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이십여 년을 기다려.
“놀랐나 보구나. 괜찮다.”
후공은 창밖을 향해 나직히 말했다.
이내 색관조가 창으로 날아들어 후공 앞에 내려앉았다.
[까르르르. 주인님, 저는 정말 깜짝 놀랐어요!]
색관조는 창문으로 들어서려다 보았다.
탁자에 기대두었던 주인의 검이 갑자기 뽑혀 나와 주인에게 날아들었던 것이다. 혹시 나쁜 놈들이 나타났나 싶어 주춤했다. 근데 아니었나 보다.
그저 주인이 어떤 이유로 검을 끌어온 듯하였기에, 언제 놀랐냐 싶게 색관조는 앉은 자리에서 팔딱팔딱 뛰었다.
“그래, 다녀오느라 수고했다. 똑똑한 너이기에 말은 잘 전하였을 테지?”
[까르르르, 맞아요. 천화서고 할아버지가 걱정이 많았는데, 제가 이제 소요파는 잘 해결되었다고 안심시키고 기분도 풀어주었답니다.]
“기분을? 이런…… 넌 춤을 춘 것이로구나.”
[까르르르르르르르르. 주인님은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실까요? 저는요, 춤도 추고 노래도 불렀답니다. 그랬더니 아까까지 걱정하던 할아버지가 박수치고 난리가 났지 뭐겠어요. 까르르르르르르.]
그러면서 색관조가 바로 이 노래였다는 듯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기에, 후공은 그만 웃고 말았다.
“하하하, 넌 어찌된 게 날로 영특해지는구나.”
칭찬을 받은 색관조의 노랫소리가 더 신나졌다.
[까르르르르르르! 낮에는 파란 하늘, 새하얀 구름 아래 새들은 팔랑팔랑, 밤에는 달빛에 물든 노란 하늘! 까마귀가 깍깍. 낮도 좋아, 밤도 좋아! 구름 위에서 걸을까요, 까마귀를 타고 밤하늘을 날까요. 낮도 좋아, 밤도 좋아…….]
신나버린 색관조가 율동까지 곁들여 가면서 한참이나 노래를 이어갔다.
‘동요네. 어릴 때 듣고 자란 건가.’
까마귀는 왜 타고 나는 거냐.
아무렴 어떠한가.
후공이 흐뭇하게 바라보며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박자를 맞춰 가고 있으려니,
우우우웅.
검령이 울었다.
색관조가 그 반응이 기이했는지 노래를 뚝 그쳤다.
[주인님, 검이 소리를 냈어요.]
“그래, 네 노래가 듣기 좋았던 모양이다.”
색관조가 갸웃했다.
[쇳덩이가요?]
“이름이 있다. 검령이라고 한다.”
[검령, 검령!]
“앞으로는 너의 친구가 될 것이다. 방금 전 스스로 내게 찾아왔다.”
일명, 검연(劍連).
무형건곤심결의 기반 속, 검이 주인을 인지하고 스스로 움직인다. 철금회주가 검을 선물한 이래 ‘검령’이라 명명하고 내내 의식의 동화 속에 제련하였는데, 드디어 오늘 의식과의 연계가 시작되었다.
이는 비로소 영기를 지니게 된 것이며, 신검에서 신물로 들어서는 첫 단추를 꿰었다 할 수 있었다. 예상보다 빠르게 검연이 시작되었기에 후공은 내심 흡족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우와아, 스스로요? 전 주인님이 끌어오신 줄 알았어요.]
색관조도 안다.
옛 주인도 검을 끌어올 수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라니?
색관조는 놀라면서도 갸웃거렸다.
“그래, 하지만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다. 걸음마를 뗀 것이랄 수 있지. 그렇기에 지금은 그저 찾아오고 돌아갈 뿐이다.”
이전 생의 세 자루 애검도 시작은 동일했다.
번. 쾌. 친.
무림맹에 남겨진 애검들도 찾아오고 돌아감으로 검연의 시작을 알렸고, 그 후 영기를 더해가며 신물로 거듭났다. 녀석들은 믿을 만한 호위이자 수하라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검령의 찾아옴은 후공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수하가 생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하지만 색관조는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지 그 자리에서 폴딱폴딱 뛰기만 했다.
“네게 보여주마. 찾아왔으니 또한 돌아간다.”
검연의 시작은 찾아오고, 돌아감.
마음이 전해졌나 보다.
우우우우웅.
검령이 마치 준비되었다는 듯 반응을 보인다.
색관조는 폴짝폴짝 뛰어 옆으로 이동했다.
‘또 소리를 내네? 정말 혼자 돌아가?’
색관조는 의문은 띠었지만 의심은 아니었다.
도리어 기대되었다.
주인은 특별한 존재. 이루 말로 할 수 없다. 내려다보는 자이며 거대한 힘을 품고 있다. 그렇게 감각이 말해온다. 또한 이 세상에 없는 기분 좋은 향을 풍기는 분이다. 아무도 맡지 못할 테지만 색관조는 그 신비로운 향을 맡을 수 있었다.
