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흑의도 잘 어울린다.
천화서고로 향하는 길.
후공은 혼자였지만, 또 혼자가 아니었다.
쏘아져가는 신형 위로 색관조가 형형색색 깃털색을 바꿔가며 함께하고 있다.
[주인님, 보셨을까요? 저 방금 엄청 빠르게 일곱 번 색을 바꾸었어요.]
“난 열 번인 줄.”
[까르르르르르르르, 주인님은 웃겨!]
색관조가 좋다고 웃었다.
후공도 색관조가 있어서 좋았다.
왜 사람들이 애완동물을 키우는지 몰랐는데, 영물과 인연이 닿아 함께하고 보니 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인연이 묘하다.’
새초롬하던 색관조와의 만남이 그렇고, 목령자를 다시 보게 된 것도 묘했다. 그리고…….
지나온 길이 하나둘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환혼 이후 많은 일들이 있었다.
천공단과 처음 조우했을 때며 약왕문의 두 토끼들, 천룡대전 때 매일 밤 남궁연과 달리던 순간들, 귀오령의 눈물, 어엿한 아가씨가 된 소예와 나란히 걷던 시간, 그리고 하오문과 소요파까지.
순간순간 당시에는 유람하듯 지나온 것 같았는데, 하나씩 돌이켜보니 바쁘게 지나왔다. 그 속에서 과거의 인연을 만났고, 새로운 인연도 맺었으니 의미 깊었다.
또한 시간이 빠르다.
어느샌가 환혼 후 8개월여.
환혼은 내게 어떤 의미인가?
환혼은 왜 이루어진 것인가?
의미는 축복으로 여기면 되는 일.
축복이 되도록 만들어 가면 되는 일.
하지만 왜 이루어졌는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언제쯤 알 수 있을까.
과거보다 더 나아가 보면 알 수 있을까?
끝이라고 생각했던 경지, 그 너머로 가게 되면 어쩌면 ‘환혼’의 비밀도 알 수 있지 않을까.
본래의 경지까지 2년 정도.
운이 따라준다면 그리될 가능성도 있다.
‘그보다 당겨졌으면 좋겠다.’
당연하게도 후공은 그리 소망했다.
*천화서고에 도착했다.
천화서고는 활기찼고, 기묘한 열기로 넘실거렸다.
두 아우부터가 뜨거웠다.
“형님, 이런 식이면 우리 가문이 천하제일가로 우뚝 설 날도 머지않았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윤이 의기양양 외쳤고,
“큰형님! 소요파가 물러나면서 자신들이 무례했다면서 정중히 머리를 숙이는데, 이 아우는 그 광경이 어찌나 뿌듯하던지요. 이놈들이 천화서고 무서운 줄 드디어 아는구나, 우리가 그렇게 대단하구나 싶어 감격에 겨운 나머지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였습니다.”
부몽도 난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다른 이들도 비슷했다.
거대문파인 소요파의 위협을 극복해낸 것이 내면의 자신감을 끌어올리고 자긍심을 불러일으킨 모습이었다. 서문세가와 맞서 승리를 쟁취했을 때보다 기세가 더 올라있었다.
하지만,
“크흠…….”
후공은 침음성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웃긴 놈들인 것이다.
한 것이라곤 진법의 보호를 받으며 안에 틀어박혀 구경만 하고 있었던 놈들이, 어째서 이렇게 기세등등한 것인가.
물론 이해는 된다.
원래가 초식동물 같은 천화서고가 아니던가. 맹수와 같은 거대 문파와 맞섰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찰 만하다.
그래도 사실관계는 확실히 해두어야 했다.
“크흠…… 이놈들! 이게 다 누구 덕인지는 잊지 않고 있을 테지?”
“물론 형님 덕분입니다.”
“그럼요, 큰 형님 덕분이고말고요.”
“그래, 알긴 하는구나. 난 또 모르는 줄 알았다. 내가 여태까지 죽을 둥 살 둥 빌빌거리고 있었어 봐라. 이런 날을 맞이하는 건 어림도 없다.”
“하하하하!”
“으하하, 백번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윤과 부몽이 배를 잡고 웃었다.
*후공은 당도한 날 하루를 쉬고, 다음 날부터는 주변 명망가에 인사를 다녔다. 그들은 안휘 북부 연맹으로서 소요파의 위협에 득달같이 대응하여 주었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하루는 대륙전장을 시작으로 다음 날은 철금회. 그렇게 염화각, 백화장, 서문세가 등을 찾았고, 마지막으로는 청월문 문주 반광과 마주하였다.
