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천하를 손에 거머쥘 사람.
그로부터 이틀 뒤,
일행은 무극살부 본거지에 도착했다.
거의 폐허였다. 부서진 전각들이며 지붕이 날아간 건물들이, 이곳에서 치열한 격전이 펼쳐졌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하하, 다시는 안 오게 될 줄 알았는데 내가 여길 또 와보는구나.”
낭인왕이 감회를 늘어놓았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길잡이는 낭인왕이었다. 낭인왕이 있었기에 후공으로서도 애초부터 무극살부 부주를 살려둘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부주의 거처는?”
“네, 저쪽 건물입니다.”
후공이 물었고, 낭인왕이 답했다.
모두가 우르르 부주의 침소로 들어섰다.
방은 넓었다.
그리고 난장판이었다.
멸살단이 점령하면서 쓸 만한 물건이 없는지 이미 찾아본 모습이었고, 그래서인지 제대로 된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지하의 비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두꺼운 청석판이 바둑판처럼 깔린 바닥은 별다른 손상이 없었다.
바닥 밑 지하 비고.
부주는 기관장치로 바닥을 열 수 있다고 했다.
- ……청석판 밑에 지하 통로를 따라 비고를 만들어두었습니다. 그런 곳이 있다는 건 이 세상 누구도 모르는 저만의 비밀입니다. 또한 기관장치로 열 수 있기에, 제가 직접 가서 열어야 합니다.
‘하지만 거짓말이다.’
후공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알았다.
비고는 있겠지만, 기관장치는 없다.
장치를 통해 돌바닥을 열려면 소음은 필수적으로 따라오게 마련. 이 세상 모두에게 알리기에 좋은 방법일 뿐이다. 그러므로 기관장치는 없다.
이미 말해둔 터.
무산쌍웅이 움직였다.
바닥을 쿵쿵 디뎌 가며 안쪽이 비어있는 지점을 파악해갔다. 소리의 울림이 달랐기에 바로 찾아냈다.
“형님, 여기입니다.”
후공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무산쌍웅이 그 지점의 청석판에 장심을 대고 흡착해 들어올렸다가 한쪽에 내려놓았다.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드러난 공간 아래로 지하계단이 나타났다.
다들 또 우르르 움직였다.
계단은 깊어 이내 암흑과 같아졌다.
하지만 시야에 어려움을 겪는 이는 없었다.
한 사람만 빼고.
“루주, 내 손 놓치면 끝이야. 죽을지도 몰라.”
“낭인왕, 당신이 손을 너무 꽉 잡아서 당장 죽을 것 같소만!”
“아, 그런가?”
“알면서 그런가는, 시발놈…….”
“하하하하!”
경지가 얕아 더듬대는 하오문 루주는 낭인왕이 챙겼다. 무덤에서 나올 때며 절벽 아래에서 기다릴 때 함께한 탓인지, 둘은 투닥투닥 제법 친근했다.
도대체 얼마나 깊이 판 건가.
너무 깊어, 이 정도면 살수가 아니라 두더지였나 싶은 생각이 들 때쯤 계단이 끝이 났다.
통로가 잠깐 나왔고, 이내 마주한 건 석벽.
비고는 이 너머다.
“단주, 부술까?”
“형님, 저희가 박살내겠습니다.”
금적자와 항마삼협이 앞다퉈 말했다.
후공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넣어두십시오.”
이곳이 마지막 관문일 터.
그렇다는 건 최소한의 대비는 해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자칫 외력에 의해 붕괴가 되도록 설계되었다면, 죽진 않더라도 깊이가 깊이인 만큼 고생길이 열릴 수 있었다.
“이 둘 중에 하나겠군요.”
“그런 듯하오.”
천산신녀와 목령자가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석벽 우측에 튀어나온 두 개의 벽돌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후공도 이미 보았다.
위쪽의 벽돌과 아래쪽의 벽돌.
나오고 들어가게끔 둘 다 틈이 있었다.
위쪽의 벽돌은 사람의 손때가 탄 듯 매끄러웠고, 아래쪽의 벽돌은 거칠다. 밀어야 한다면 위쪽 벽돌일 것이다. 부주가 매만진 손때의 흔적일 것이므로 당연했다.
하지만 그리 단순할까?
후공은 자령안을 극대화했다. 두 벽돌의 마모도와 미세 균열, 거기에 표면의 질감과 흔적까지 들여다봤다.
그러곤 바로 아래쪽 벽돌을 밀었다.
