.
“클클클, 저 또한 갸웃해집니다. 목령자인지 뭔지 하는 늙은이가 노망이 났나 봅니다. 여태 우리가 살아온 강호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간교하고 비열했는데, 저 놀라워하는 표정을 보십시오. 정말이지 한심해서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릴 지경입니다.”
삐리리~~ 삐이삐~~.
금적자가 맞다는 듯 신나는 곡조로 금피리를 불었다.
무산쌍웅의 말이 이어졌다.
“클클, 생사결? 정면승부? 그게 뭔데? 뒤에서 몰래 등에 칼 꽂으면 사람이 안 죽나? 사람을 눈앞에서만 죽여야 하는 거였어?”
“쌍웅 아저씨 말이 맞아. 우리 개방은 구걸하면서도 사람 죽이고 그래요! 죽는 놈이 병신이지, 누굴 탓해. 안 그래요?”
소천개의 말에 천공단이 깔깔대며 웃었다.
천공단에게 도발은 씨도 안 먹혔다.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두고 왜 굳이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 쓰며 먼 길을 돌아가냐는 식이었기에, 목령자는 할 말을 잃었다.
이들은 법도며 형식이 없는 자들.
그러면서도 한줄기 의아함은 남는다.
천산신녀와 산동악가주, 그리고 천공단에는 남궁세가의 후계도 있거늘 어찌 이런 비열한 수단을 서슴지 않는 것인가.
그 답은 바로 들려왔다.
“노인장, 당신 진짜 얼간이가 따로 없구만.”
남궁연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두목이 이미 맹약서를 쓴 다음 곧바로 깨뜨린 것을 보고도 약속 운운하면서 간교하다고 떠들고 있으니, 나이를 도대체 어디로 처먹은 거냐?”
남궁연의 이죽거림에는 어색함이 없었다.
진심인 탓이다. 여태 곁에서 보고 듣고 깨달은 바가 많다. 두목은 자유자재여서 필요에 따라 행동하며 망설임조차 없으니,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목령자 따위는 두목에게 장난감이자 한 끼 식사에 불과한 것이다.
목령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네, 네놈이 감히!”
하지만 천공단의 조롱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은앙개가 풀을 씹다가 뱉으며 물었다.
“늙은이, 하나만 물읍시다. 혹시 원래 학이야? 아, 내가 볼 때 사람 아닌 것 같아서 그래.”
목령자가 반응하기도 전에 천공단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하하하!”
“으하하하하하, 진짜 그럴싸하네. 진짜 학인가?”
“그렇네. 아주 고고한 학이겠군. 난 소요의 혼! 아니지, 난 소요의 학! 이 지랄 하면서 장문인의 대제자가 사람을 처 죽이고 다니든 말든 난 소요의 혼이니까. 사람새끼 아니고 귀신학이니까. 점잔 떨고 있으면 그만인 거잖아. 나만 아니면 돼. 난 착한 사람이에요! 하하하하하하!”
“생사결! 멋진 승부! 하하, 병신새끼. 왜 무턱대고 사람을 믿는 건데? 응? 말 좀 해보라고, 이 학 새끼야!”
“도대체 소요파를 왜 안 끌고 온 거야? 최소한 사제라도 데리고 와야 하는 것 아니냐? 그리고 왜 함정을 못 알아차리는 거냐, 이 모자란 새끼야!”
“악랄한 사제에게 장문인 자리 빼앗기고 굽신대는 개 돼지 늙은이! 으하하하하!”
“무극살부 부주가 소요파의 비기를 찾았고 보관하고 있으니 그를 내칠 수 없습니다? 학 새끼야, 그걸 왜 확인 안 하는 건데? 넌 입이 없어, 발이 없어! 비기인데 부주놈의 이빨을 하나씩 뽑아서라도 알아내야 할 것 아니냐고, 이 머저리 같은 놈아!”
쏟아지는 조롱과 비난이 칼날이요, 난도질이었다.
도중에 참을 수 없게 된 목령자였지만 출수를 하려다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걸 어떻게?’
어떻게 된 일인가? 비기에 관하여는 자신을 포함 장문인과 화령자, 이렇게 세 사람만 알고 있던 것이며, 최근에서야 수뇌부에게 알려진 일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충격이 뒤이어 덮쳤다.