주인이 검령을 양손으로 받쳐든다.
가슴께에 수평으로 놓인 검.
주인이 말한다.
“잘 보아라. 이제 돌아갈 것이다.”
꿀꺽.
이게 뭐라고 긴장되는 걸까.
색관조는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
주인이 검령을 앞쪽으로 살짝 띄워 던졌다.
주인님께 찾아왔고 이제 돌아간다.
검집으로.
신기해. 얼마나 빠를까. 어떻게 움직이는 걸까.
색관조가 그렇게 눈도 깜박이지 않고 바라볼 때, 허공으로 던져진 검령이 움직였다.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그리하여.
터엉, 텅, 터엉.....
방바닥에 나뒹굴었다.
‘널브러졌…….’
색관조는 눈이 커졌다가 얼른 주인의 표정을 살폈다.
주인님의 표정이,
‘……………….’
이런 식이었기에 색관조는 오른쪽 날개를 끌어와 황급히 입을 틀어 막았다. 주인님이 넋이 나가버리셨어. 어떡해…….
색관조가 본대로였다.
후공은 넋이 나가버렸다.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바닥에 내동댕이친 것이 아닌데, 그냥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찾아와 놓고…… 못 돌아간다고?’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번, 쾌, 친은 어느 하나 그런 적이 없었다.
찾아왔는데 왜 못 돌아간단 말인가.
의문 속에 검령을 노려보고 있자니,
‘응?’
아직 끝난 것이 아닌 모양이다.
그릉.
검이 바닥을 끌며 조금 움직였다.
[주, 주인님! 움직였어요!]
“…….”
색관조가 요란을 떨었다.
하지만 후공은 다시금,
‘……………….’
이렇게 되고 말았다.
그릉, 그르릉.
검령이 조금씩 기어가고 있는 것이다.
날아가질 않고.
모습이 마치 아기가 한 번 기었다가 엄마를 쳐다보고, 또 기었다가 엄마 쪽을 보며 웃었다가 또 기어가는 것 같았기에,
“너 지금 뭐하냐?”
후공은 말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었다.
주인의 말에,
그르릉 움직여 가던 검령이 멈췄다.
미동조차 없어졌다.
후공은 이어 호통을 터뜨렸다.
“뭐하는 놈인데 빛살처럼 날아들어 놓고 기어가는 것이냔 말이다! 당장 대답 안 하냐!”
곁에 있던 색관조의 동공이 흔들렸다.
주인님이 검을 꾸짖어버릴 줄은 몰랐기에 색관조는 부리를 앙다물었다. 부리에 힘을 꽉 주며 버텼다. 여기서 웃어버리면 망하는 것이다. 불똥이 자신에게 튈 수가 있었다.
주인님이 몸을 일으킨다.
바닥에 널브러진 검령에게 다가가 한참을 내려다보시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신다.
그러다,
“후우…… 답답하니 조금 걸어야겠다. 가자.”
[넵, 주인님.]
창을 훌쩍 뛰어넘는 주인의 뒤를 색관조가 따랐다.
...그리고 잠시 후.
그릉.
방 안에 혼자 남겨진 검령이 조금씩 움직였다.
그릉, 그릉, 그르릉.
열심히 기었다.
그러다 힘들었나 보다.
더 움직이는 건 무리여서,
우우우우우우우웅.
울었다.
**
그날 이후, 사흘이 지났다.
검령은 반응이 없었다.
후공은 서두르지 않았다. 서두른다고 될 일도 아니며, 시작이 느리다 하여 언제까지나 느릴 것이라 단정할 순 없다.
대기만성이란 말이 괜히 있겠는가.
기다리는 가운데 후공은 연공에 몰두했다. 검연이 시작되었기에 주로 검연에 몰두했지만, 천향의 공법도 쉬지 않았다.
어느덧 천향삼주는 중기를 넘어 후기로 접어든 시점.
천향의 추적 거리는 백여 장이 늘어 오백여 장에 이르렀다. 색관조도 인식했고, 서로 간의 규칙도 당연히 오백여 장에서 이뤄지는 것으로 바뀌었다. 더불어 향의 발산 범위가 더욱 광범위해졌기에 그 쓰임새도 커졌다.
긴 호흡과 함께 운기를 마쳤다.
창가로 가 밤의 정취를 눈에 담았다.
‘난화서원은 답을 찾았으려나.’
독양충의 양분인 풍열이 그랬던 것처럼, 육각망과 영악초의 양분은 삼악을 비약적으로 북돋게 할 수 있다. 경지의 상승은 물론이고 천향도 삼주에서 사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묵영이 찾았으면 좋겠구나.’
이내 의식을 퍼뜨렸고, 확장해갔다.
밤의 소리가 들려왔다.
풀벌레 소리가 커지고, 사삭사삭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려 간다.
그리고,
“도통 틈이 안 나는구나. 대공자가 요즘은 주사위도 안 하고.”
“네, 아버지. 그래서 걱정입니다.”
