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특별한 손님.
‘선우진이 살아있다고?’
성숙노괴는 당혹스러워하며 미간을 좁혔다.
“시체를 바꿔치기했다는 거냐?”
선우진의 자살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설명했다. 그럼에도 제갈혜는 그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고 하니, 가능성은 단 하나다. 시체 바꿔치기. 문제는 그 시체를 자신이 직접 확인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헛소리였다.
하지만 무시할 수 없다.
눈앞의 젊은 여인은 무림맹의 군사였으며, 맹주 후공의 신임을 받고 그 곁을 보좌했던 제갈혜인 것이다.
천재로 불리는 여인이다.
“호열자를 의심하시나요?”
“아니. 결코.”
“맞아요. 호열자의 됨됨이를 떠나, 그는 찾고 있는 것이 공청석유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죠. 게다가 천화서고의 천재를 초대하기 위해 안휘로 떠나있기도 했고요. 그럼 노조께서 암호 문서를 지닌 것과 그것이 공청석유라는 것을 아는 인물은 선우진뿐이에요.”
“내가 당한 거다?”
“그렇게 보여요.”
‘설계당했다라.’
그럴 수 있는 건가. 성숙노괴는 상황을 돌아봤다. 물론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선우진을 만난 것부터 우연에 우연이 겹쳤으니까. 천금서고로 찾아가서 그를 초빙해온 것이 아니다. 때마침 천재적인 두뇌가 필요할 때 부근에 선우진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땐 그저 운이 좋았다고 여겼거늘…….
그럼에도 성숙노괴는 의문이 남았다.
선우진의 의도적인 접근이었다면, 도대체 선우진은 암호 문서가 자신에게 있다는 걸 어떻게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일까?
“말했다시피 내가 암호 문서를 손에 쥔 건 아우가 선물로 보냈던 도자기가 깨진 뒤다. 도자기가 우연히 깨지지 않았다면 난 그 속에 아우가 남겨놓은 문서가 있다는 걸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테지.”
아우는 귀곡자를 가리킴이다.
아우의 도자기 선물이 온 건 3년 전쯤. 값진 것도 아니었고, 특별할 것도 없는 도자기였다. 그래도 선물인지라 곱게 모셔두긴 했다.
아우와는 별것도 아닌 걸로 말다툼을 벌인 후 수년간 왕래가 없었던 터. 도자기는 화해의 의미로 보냈겠거니 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싸구려 도자기잖아.’
당시엔 그렇게 투덜거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아우는 홧김에 형이 도자기를 깨뜨릴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훨씬 더 빨리 문서를 획득했을 것이다.
“……한데 마침 그 시기에 천금서고의 천재가 부근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만약 도자기가 깨지지 않았다면 내가 선우진을 초빙하여 만나는 일도 없었을 거다. 넌 이 부분에 대해선 어찌 생각하느냐?”
내가 접근한 것이지, 선우진이 접근한 것이 아니라는 물음.
한데 대답이 뜻밖이었다.
“그랬다면 반대였을 거예요.”
“반대?”
“선우진이 먼저 찾아갔겠죠.”
“도자기를 훔치러?”
“네.”
성숙노괴는 할 말을 잃었다.
이해 못해서는 아니었다.
이해를 하려고 하다 보니 선우진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소름이 쫙 끼친 것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선우진은 대단한 놈이었다. 놈이 두려움에 떨고 괴로워 어쩔 줄 몰라 하던 모습들조차 연기였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필시 무공을 익혔음이고 그 수준도 제법이리라. 한데 함께하는 와중에 무공의 흔적이며 기운을 전혀 읽지 못했기에, 생각할수록 성숙노괴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놈이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당연하다. 그럼 누군가? 어떤 조직인가? 아우는 당시 그자들과 닿아 있었을 터. 또 그자들은 현재의 선우진과 연루되어 있을 것이다. 아우의 생사는? 이미 오래 전 죽음을 맞이했겠지. 도자기는 신변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보내지도록 한 것이며, 만일을 대비한 일이었을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고 쌓여가자, 성숙노괴의 눈은 깊어졌다.
선우진, 그리고 연루된 자들.
‘죽인다. 반드시.’
서늘하게 굳은 그의 얼굴에 살기가 드리워졌다.
제갈혜는 그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기에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성숙노괴는 공청석유가 목적이 아닌 것이다.
그때, 불쑥 성숙노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믿어도 되겠지?”
