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나는 악몽이요, 죽음.
처음이었다.
장담컨대 처음이었다.
호열자는 최근 처음이 많았다.
목이 돌아간 채로 신법을 펼쳐 달린 것도 처음이었고, 앞을 보고 다니라는 소리를 듣는 것도 처음이었으며, 그리고 지금처럼 강호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것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하아……. 내 생애 이렇게 큰 인기를 누리게 될 줄이야.’
심지어 밤도 깊었거늘.
자신을 만나기 위해 모여든 이백여 명에 육박하는 강호인들을 둘러보며, 호열자는 변모한 자신의 위상을 실감했다.
그래서 울고 싶어졌다.
바라보는 눈동자마다 반짝반짝, 어찌 저리도 눈빛이 초롱초롱한 건지 모를 일이다. 눈에 불을 켜고 있다는 표현은 저런 눈들을 가리켜 하는 말일 테지.
쫓기는 상황은 운주에 발을 딛기도 전에 시작되었다.
- 호열자다!
- 목이 왜 저래? 호열자 맞아?
- 틀림없어! 이런, 공청석유가 뛴다. 잡아야 해!
호열자라는 원래의 별호 대신 새로운 칭호 ‘공청석유’가 부여되었다. 그렇게 시작되었고, 추격하는 이들이 하나둘 늘어가더니 어느새 이백여 명.
아는 얼굴도 있었지만 모르는 놈들이 태반이었다. 그리고 아는 놈들 중에서는 자신보다 수준 낮은 이들도 많았다. 평소라면 눈도 마주치지 못할 놈들이 공청석유에 눈이 뒤집혀 쫓아온 터라, 호열자로선 속에서 천불이 터졌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스스로 참은 건 아니었다.
그냥 참게 되었다.
이백여 명 중에는 아득히 높은 경지를 지닌 이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들에 의해 이미 마혈이 점혈당한 터.
그들은 마승(魔僧), 염라수(閻羅手) 그리고 호북사흉(湖北四凶)으로 목이 똑바로 된 상태라 해도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이들이었고, 없던 참을성도 만들어내는 존재들이었다.
무림맹주 후공이 살아있을 때는 종적조차 찾을 수 없어 죽은 줄 알았던 흉악한 놈들이 어찌된 일인지 버젓이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상황.
“나무관세음보살……. 염라수, 호북사흉! 우리들끼리 굳이 이 자리에서 싸울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선 동맹을 맺고 공청석유를 확보한 뒤, 그 앞에서 마지막 일전을 벌이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커다란 체구에 붉은 가사를 두른 마승이 자비로운 미소를 지으며 제안했는데, 지켜보는 이백여 명 따윈 아예 안중에도 없다는 식이었다.
“하하하, 마승! 나 염라수는 진작부터 그리 생각하였소.”
“후후, 우리 호북사흉도 마승의 말에 적극 동감하는 바이오. 성숙노괴도 잡아야 하고, 그 뒤 북교산에서 우리가 상대할 이들은 무시 못 할 인물들일 테니 지금부터 서로 믿고 의지하도록 합시다.”
“나무관세음보살. 좋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우리는 동맹이오.”
“하하하하하!”
“으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원래 이들은 ‘호열자’ 쟁탈전을 벌이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마승의 제안을 수락하면서 염라수, 그리고 사흉이 함께 웃음을 터뜨리니, 이 웃음소리가 동맹의 서약을 대신했다.
하지만,
- 지금.
- 아미타불.
통쾌한 웃음 아래 두 사람의 전음이 급히 오갔다.
호북사흉은 미처 방비하지 못했고, 보지도 못했다.
마승의 손목에 휘감긴 여덟 알의 염주가 튕기듯 쏘아졌고, 염라수의 하얗게 불타는 듯한 권강이 사흉 중 하나를 덮쳤다.
슈욱, 슈욱, 슉!
퍼억!
사흉 중 둘이 염주에 머리와 목이 꿰뚫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한 채 즉사했고, 일흉은 염라수의 권강에 머리가 터져나가며 허물어졌다. 마승과 염라수의 손속이 어찌나 빨랐는지, 단말마의 비명조차 채 터져나오지 않았다.
그와 같은 광경에 호열자는 물론이고 지켜보는 이백여 명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강호의 배신이 흔하디흔하다지만, 함께 웃음을 터뜨리는 중에 기습이 이뤄진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충격스러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모두의 놀람이 어디 사흉 중 남은 한 명만 하겠는가.
