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137화 (137/460)

137화. 검연이 시작되다.

소요파의 전서매를 반긴 건 색관조였다.

진주언가의 하늘에서 만났다.

[여어~~ 이게 누구신가. 소요파에서 여긴 어쩐 일이야?]

나름 반가움을 표한 것이었지만, 말투가 건들건들인 모양이 거의 하늘의 무산쌍웅이었다.

…….

전서매는 대답이 없었다. 일단 말을 못 한다.

그리고 색관조야 소요파의 온갖 곳을 휘젓고 다니면서 보았기에 아는 척이었지만, 전서매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초면인 것이다.

…….

색관조는 영특했기에 사정을 이해했다.

[아하, 하긴 내가 그땐 흰색이었다가 검은색이었다가 그러는 통에 날 못 알아볼 만도 하네.]

…….

[그래서, 식사는 했고?]

…….

[왔다갔다하려면 잘 챙겨 먹어야 해.]

…….

또 대답이 없다. 일단이고 뭐고 말을 못 한다. 그저 전서매로선 왜 하늘에 세워두고 이러는지 모를 일이었다.

색관조는 한숨을 내쉬었다.

[개 답답하네. 일단 가자. 나 따라와.]

…….

전서매가 시무룩하니 뒤를 따라 날았다.

*후공은 전서의 내용에 만족했다.

빼곡이 장문이었다. 그 안에 감사의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지만, 흡족한 건 그 이유가 아니었다. 그런 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그보단 과정이 마음에 들었다.

솔직히 걱정했었다.

화령자와 목령자가 소요파로 돌아가자마자 다짜고짜 월령자를 일장에 처 죽이면 어쩌나 했는데, 기우였다.

제법 똑똑하게 움직였다.

돌아가자마자 목령자는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월령자를 안심시켰고, 뒤에선 화령자가 장로들을 설득하고, 은근히 협박도 가미했다.

그 이후는 매끄러웠다.

어떤 장로는 밤의 계획을 전하는 일을 맡아 수행했고, 어떤 장로는 월령자의 측근을 따로 분류해 가뒀다.

그 와중에 무극살부 부주도 확보했다.

또한 장로 중 추령자는 거짓 배신으로 월령자에게 접근해 동요시켰다. 부추겨진 월령자가 발작하듯 모든 소요의 제자를 소집했다.

그렇게 소요의 모든 제자가 한자리에 모였으니, 이미 그 밤은 새로운 장문인의 추대식이었다.

그 사실을 월령자만 몰랐다.

그 밤,

모두의 앞에서,

월령자는 전부를 가졌다고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였고, 아무것도 없는 것 같던 목령자는 이미 모든 것을 가진 자였다.

그것이 드러난 순간,

월령자는 무너져내렸다. 당시 그의 비참함은 말로 할 수 없었으리라. 그가 믿고 의지했던 장문인의 지위와 장문영부의 권위는 그저 한낱 먼지.

그렇게 새롭게 소요파의 장문인으로 추대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한 시진(2시간)에 불과했다. 물론 그 바탕에는 목령자와 화령자가 소요의 제자들에게 평소 큰 신망을 받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목령자는 훌륭히 복수를 이뤄냈을 뿐 아니라, 모든 소요의 제자 앞에서 자신의 역량을 증명해 보였다. 문파의 수장다운 면모를 보였다.

그는 이제 적을 간파하는 자이며,

죽여야 할 자 앞에서 다정히 미소지을 수 있는 자였다.

소요파에겐 선물이다.

그들이 얻은 새로운 장문인은 인품과 고강한 무공만을 갖춘 것이 아니다. 빠르고 단호할 뿐 아니라 등 뒤에서 칼을 찌를 수 있는 자요, 덫을 놓고 덫에 걸린 적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 있는 자였다.

‘또한 죽어본 자이기도 하지.’

목령자는 언제까지라도 잊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후공이 흡족하게 여기고 있자니,

“캬아~ 소요파의 일은 소요파가! 멋지게 마무리되었구만.”

“클클, 그 자리에서 월령자 표정을 봤어야 하는데, 좋은 구경을 놓쳤습니다.”

항마삼협과 무산쌍웅이 서신에 대한 소감을 토해냈다.

내전 안에 모두가 둘러앉은 상황.

이어 남궁연도 한마디 거들었다.

“흠, 역시 맞아가면서 배우니까 진도가 빠르네요.”

곁에 있던 모두가 박장대소했다.

남궁연이 진지하게 말해서 더 그랬다.