언가주와 그의 아들 언교운의 음성이 한숨처럼 흘러나온다.
[언 형, 내가 주인님께 이야기드려 볼까?]
“그건 아닌 것 같아. 내가 직접 청해야지.”
[듣고 보니 그렇네.]
색관조가 함께였다.
후공은 피식 웃고 말았다.
연공 중이라 색관조가 자리를 피한 것까진 알겠는데, 언가주와 그의 아들 곁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양새가 자연스럽기 그지 없었다.
“이미 천룡대전에서 느꼈던 바이나, 이번 소요파의 일로 대공자의 존재감은 더욱 커졌다. 그의 영향력도 이제 약왕문, 천룡의 가문들, 그리고 안휘 북부의 명문가들에 이어 하오문과 소요파, 심지어 천산신녀까지 호의를 지니고 있으니 그가 향후 어떤 존재가 될지 가늠이 안 되는구나. 그러니 넌 떠나기 전에 반드시 천공단에 들 수 있도록 청하여 보거라.”
“네, 아버지.”
[근데 주인님이 최근 내 친구 때문에 속상해하셔서 큰일이네.]
“네 친구가 있어?”
[어……. 그런 녀석이 있어. 비밀이야.]
“뭐야? 궁금하게 해놓고..”
[비밀이야, 비밀이야! 까르르르르르르르.]
후공은 의식을 확장했다.
더 먼 곳의 목소리가 옅게 들려왔다.
*“장문인께선 긴장되나 보군요.”
“허허, 그리 보였습니까?”
천산신녀의 말에 목령자가 너털거렸다.
“아닌가요?”
“잘 보셨습니다. 절벽에서 날 던져버린 사람을 이제 곧 만난다니 기분이 묘해지는군요.”
“대공자도 장문인을 보면 아마 깜짝 놀랄 겁니다. 직접 찾아오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하고 있을 테니까요.”
돌아오는 길에는 목령자와 화령자가 함께 했다.
둘은 대공자가 오지 않으니 직접 찾아가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고 하였다.
- 은앙개야.
- 네.
- 넌 형님이 놀라실 것 같냐?
항마삼협 중 이열의 전음에 은앙개가 히죽 웃었다.
- 두목이요? 아시잖아요. 그런 사람 아닌 거.
- 내 말이. 이걸로 천공단에 내기나 걸어야겠다.
- 우리 두 사람은 일단 아니다 쪽이고…….
진주언가에 거의 다다라 가는 중 천공단 사이로 전음이 바삐 오갔다. 내기는 성립되지 않았다. 어느 한 사람도 놀라긴 뭘 놀라냐는 반응을 보인 탓이었다.
심지어 낭인왕조차 코웃음쳤다.
- 천공단주가? 개 풀뜯어먹는 소리는. 내가 최근에 묻혀본 사람이자, 절벽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분명 천공단주는 목령자를 보고도 무덤덤, 혹은 시큰둥이야.
지켜본 바가 있다.
묻혀본 바가 있다.
모두가 천공단주가 놀라는 일 따위는 없다고 장담했다.
*예상대로였다.
천공단주는 태평히 걸어나왔다.
진주언가 가주와 가솔들이며 누구 할 것 없이 맞으러 나온 가운데, 천공단주는 무심히 걸어와 목령자 앞에 이르렀다.
천공단은 내심 피식 웃었다.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그럼 그렇지……. 놀라기는 누가……?’
그러다 놀라버렸다.
그건 천공단뿐 아니라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이게 뭔가 싶은 광경이 펼쳐졌기에 모두는 입을 쩍 벌리고 다물지 못했다.
“소요파 14대 장문인 목령자가 천화서고 대공자께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천공단주 앞에서 목령자가 넙죽 엎드려 이마를 땅에 대고 절을 올린 것이다. 장문인이 예를 갖추니, 그 뒤쪽에 있던 화령자도 함께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여간다.
‘뭐여?’
누구도 예상 못했기에 모두가 말을 잃었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쩌면 이런 뜻일지도 모른다.
원수를 찾게 해주어 고맙노라,
자신을 깨우쳐주어 고맙노라,
소요파가 원래의 길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어 고맙노라 말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또 이제 무릎을 꿇는 일 같은 건 마음이 가는 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 어쩌면 그런 뜻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후공에겐 다른 의미였다.
기다렸던 모습이었다. 그래서 미소를 짓고 말았다.
‘이제야 겨우 보는구나. 이십여 년 전 내가 너에게 바라던 모습.’
그 당시, 원래 목령자가 온다면 소요환을 차고 장문인으로서 머리를 조아릴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때 들었어야 할 말을 이제야 듣는다.
‘소요가 비로소 널 얻었구나.’
후공의 미소는 짙어졌다.
목령자가 고개를 들어 바라본다.
후공도 바라봤다.
그래, 이십 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후공은 손을 내밀었다.
‘영광입니다. 후공!’
목령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였기에,
후공도 응답해 주었다.
“영광입니다. 소요파 장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