“이…… 무, 무슨…….”
형제를 잃고 홀로 남겨진 그가 창백한 안색으로 주춤 물러났다. 그런 그에게 마승이 포근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무관세음보살……. 무슨 일이긴 무슨 일이겠습니까. 낄 데 안 낄 데 가리지 못하고 나대는 자의 최후일 뿐이지요.”
“나, 난…… 포기하겠다. 그러니 부디…….”
“네, 부디 극락왕생하십시오.”
슈웅.
관통한 후에도 허공을 맴돌던 8개의 붉은 염주가 마승의 손짓에 따라 가차 없이 몸을 뚫어버리고는 다시 마승의 손목으로 돌아가 차르르 휘감겼다.
뒤늦게 몸에 여덟 개의 구멍이 뚫린 사흉 중 마지막 일인은 짚단 쓰러지듯 털썩, 쓰러졌다.
그걸 끝으로 사위가 말도 못하게 고요해졌다.
이백여 명이나 모여 있거늘 하나같이 두려움에 질려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니, 밤의 풀벌레 소리가 갑자기 크게 들릴 지경이었다.
염라수가 웃음을 머금었다.
“마승, 이제야 조금 마음에 드는구려.”
“허허, 그러게 말입니다. 고요한 것이 너무 좋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그럼 어떻게…… 저자들은 살려둘 생각입니까?”
염라수가 이백여 명의 무리들을 가리켰다.
마승이 미간을 찡그렸다. 안색이 어두워졌다.
“허허, 나무관세음보살. 실은 이 노승 심각히 고민 중이올시다. 피를 봤더니 살심이 끓어올라 쉽게 가라앉질 않는군요. 제가 한번 죽이면 멈추질 않는 습관이 있는지라. 나무관세음보살.”
“하하하, 애초에 고민이 된다는 건 해야만 하는 일이란 뜻입니다. 서로 공평하게 반절씩 나누어 죽이는 건 어떻습니까?”
“허허, 나무관세음보살…… 그럴까요?”
마승이 불호를 외며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 말에 지켜보는 이들은 스스로의 귀를 의심했다.
‘여기 있는 우릴 다 죽인다고?’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비록 강자들끼리 싸우다 동귀어진하길 바라며 어부지리를 노리고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게 죽어야만 하는 이유가 된다면 할 말은 없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잖는가. 상황이 그야말로 이상하게 변해버렸다.
이젠 공청석유가 문제가 아니었다.
사느냐, 죽느냐.
무엇보다 두려운 건 마승의 염주.
염주는 마치 살아있는 듯 움직이고, 속도와 파괴력은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이니 대책이 없었다.
‘어찌한단 말인가.’
이 자리에 선 이들은 각기 활동하는 지역에서는 그래도 목에 힘깨나 주고 다니는 이들이었고, 헛기침이 통하는 인물들이었지만 마승의 경이로운 무위 앞에서는 초라함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쩌자고 공청석유에 욕심을 부려 여기까지 온 것인지 후회하는 마음이 샘솟듯이 솟구쳤다.
하지만 그럼에도 섣불리 도망칠 생각도 못했다. 괜히 움직였다가 눈에 띄는 순간 염주가 날아올 것만 같은 것이다.
그건 호열자도 마찬가지였다. 거의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마승과 염라수가 잔악하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상상조차 못한 터였다.
정녕 이건 아니었기에,
“염라수, 마승! 당신들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나를 잡았으면 되었지, 왜 모두를 죽인단 말이오! 저들은 그냥 놓아주시오.”
호열자가 만류하고 나섰다.
자신이 의로운 자여서도 협객이어서도 아니었다.
그렇게 살아오지도 않았다.
그저 좋을 땐 좋고, 험악할 땐 험악했을 뿐.
사람이 원래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어느 범주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그리고 여기 모인 모두가 죽을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사람에게 욕심과 욕망은 당연한 것이어서, 지나치지만 않다면 욕망은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또한 강호인에게 있어 강해지고 싶다는 열망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공청석유가 있다는데 그 누가 있어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인가. 그 가능성을 찾아 누군가는 호기심에, 또 누군가는 일말의 행운을 기대하며 여기 와 있을 뿐이거늘, 모두를 죽이겠다니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게다가 이미 누구 할 것 없이 전의를 상실한 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중에 그저 유희로서 마승과 염라수가 살인을 자행하려 하니, 호열자로서는 이해할 수도 없고 용납할 수도 없었다.