“어?”
예상 외의 선택에 천산신녀와 목령자가 동시에 탄성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 탄성은 이내 어감이 달라졌다.
“어……?”
그르르르르릉, 석벽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천산신녀가 헛웃음을 지었다.
“대공자, 어떻게 된 거죠? 혹시 전에 이곳에 와 본 건가요?”
그렇게 생각할 만했다. 단 두 개의 선택지에 불과하지만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녀 혼자였다면 한참 동안 갈등했을 터였다.
“여러 번 와 봤습니다.”
후공은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주었다.
물론 진실은 돌의 질감에 있었다. 자령안에 드러난 위쪽 벽돌의 마모는 인위적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이었고, 도리어 아래쪽 벽돌에는 반복되는 지문이 엉켜있었다. 그것이 무극살부 부주의 지문이란 건 생각하나마나였다.
“하하, 그대는 정말 알면 알수록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군요.”
천산신녀가 고개를 절레거렸다.
그건 목령자와 화령자도 마찬가지였다.
- 천공단주는 정녕 사람이 거침이 없구나.
- 동감입니다. 일의 진행에 망설임이 없고, 결과까지 내니 천재 중의 천재라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닌 듯합니다.
- 난 천재라기보단 강호의 전대고수를 보는 듯하다.
자신을 깨우친 일뿐만 아니라 천공단을 아우르는 것, 그리고 오는 과정에서 부주를 처리하고, 진주언가의 후계에게 자연스럽게 가르치는 상황까지 아무렇지 않게 해내니 보면 볼수록 놀라워지는 목령자였다.
- 네, 저도 후공 이래 이렇게 감탄하게 되는 사람은 천화서고 대공자가 처음입니다.
- 후공?
목령자가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며 전음을 이었다.
- 후후, 넌 너무 나간 것 같구나.
그 전음에 화령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 네, 물론 외모는 후공이 더 낫습니다.
“하하하하하!”
생각지도 못한 말에 터져버린 목령자가 전음도 잊고 소리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웃음은 동시에 터져나온 탄성 소리에 묻혔다.
“와아아아아!”
“우와아아~~ 진짜였어!”
“으아아아아악!”
석벽이 열리고 비고가 드러난 것이다.
“이게 말이 돼? 이거 꿈 아니지?”
“무극살부 부주, 완전 미친 새끼였네! 도대체 사람을 몇이나 죽인 거야.”
“허어…… 살다 살다 내가 이런 광경을 다 보는구나.”
“스, 스승님. 이제 어떡해요?”
“하하하!”
천장의 야명주가 빛을 발하는 가운데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금전이 수북이 쌓여 있었으며, 금궤 상자도 수십 개였고, 심지어 넘쳐나 바닥을 구르고 있기도 했다.
거기에 수려한 그림들과 윤기가 도는 도자기도 한두 개가 아니었기에 탄성은 그칠 줄을 몰랐다. 정녕 보물 비고였기에, 심지어 설영의 경우는 이걸로 다툼이 일면 어쩌나 싶어 겁을 먹을 정도였다.
*모든 재화는 지상으로 옮겨졌다.
후공은 골고루 분배하여 보따리로 나누어 담게 했다.
그 와중 난색을 표하는 이들이 여럿이었다.
“대공자, 내 몫은 받지 않겠네. 내가 한 것이라곤 좋은 구경과 좋은 친구를 만나게 된 것뿐인데, 내게 어찌 이러는가.”
먼저 말한 건 산동악가 가주였다.
후공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가주께선 재밌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무슨 뜻인가?”
“누가 보면 제가 천화서고의 재물을 나눠드리는 줄 알겠습니다.”
“물론 그건 아니긴 하네만…….”
“어려운 일을 함께하였는데 어찌 좋은 일을 나누지 않으려 하십니까. 받지 않으시면 향후 제가 어찌 또 마음 편히 도움을 청할 수 있을까요. 앞으로도 도움의 손길을 청할 것이기에 그 몫까지 미리 받는 것이라 생각해주십시오.”
그리 말하니 악가주도 어쩔 수 없었다.
더 거절하는 것도 좋은 모습이 아니었기에 너털거리며 수긍했다.
“그리하겠네. 고맙네.”
이어 소요파 장문인 목령자와 천산신녀가 거절의사를 밝혔지만 후공은 마찬가지로 강권하여 받게 했다.
사람이 보물이다.
후공은 그리 생각했고,
그런 의미에서 이는 보물이 보물을 받는 것이었다.