“하하하, 우리 남궁 형아 득도해버린 것 좀 봐. 이제 천공단 신입 딱지 떼도 되겠어.”

“아무렴. 패고, 묻어버리고, 절벽에서 던져버리기! 여기까지 봤으면 이제 천공단 중견이지.”

소천개와 은앙개의 말에 남궁연이 실실거리며 웃었다.

그때 잔잔히 미소를 머금고 있던 천산신녀가 입을 열었다.

“서신 내용이 장황한 것이, 목령자가 이 정도면 잘해내지 않았냐고 묻는 것 같아 재밌군요. 마치 대공자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쓴 것 같으니 말이에요. 대공자, 그런 의미에서 바로 소요파로 출발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떤가요?”

“가자아아아! 소요파로!”

“무극살부 부주 목 따러 가자아아아!”

“이야~ 그놈 면상이 궁금했는데 드디어 볼 수 있겠네.”

천공단이 엉덩이를 들썩이는 모습이, 이미 무극살부 부주 목을 썰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후공은 갈 마음이 없었다.

“저는 이곳에 남겠습니다. 모두 다녀오십시오.”

“응? 단주, 그게 무슨 말인가?”

“……?”

“……?”

금적자가 갸웃하며 물었다.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기에 눈을 연신 깜박거렸다.

후공은 그저 뚱하니 바라봤다.

뚱해질 수밖에 없다.

따로 어떤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 갈 이유가 없었다.

잘 마무리되었고, 소요파 사정도 이미 서신을 통해 다 알게 된 마당이라…….

‘귀찮아.’

하등 쓸데없는 일일 뿐이다.

하지만 그리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크흠……. 가셔서 장문인께 제 대신 인사를 전해 주십시오. 사과도 하시고, 축하도 해주시고, 오실 땐 무극살부 부주를 데리고 오시면 됩니다. 물론 산 채로.”

“…….”

“그리고 그럴 리 없겠지만 만약 소요파에서 내주길 거부하면 그냥 알겠다고 하고 빈손으로 오십시오. 소요파가 무극살부 부주를 건네주지 않겠다는 뜻은 이전과는 다른 의미입니다. 소요파 내에서 험하게 굴리고 죽이겠다는 뜻일 터. 어쩌면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을 수도 있겠군요.”

해명이 아니라 그냥 지시였다.

천공단은 더 권해 보기로 했다.

“형님, 같이 가시죠. 목령자가 서운해할 텐데요.”

“그렇습니다. 서신 보셨잖습니까. 이름과 호칭 가리고 보면 스승에게 제자가 보내온 서신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지 않는지요.”

“맞아, 형아가 안 가면 그 할아버지는 울 거야.”

“하하하, 울긴 누가 울어. 멍청한 소천개야!”

후공은 고개를 저었다.

“크흠…… 이쯤 되니 어쩔 수 없이 제가 갈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해야겠군요.”

“……?”

“저는 거 뭐냐. 거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막타를 쳐버려서…… 가기 좀 그렇습니다.”

“…….”

“…….”

“…….”

“아…… 막타.”

금적자가 멍청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천공단은 이해한 듯하다.

그러다 이내 실실거리는 걸 보니,

이해하는 척해주고 있을 뿐이다.

눈치 빠른 놈들…….

‘후후, 괜찮은 놈들.’

**

소요파로 향하는 길.

“야, 일이 뭐 이렇게 마무리되냐. 소요파를 아작내는 게 아니라, 아예 장문인을 갈아치워버리냐고!”

끼워준 덕에 절벽 아래 그물 설치 때부터 내내 함께하게 된 낭인왕이 연신 탄성을 토했다.

항마삼협이 바로 시비를 털었다.

“뭐야? 당신 말할 줄 알았던 건가?”

“실어증이 금방 나았네?”

“있었어?”

낭인왕이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이것들이 아픈 데를 찌르는 것이다.

함께하긴 했어도 또 묻힐까 봐, 또 혹시 어떻게 될까 봐 천공단주 곁에서 찍소리도 못 내다가 비로소 입이 트인 터.

“너무 그러지들 마.”

“그냥 멸살단은 이쯤에서 좀 꺼지면 안 될까? 뭔데 쫄래쫄래 소요파까지 가려고 들어.”

“별호에 협 자 들어간 사람들이 쪼잔하게 이러기야? 천공단이나 멸살단이나 그게 그거잖아.”

“별호에 왕 자 붙이고 다니는 이들 중에 제대로 된 놈을 못 봐서 그래. 우리 얼마 전에 해적왕 만났거든.”

“해적왕?”