“와아, 저 멍청한 표정 봐. 하긴 자기 부모와 일가족을 몰살한 놈에게 장문인, 그런 말 마십시오, 잘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 지랄하는 놈이니 어쩌겠어.”
“사형들의 제약을 풀 때가 온 듯합니다? 모자란 학 새끼야, 제약이 뭔데? 그런 걸 왜 들어?”
“오오오! 장문영부다. 장문인이시여! 원수인 것 같아도 의심하면 안 되고 당장에 무릎 꿇어야지, 아무렴!”
목령자는 칼보다 더 날카롭게 베어나갔다.
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들의 말이 진실일까?
마치 소요파 곳곳을 들여다본 것처럼 말하고 있다.
정녕 월령자인가?
아니면 진짜 속에 현혹하는 가짜를 섞어 뒤흔들고 있는 것인가?
목령자가 주춤하는 모습.
비로소 의혹이 든 것인가.
후공은 이쯤이면 되었다 여겼다.
“그만.”
나직한 목소리에 사방이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친절은 여기까지. 이제 끝을 봅시다.”
천공단의 표정이 달라졌다.
사방을 포위하며 공격 태세를 갖췄다.
스릉, 남궁연은 검을 빼들었다.
목령자는 죽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저 목을 빼고 죽음을 당할 수는 없는 노릇. 안광을 발하며 먼저 선공을 취했다.
후공을 향해 그가 빛살처럼 짓쳐든다.
“너와 나의 생사결이다!”
후공은 웃고 말았다.
과연 마지막까지 목령자다운 선택이요, 발언이었다.
하지만 의미 없다.
애초에 승부의 추는 일방적이며, 평정심이 흔들린 자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
후공은 좌장을 들어 환명을 그렸다.
회전하는 투명한 둥근 고리.
목령자는 상대에게 닿았다 싶은 순간 물컹, 자신의 우수가 늪에 빠진 듯하여 놀라 신형을 급히 뒤로 튕겼다.
그 머뭇거림은 컸다.
천산신녀의 우수가 목령자의 머리 위 허공을 격하니, 천산격타장의 묘용을 따라 장력이 목령자의 등을 때렸다.
“크으으윽!”
목령자가 비명을 내질렀다.
또 비틀거렸고, 등이 타는듯한 통증 속에 진기가 흐트러졌다.
그것은 시작이자, 끝이었다.
진기가 흐트러진 목령자의 옆구리로 남궁연의 검날이 쓸고 지나갔다. 그 사이 금적자의 장력이 어깨를 강타했고, 무산쌍웅의 비수는 목령자의 복부를 두 번 찌르고 빠져나왔다.
“으으…….”
목령자가 피를 뚝뚝 흘리며 절룩이며 꼴사납게 물러났다. 상처받은 야수의 눈에는 절망만이 깃들었다.
“흐흐…… 어딜 가냐.”
그런 목령자를 항마삼협이 입꼬리를 올리며 다가갔다. 목령자에게 수단은 없었다. 한손으로 배를 움켜쥐고 다른 한손을 그저 휘적일 따름.
항마삼협은 곁에서 그 손길을 비웃듯 피해가면서 낄낄거렸다. 그 비참함 속에 점혈 되었고, 천공단주 앞으로 끌려갔다.
“형님.”
후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넘겨받았다.
목령자의 목을 붙들고 질질 끌어 절벽으로 향했다.
이윽고 절벽의 끝자락에서 손을 내 뻗었다.
이미 목령자의 두 발은 허공.
출혈과 극통으로 의식이 가물거리는 상태에서 목령자는 간신히 천화서고 대공자를 바라봤다.
무심한 눈길 아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령자, 잘 가라.”
“이, 이렇게…… 날…… 죽인다고?”
“물론.”
“하, 하나만…… 묻자. 정녕…… 월령자의 짓이냐?”
대답 대신 손이 놓였다.
망연히 절벽 아래로 떨어져내리며 목령자의 눈은 허망함으로 젖어들어갔다.
‘내가…… 이렇게 죽는다고?’
아니, 그보다 대답은? 진실은?
목령자는 속절없이 추락해가며 절벽 끝에 서 있는 천화서고 대공자를 바라봤다. 점점 그 모습이 멀어져가고, 작아져간다.
그리고, 들려왔다.
“아니. 너의 짓이다. 목령자.”
속삭이듯,
천화서고 대공자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