눈빛에 살기는 잦아들었지만 그 빈자리를 채운 건 불신의 눈빛이었다.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라고 여겼던 선우진에게 휘둘렸던 그다. 덕분에 온 강호가 주목하는 인물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제갈혜와 선우진의 공통점이라면 머리를 굴려대는 천재라는 것. 어찌 보면 괜한 심술이지만 불안한 것도 사실이었다.
제갈혜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저 빤히 바라봤다.
“믿지 마세요. 저도, 제갈세가도. 공청석유가 걸려 있는 사안이에요. 언제든지 배신할 수 있어요.”
담담히 흘러나온 목소리.
성숙노괴는 그 말에 도리어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결과 긴 한숨을 토해냈다.
“후우…….”
도움을 구하러 제 발로 제갈세가를 찾아온 주제에 헛소리를 지껄인 꼴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보다 멍청한 물음이 없었다.
“미안하다. 어리석은 말이었다.”
“강호인들이 노조를 쫓고 있어요. 노조께서 제갈세가에 있다는 것이 외부인에게 알려지면 곤란해지는 건 노조만이 아니에요. 본가는 그걸 감수했는데, 솔직히 실망스럽네요.”
“…….”
맞는 말이다. 제갈세가는 이 일로 큰 희생을 겪게 될 수도 있는 일. 반박할 여지가 없어 성숙노괴는 입을 쓰게 다셨다.
“그렇지. 누구보다 비밀을 유지할 곳이자, 누구보다 의지할 만한 곳이기도 하고…….”
“쉬세요.”
**
다음 날, 정오 무렵.
그르르르릉.
비고의 석실에서 문서 해독에 열중이던 제갈혜는, 비고의 석문이 열리는 소리에 미간을 좁혔다.
‘무슨 일이지?’
비고에 머문 건 깊은 몰입에 들기 위함이기도 하고, 또 문서를 해독하는 모습을 최대한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런 탓에 가문에 큰 위기가 닥치지 않는 한 저 문은 열려선 안 되는 것이었다.
설마 알려졌나?
벌써 성숙노조가 본가에 와 있는 것이 강호에 드러났다고? 어떻게? 아니, 어떻게는 중요하지 않다. 그 일이 아니고서야 저 문이 열릴 리가 없었다.
들어선 건 숙부였다.
제갈세가의 가주.
“혜야, 놀랄 것 없다. 특별한 손님이 왔기에 전하러 온 것뿐이다.”
“특별한 손님이라니요?”
놀라지 말라고 했지만 더 놀라고 말았다.
대체 어떤 손님이 왔기에 가주인 숙부가 직접 자신에게 알린단 말인가. 대체 어떤 손님이기에?
“천화서고 대공자가 본가를 찾아왔다.”
“지, 지금 말인가요?”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찬은 조카의 물음을 이해했다.
왜 하필 성숙노괴를 받아들인 지금 이 시기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시기는 공교롭다만, 뭘 알고 온 것 같진 않다. 하지만 그는 천룡의 은인. 어찌 반갑게 맞이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너무 뜻밖의 인물인 탓에 제갈혜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비록 천룡대전에 참석하진 않았지만 돌아온 두 장로들로부터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상세히 들었고, 듣는 내내 감탄했던 인물이다.
또한 소예로부터 서신을 받기도 했다.
서신의 내용은 찬사가 가득하였는데, 거의 숭배였다. 그 콧대 높은 소예가 또래의 남자를 존경한다고까지 표현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심지어 남궁세가의 후계이자 그녀의 오빠인 남궁연이 천화서고 대공자의 수하로 확정되자 싱글벙글이었다는 내용도 적혀 있었다.
그 천화서고 대공자가 온 것이다.
“그가 저를 찾던가요?”
“아니다.”
“혼자인가요?”
“그래.”
“혼자라면 성숙노조와는 관계가 없을 확률이 크군요.”
“나도 그리 생각한다. 네가 굳이 맞이해야 할 건 아니다. 그저 네 의중을 물어보고 싶었을 뿐이야.”
제갈찬은 가주요 숙부임에도, 그의 목소리에는 제갈혜에 대한 신뢰가 가득 묻어났다.
“숙부님, 감사드려요. 저도 갈게요. 숙부님의 말씀이 맞아요. 그는 특별한 손님이니, 만나봐야겠어요.”
“하하, 그러자꾸나.”
...접객실의 분위기는 묘해졌다.
가주와 제갈혜가 들어선 다음, 서로 간에 대강의 인사가 오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이후 문제가 생겼다.
“흐으으으음…….”
침음성과 함께 천화서고 대공자의 시선이 한 번씩 고개를 이리 틀었다 저리 틀었다 하면서 빤히 제갈혜를 바라보는데, 시선을 거둬들일 생각이 없어 보이는 것이다.