그랬냐며 낭인왕의 야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왕인데 회를 잘 떠. 형님이 다른 일 권해서 지금 해적왕은 가게 알아보러 다니지. 그런 의미에서 당신도 다른 일 알아보는 건 어때?”

“어, 안 그래도 알아보고 있어.”

왠일인지 낭인왕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뭔데?”

“천공단 들어가려고.”

“하하하하하, 뭔 개소리야. 지랄 났네.”

항마삼협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러면서 쏘아붙였다.

“당신, 천공단이 뭔지는 알고 떠드는 거야? 형님 호위대로 출발한 거야. 형님께 칼을 들이댄 놈이 천공단은 무슨.”

“그걸 모를까 봐? 그건 내가 잘못했지. 그래도 내가 겁도 없이 나댄 덕분에, 초반에 소요파에 나 죽였다고 팔고 다녔잖아. 묻혀 있는 동안 나름 기여한 거니까 나도 공로가 있어!”

“하하하, 그건 그래.”

“뭐야. 똑똑해졌네?”

다른 한편에선 설영이 남궁연과 이야기 중이었다.

그녀는 남장여인이었다가 이후 거지가 되었지만, 지금은 온전히 아름다운 여인으로 돌아와 있었다.

천산신녀도 이번 길에 동행하였는데, 그녀가 나선 이유라면 오직 하나. 제자에게 소요파를 견식시켜 주기 위함이었다.

“남궁 공자.”

“네.”

“제 눈이 이상한 걸까요?”

“……?”

“제 눈에는 이번 일의 결과에 대해 남궁 공자가 그다지 기뻐하지 않는 것 같은데, 맞나요? 좀 덤덤해 보인달까. 천공단도 다들 그래 보이고요?”

그녀로서는 솔직히 아직까지 이번 일이 꿈인가 싶을 정도여서 스승님께도 몇 번 물어봤을 정도였다. 어어어, 하다 보니 급기야 오늘은 소요파에 소풍 가듯 가는 식이 된 것이다. 거기에 무극살부 부주는 덤이고.

“그렇게 보였나요?”

남궁연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아닌가요?”

“네. 아닙니다. 사실은 둘 다입니다.”

“네?”

“굉장하게 생각하고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무덤덤하기도 하군요. 슬슬 저도 익숙해지나 봅니다.”

“익숙해지다니요?”

“처음엔 저도 놀랐는데, 두목 곁에서 계속 보다 보니…… 그런 것 있잖습니까. 이젠 뭐 그렇게 되겠구나 싶어지는. 후후, 그렇게 되는군요.”

“…….”

설영이 쪼르르 스승에게로 갔기에 남궁연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예상은 했지만 벗어나지 않았다. 언뜻언뜻 천공단에 들어가고 싶다는 말들이 나오고 있었다.

**

후공은 홀로 남았지만 괜찮았다.

색관조를 천화서고로 보내놓았지만 그럼에도 괜찮았다.

혼자여도 상관없었지만, 여유가 될 때면 진주언가의 가주와 그의 아들 언교운과 시간을 보냈다.

“가주, 주사위 내기 한판 어떻습니까?”

“주사위 내기라. 그거 재밌겠군요. 한데 대공자, 주사위를 가지고 다닐 정도로 좋아하는 겁니까?”

“아, 이건 강호에서 만난 친구가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래요?”

“네, 눈이 하나인 친구인데 아주 씩씩합니다.”

“허허…… 그렇습니까.”

주사위 승부는 연전연승.

후공에게 패배는 없었다.

그리고 그 밤.

“아버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말해 보거라.”

“이 소자, 천공단에서 들어갈까 합니다.”

“천공단?”

“네.”

“오호! 그거 좋은 생각이다. 그러고보니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는지 모르겠구나.”

진주언가의 아버지와 아들이 천공단 입단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을 무렵, 후공은 어두운 방 안에서 좌정 중이었다.

고요한 정적 속.

스르르릉.

방 안 어디선가 조용히 검이 뽑혀 간다.

후공은 당연하게도 알고 있었다.

이 검이 자신을 향해 짓쳐들 것도 알고 있었다.

또 그래주길 바랐다.

그 기대대로,

검이 짓쳐들었다.

어둠을 뚫고 오른팔을 향해 쏘아져 온다.

눈을 감은 채,

그저 오른손을 내민 순간.

척!

검의 손잡이가 손아귀에 들어왔다.

눈을 떠 검을 바라보았다.

절로 미소가 그려진다.

애검인 검령이다.

스스로 찾아왔기에 후공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검연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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