거절이 아니라 당혹을 금치 못한 이도 있었다.
대운루 루주였다.
그로선 하오문주의 지시에 따라 하오문이 맞은 새로운 친구에게 몇 가지 작은 일을 해줬을 뿐인데 돌아온 보답이 엄청난 탓에 몸이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천공단주, 이 많은 걸 정녕 하오문에 준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말이네. 이걸 가지고 내가 도망칠 것이라는 생각은 안 하느냐일세.”
루주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하하, 그러면 또 어떻습니까? 편한 대로 하십시오.”
“응?”
“도움을 받은 것이 크니 루주가 가져도 됩니다. 하지만 가져가려거든 일부는 하오문에 넘겨주고 가십시오. 저나 천공단이야 쫓지 않겠지만, 루주가 평생 하오문에 쫓겨다닐 일이 걱정됩니다.”
“으하하하, 현명한 말이네.”
물론 루주도 탐욕을 부려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진심이냐고 묻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오문을 이렇게까지 대접한 사람은 처음이었으니까. 한데 돌아온 대답이 초연하기 이를 데 없어, 그저 나오느니 웃음이었다.
그 외 남은 재화는 두 부류였다.
하나는 은하전장으로 보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천공단의 몫이었다. 주양이 쏟아부은 돈이 적지 않았기에 은하전장으로 일정 몫을 보내는 것이 도리였다.
후공은 바로 지시를 내렸다.
“삼협께서 수고해주셨으면 합니다. 은하전장에 다녀오십시오. 은하전장이 산처럼 돈이 많다고 하나,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혹시라도 은하전장이 받지 않겠다는 식이면 그냥 알아서 하라고 던져 놓고 오시면 됩니다.”
“네, 형님.”
항마삼협이 바로 머리를 숙였다.
그다음 후공은 낭인왕을 불렀다.
“말씀하십시오, 형님.”
“낭인왕께선 루주의 호위를 맡아주십시오. 가는 길에 혹여 잃거나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살펴주십시오.”
“그리하겠습니다. 염려 놓으십시오.”
이어 시선을 돌렸다.
“금적선생.”
“말하게, 단주.”
“천공단의 인원이 늘었으니, 아무래도 천공단만의 거점을 마련했으면 합니다.”
“오호! 단주, 그거 좋은 생각일세!”
금적자가 화색을 발했다.
그건 천공단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형아, 그거 멋지다!”
“우린 거지인데 집이 생기는 거여?”
거지들이 제일 좋아했다.
후공이 말을 이었다.
“섬서의 남단 안강이면 좋겠습니다. 외곽 쪽에 쓸 만한 저택을 알아보시고 구입하십시오. 남은 돈은 크고 믿을 만한 전장에 맡겨두시고, 천공단의 자금으로 활용하면 되겠습니다.”
“허허, 그리하겠네.”
후공은 여태 거론하지 않은 이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쌍웅과 은앙개, 소천개, 그리고 남궁 형, 언 형께서도 금적선생과 동행하십시오.”
“네, 형님.”
“네, 두목.”
“어, 형아.”
모두가 답하며 방향이 매듭지어졌다.
“항마삼협과 낭인왕께서도 일을 마치거든 안강으로 가시고, 저는 천화서고로 돌아갑니다. 색관조를 보내 상황을 파악하고 향후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이윽고 작별의 인사가 오갔다.
짧지만 뜻깊고 오래된 것 같은 만남이었기에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컸다. 목령자와 화령자가 그랬고, 산동악가주가 다음을 기약하며 웃었다.
대운루 루주는 거의 허리를 접다시피 고개를 숙였다.
쟁쟁한 강호의 인물들 속에서 동등한 대접을 해주는 천공단주에게 그는 진심으로 감복했다.
*낭인왕과 함께 돌아가는 길.
루주가 물었다.
“낭인왕, 개처럼 짖었다는 것이 사실이오?”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짖었다던데?”
“……맞아.”
짐짓 시무룩하니 답하자, 루주가 껄껄 웃었다.
이내 낭인왕도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싱글벙글 웃었다.
루주가 물었다.
“천공단주는 알다가도 모르겠소.”
“뭐가?”
“자신이 다 가져도 되는 것이었잖소.”
“그럴 필요가 없어서지.”
“그럴 필요가 없다?”
“그는 천하를 손에 거머쥘 사람이니까.”
“…….”
멍해진 루주를 보며 낭인왕이 웃었다.
“하찮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