반광은 여전히 호탕했고, 웃음소리도 그대로였다.
“대공자,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감사가 웬 말인가.”
“고생스러운 일을 문주께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 말씀해주시니, 더욱 감사할 따름입니다.”
“퀄퀄퀄, 자네의 언변은 언제나 듣기 좋군. 그나저나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네.”
“편히 말씀하십시오.”
“혹시 만나고 있는 여인은 있는가?”
“…….”
“없다면 내가 참한 여인을 소개해주고 싶네만. 퀄퀄퀄.”
그 참한 여인이 자신의 딸인 반교은을 말하는 것은 물어보나마나이기에, 후공은 웃음으로 정중히 사양했다.
“뿌르뿌르뿌.”
“퀄퀄퀄, 자네 아직까지 이상하게 웃고 다니는 것인가?”
“뿌르뿌.”
후공은 다시 작은 소리로 웃어주었다.
“퀄퀄퀄~ 퀄퀄퀄퀄!”
*그렇게 돌아가는 길.
후공이 송화와 담소를 나누며 번화가를 느긋하게 걸어가고 있을 때, 그 위쪽 객잔의 3층 창가에서 한 사람의 손길이 아래쪽을 가리켰다.
- 저자입니다.
- 여인과 걷고 있는?
- 네, 저자가 천화서고 대공자입니다.
확신에 찬 전음은 오구문의 목궁이었다.
목궁은 서문세가에서 열렸던 연회에서 천화서고 대공자로부터 ‘개 한 마리’라는 식으로 불리며 수모를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 고맙네.
-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청의 중년인을 향해 겸양한 목궁이 은근한 어조로 전음을 이었다.
- 한데 호열자께선 저자를 왜 찾으시는 겁니까?
호열자를 바라보는 목궁의 표정에는 기대감이 한껏 떠올라 있었다. 오구문 문주인 아버지와 인연이 있었는지, 호열자는 오늘 아침 천화서고 대공자를 찾는다며 도움을 청해왔던 터.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호열자는 무서운 자라 하였고, 당신이 그와 상대한다면 이십여 초도 버티기 어려울 것이란 말씀도 덧붙였었다.
그런 자가 천화서고 대공자를 찾고 있다.
예로부터 선자불래(善者不來), 내자불선(來者不善)이라 하였다.
좋은 뜻을 가진 사람은 쉽게 찾아오지 않으며, 제 발로 찾아온 이가 좋은 뜻을 지니는 경우는 드물다.
그렇기에 목궁은 호열자가 천화서고 대공자에게 좋은 감정이 없을 것이라 여겼고, 또 그러길 바라기도 했다.
호열자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 모습에 목궁도 따라 웃었다. 이내 귓가로 호열자의 전음이 들려왔다.
- 너 따위가 관심 가질 일이 아니다.
- …….
**
후공은 산의 초입에서 멈췄다.
“송화야.”
“네, 공자님.”
“너 먼저 들어가거라. 난 갑자기 만나야 할 사람이 생겨, 이야기를 나누고 들어가야겠다.”
“갑자기요?”
“그래.”
송화는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수긍했다. 갑자기든 별안간이든 뭐가 됐든지간에 예전의 주인님이 아니시다. 지나 보면 뜻이 깃들어있음을 알게 되니, 그대로 따랐다.
“네, 공자님.”
예를 표하고 돌아서는 송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후공은 하늘을 잠깐 올려다보았다. 그런 다음에야 왔던 길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번화가까지 간 건 아니었다.
변두리 외곽의 허름한 주루로 들어섰다.
손님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어이쿠, 젊고 잘생긴 손님이 오셨구만. 그래, 뭘로 드릴까?”
주인 노파가 반겼다.
“술과 간단한 안주로 부탁합니다.”
“에이~ 간단히 먹어서야 쓰나.”
“그럼 푸짐히. 동행이 올 것이니 잔은 두 개를 준비해 주십시오.”
“네네.”
그 대화를 바깥에서 호열자가 들었다.
그가 피식 웃었다.
천화서고 대공자가 이미 자신을 파악하고 있었다 싶으니, 내심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생각보다 뛰어난 자로군.’