이게 뭔가 싶은 상황.
가주 제갈찬이 갸웃하고, 두 장로도 이해할 수 없어 눈만 연신 깜박거렸다.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
어찌 알겠는가.
눈앞의 인물이 후공이고, 그저 감회에 젖은 것임을.
후공에게 있어 제갈혜는 무림맹의 군사이기 이전에 의제의 딸이며 친손녀 같은 존재. 오랜만이며 반갑기도 하고 애처로워 보이기도 하니 잠시 상황도 잊고 이리 저리 바라볼 뿐이었다.
원래 할아버지들이란 그런 거니까.
그냥 손주 얼굴은 보고 있기만 해도 좋은 거니까.
게다가 더 훗날 보려 했다가 갑자기 만난 것도 있고, 또 보게 되면 태연히 대해야지 했는데 막상 마주하니 여러 생각과 함께 흐뭇해질 따름이라, 후공으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모르면 오해는 생기는 법이다.
가주 제갈찬은 서서히 불쾌해지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다.
- 장로님들, 대공자가 원래 이런 사람입니까? 천룡대전에서도 이러했습니까?
가주의 전음에 장로 중 하나가 서둘러 답했다.
- 가주,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천화서고 대공자는 결단코 무례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천룡대전 내내 남궁소예에게조차 눈길 한 번 준 적이 없는 사람이외다. 남궁가주가 소예에게 직접 대공자를 안내하라고 했을 때도 대공자가 거절했던 건 당시 참가했던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요.
- 한데 왜 이러는 겁니까?
- 필시 무슨 뜻이 있을 겁니다.
- 아니, 무슨 뜻이 있다는 겁니까. 빤히 쳐다만 보는데!
- 그, 그게…….
영문을 모르겠는 건 당사자인 제갈혜도 마찬가지였다.
이러다 말겠지 했는데 끝이 없을 듯하니, 결국 먼저 입을 열어야 했다.
“대공자, 제 얼굴에 뭐가 묻어있기라도 한 건가요?”
“크흠……. 아닙니다. 그저 어디에서 본 듯한데 생각이 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소저, 우리 만난 적 있던가요?”
“전혀요.”
“그렇군요. 근데 묘하게 낯이 익습니다. 흐음, 아무래도 제가 착각했나 봅니다. 초면에 무례를 범했군요. 소저께도, 가주께도, 또 장로님들께도 너그럽게 용서를 빕니다.”
“허허, 괜찮네.”
“허허허, 살다 보면 그럴 수 있지.”
장로들이 손을 내저으며 너털거렸다.
천룡대전에서부터 봐왔던 두 장로다. 그렇기에 두 사람이 천화서고 대공자를 이해하는 폭은 거의 바다 수준. 제갈혜가 세가의 보물이긴 해도, 상대는 무려 천화서고 대공자다. 얼굴 좀 오래 쳐다봤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뭔 대수냐였다.
하지만 가주와 제갈혜가 서늘해 있는 걸 보고는 다급히 표정을 수습했다.
가주 제갈찬이 입을 열었다.
어느새 그의 얼굴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대공자, 천룡대전의 일은 크게 감사한 마음이네. 듣고도 믿을 수 없어 참석하지 않은 걸 뒤늦게 후회했을 정도였지. 또 듣자하니 소요파에 크게 은혜를 끼쳤다는 소식도 접하여 새삼 놀라기도 했다네. 그런 그대가 본 세가를 찾아와 주었으니, 이 노부는 기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네.”
“과찬이십니다. 강호의 이야기는 부풀려지기 마련입니다. 모두 믿지 마십시오. 그저 부족함이 많은 저를 천하에 명성 높은 제갈세가에서 반갑게 맞이하여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하하!”
제갈찬이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
“그대가 반갑지 않다면 이 세상에 반가울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걸세.”
“감사합니다.”
“그대의 행보는 가는 곳마다 놀라움 자체라 이 노부는 심히 궁금해지네. 한번 들어보세. 본 세가를 찾은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인가?”
“도움을 얻고자 왔습니다.”
“허허, 도움이라. 그만한 재주가 본 세가에 있을지 모르겠군.”
“제갈세가만이 도울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만이?”
가주는 물론이고 모두의 시선이 천화서고 대공자를 향했다.
대공자가 입을 열었다.
“성숙노조를 만나고 싶습니다.”
“……?”
“……?”
“……?”
누구할 것 없이 놀라 눈이 커졌다.
그것은 성숙노괴가 이곳에 있다는 외침이나 다를 바 없어 후공은 만족스러웠다. 절로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제가 실망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