염라수가 호열자에게 시선을 던졌다.
“호열자, 착각하지 마라.”
“…….”
“순서가 바뀔 수가 있어.”
“순서?”
“우리가 필요한 건 너의 귀와 입뿐이다. 눈알을 뽑아도 말은 할 수 있고, 너의 팔 다리를 잘라도 대화는 가능해. 우린 그저 성숙노괴가 어디에 있는지만 알면 그만이거든. 저자들을 죽이기 전에 네 눈알부터 뽑아주랴? 창자부터 꺼내줘? 곱창 구워?”
“…….”
호열자는 두려움에 질린 나머지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여기서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눈알이 뽑히고 팔다리가 잘리는 선에서 끝날 것 같지 않은 것이다.
염라수가 히죽 웃었다.
“그래 그렇게 처 다물고 있어라. 목이나 돌아간 주제에 나대기는. 마승, 이제 슬슬 피 맛을 보러 갑시다.”
“하하하, 그럽시다. 나무관세음보살.”
이백여 명, 누구 할 것 없이 몸을 움츠렸다.
“으으으…….”
가히 고양이 앞의 쥐였다.
점혈된 것도 아니어서 도망치려면 도망칠 수도 있고, 어차피 죽을 목숨이기에 다 같이 전력을 다해 싸울 수도 있는 일인데, 두려움에 몸이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왜인지 도망치는 자는 가장 먼저 죽게 될 것 같고, 맞서는 자는 그다음으로 빠르게 죽을 듯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두가 공포에 질려 정신이 붕괴되어 갈 때였다.
한 목소리가 울렸다.
“기다려.”
나직하면서도 음침한 목소리였다.
‘……응?’
마승과 염라수가 미간을 좁히며 주위를 빠르게 살폈다. 목소리는 마치 귓가에 속삭이듯 들려왔는데, 기이하게도 방향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 목소리는 비단 두 사람에게만 들려온 것이 아니었기에, 호열자는 물론이고 모두는 이미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누구지?’
‘누가 있는 거지?’
‘목소리가 마치…… 경고하는 듯했어.’
그런 탓에,
두근.
기대되는 마음이 떠올랐다.
이 목소리가 마승과 염라수를 멈춰세운 것이다.
낮고 깊은 목소리였다.
마승과 염라수에게 경고하는 듯 보여 그들에겐 반대의 의미가 되었다. 마치 괜찮다고, 염려 말라고 다독이는 것처럼 들려와 저절로 위로가 되고 기대하는 마음이 되고 말았다.
마승이 밤의 허공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나무관세음보살……. 귀하는 누구십니까?”
“나는…….”
낮은 목소리가 좌측에서 들려온다. 모두의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악몽이요…….”
이어진 음성은 우측으로 휘돌았다.
“죽음이며…….”
목소리는 다시 방향이 틀어졌다.
놀랍게도 이번엔 뒤쪽이었다.
“모든 이의 두려움이자…….”
이젠 군웅들의 중앙 뒤쪽 너머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한순간,
검은 인영이 연기처럼 허공으로 솟구쳤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자.”
떠오른 상태로 검은 인영이 잠시 체공하며 흐릿함이 가시니, 비로소 ‘악몽이자 죽음’의 외모가 드러났다.
모두가 바라본 순간,
“허억!”
“흐읍…….”
“무, 무슨…….”
“괴, 괴물…….”
끔찍한 외모요, 구겨진 듯 흉측한 모습에 누군가는 경악에 차 더듬거렸고, 또 누군가는 놀라 자신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처음이었다.
장담컨대 처음이었다.
어느 누구할 것 없이 이리도 추악하고 무서워지는 외모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쿠웅!
추악한 사내가 지면에 내려앉았다.
그로 인해 흉측한 외모가 더욱 확연하게 드러났다.
모두의 마음에 떠올라가던 ‘기대’와 ‘희망’은 사라져가고, 도리어 두려움은 배가 되었다.
이쯤이면 더한 놈이 나타난 것이다.
모두가 누구인지 몰랐지만, 단 한 사람 호열자만은 괴인을 알아보았다. 한마디 말로 몸을 정지시킨 자, 또한 자신의 목을 돌려버린 존재가 눈 앞에 나타난 것이다.
“화, 화공신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