동행이 누구를 뜻하는지는 묻지 않아도 뻔하다.
노파에게 말하고 있는 동시에 천화서고 대공자는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자리 잡아두었으니 적당히 하고 들어오라고.
호열자는 들어가 맞은편에 앉았다.
대화는 없었다.
술과 술잔이 나왔다. 후공은 병을 들어 호열자의 잔을 채워준 다음 내려놓았고, 뒤를 이어 호열자가 똑같이 술을 따랐다. 목소리가 흘러나온 건 함께 잔을 비운 뒤였다.
“들어보죠. 뭘 도와드리면 됩니까?”
“하하하하하!”
호열자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후공은 뚱해져 얼굴을 쓰다듬었다.
침 튀었다.
“천재와 마주하니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이리 편하구만.”
시답잖아서 후공은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살기를 띠었다면 대접이 달랐겠지만, 이놈은 용건이 있음이다. 그것도 ‘천재’를 찾아왔으니 해결해야 할 난제가 있으리라 짐작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난 상월자라고 하네. 바로 용건으로 들어가지. 실은 우리 쪽에서 풀어야 할 암호 문서를 자네에게 의뢰하려 함이네. 대가는 원하는 대로 들어줄 의양이 있네.”
“원하는 대로라면?”
“돈이면 돈, 명성이면 명성. 무공을 원한다면 절기를 전수해 줄 수도 있네.”
“놀랍군요.”
후공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절기라니? 누구라도 혹할 만한 제안이다. 하지만 강호에 그런 파격은 없다. 이는 그저 일이 끝나면 죽임을 당한다는 뜻이다.
문서가 중요할수록, 값어치가 클수록,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은 적어야 하기에 죽이게 된다.
그렇기에 도리어 후공은 호기심이 생겼다.
“자넨 뭘 원하나?”
“돈이면 됩니다.”
“하하, 뜻밖이로군. 뭐 문제될 건 없네.”
“하지만 결정하기 전에 몇 가지 답을 들어야겠습니다.”
“말하게.”
“문서 해독은 어디서 하게 되는지, 이동해야 한다면 어디로 가게 되는지, 암호 문서의 출처는 어떻게 되고, 또 상월자께서 말씀하신 ‘우리 쪽’이란 누구누구를 뜻하는 것인지 듣고 싶군요.”
호열자가 껄껄 웃었다.
“당연한 물음이네. 대답해 주지. 호북 남단으로 가게 될 걸세. 우리 쪽이란, 일원존자를 따르는 이들을 일컬음이지. 힘있는 이들이 대부분이네. 또한 일원존자께선 광명정대하시며 현 강호에서 적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높은 무위를 지닌 분이라네. 아마 들어보지는 못하였을 것이네. 일원께서 은거하신 기간이 길었기 때문일세.”
거짓말이다.
모두 거짓말이다. 애초 대화의 성립 차원에서 물은 것일 뿐 기대하고 물은 것이 아니었기에, 후공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자칭 상월자의 말이 이어졌다.
“출처는 우연히 얻어 불분명하니 따로 언급할 말이 없군. 하지만 자네의 신변 문제는 염려 말게. 내가 책임지고 보장할 테니.”
“믿음이 갑니다.”
“하하! 자넨 사람 볼 줄 아는군.”
좋다고 웃는 놈을 향해 후공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모자란 놈이다.
그것도 많이 모자란 놈.
하지만 태를 낼 순 없는 노릇.
이놈은 그저 안내자에 불과할 뿐이다.
“하루 정도 생각할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당연한 일이네.”
“가부가 어떠하든 내일 정오 화선루에서 뵙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기다리지.”
그러면서 호열자가 품에서 금덩이를 꺼내 내려놓았다.
금으로 만든 술잔이었다.
“이건 기쁜 마음에 주는 선물이네.”
“제안을 거절할 수도 있습니다만…….”
“상관없네. 받아두게.”
“그럼.”
주루에서 나온 호열자는 저만치 멀어져가는 천화서고 대공자를 바라봤다. 그의 입가에 천천히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일 정오라……. 후후, 거절해도 넌 가야만 한다. 천화서고 대공자.’
그가 몸을 돌려 신형을 날렸다.
색관조가 호열자를 추적했다.
*그 밤.
후공은 옷을 바꿔 입었다.
흑의를 걸쳤는데, 잘 어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