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기특한 녀석들.
천화서고 대공자, 그가 알고 있다.
접객실은 깊은 침묵에 빠졌다.
그 침묵은 실상 아우성이고 혼돈이었다. 그저 소리만 나지 않을 뿐이었다. 가주와 제갈혜, 그리고 두 장로의 머리로 수많은 생각들이 어지럽게 떠올랐다.
성숙노괴가 외부에 드러났다.
어떻게 알았지? 대공자 외에 또 누가 알고 있는 것일까? 천화서고의 천재는 무엇을 원하는가? 공청석유를 취하려 함인가?
묻고 싶은 것이 한둘이 아니다.
또 걱정도 따라온다.
성숙노괴다.
그는 비록 천화서고 대공자를 초빙하려 얼마 전 호열자를 보내기까지 했지만, 그때와 지금의 상황은 백팔십도 다르다. 그때는 필요한 존재였지만, 지금의 성숙노괴에게 천화서고 대공자는 그저 외부인일 뿐이다.
지금 성숙노괴는 불안해하고 있다. 그는 농락당했으며, 또 강호인들의 표적이 된 상태이기에 날카로워져 있다. 건드리면 폭발할지도 모른다.
대공자를 만족시킨다면 성숙노괴는 실망할 것이다. 문제는 실망만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점.
성숙노괴는 화경의 중(中)에 이른 자.
분노한다면 그 뒷감당은 고스란히 제갈세가의 몫이 된다.
그렇기에, 해야 할 말은 이미 나와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천화서고 대공자가 실망해야 한다.
그편이 백번 옳다.
가장 현실적이며, 이상적인 선택이다.
제갈혜를 비롯 네 사람은 빠르게 전음을 교환하며 이해득실을 따졌다. 곧바로 한 사람의 반대도 없이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가주 제갈찬이 입을 열었다.
“성숙노조는 본가에 있네. 그를 만나게 해주겠네. 기꺼이 모든 면에서 도움을 주도록 하지.”
의견 교환 속,
재갈세가는 천화서고 대공자를 택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천룡의 약속은 소중하며, 또 천룡대전에서의 일은 천화서고 대공자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인품을 지녔는지 여실히 드러낸 터. 또한 그가 없었다면 이 자리의 두 장로는 세상에 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현명한 길이란 이익을 말함이 아니다.
제갈세가는 후회하지 않을 길이 현명한 길이라고 믿었다.
그 대답에 후공은 흐뭇해졌다.
자신이 가장 아끼던 제갈세가 그대로인 것이다.
‘기특한 녀석들.’
묻고 싶은 것이 많았을 텐데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그 무엇도 재지 않았다. 조건을 다는 일도 없이, 분명 액면으로만 보면 큰 손실이 뻔하거늘 후회를 감당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성숙노괴의 심리상태야 보지 않아도 뻔한지라 문제가 커질 것이 분명하고, 공청석유에 닿을 수 있는 길조차 잃게 됨에도 망설이지 않다니.
그래서,
“실망스럽군요.”
제갈가주가 갸웃했다.
“대공자, 무슨 뜻인가?”
“사안이 사인일진대 저를 향한 제갈세가의 신뢰가 밑도 끝도 없으니, 재미가 하나도 없습니다.”
의아해하던 제갈가주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렇게 되나? 하지만 이제부터 재밌어질 걸세.”
재밌어진다라.
많은 뜻이 담겨 있음을 후공은 이해했다.
분란과 혼란을 예상하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곳에 온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기에,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후공은 무한한 신뢰에 대한 보답으로 진실의 조각을 내보였다.
“가주, 염려 놓으십시오.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저와 제 친구들은 이미 많은 것을 알아냈고, 제가 성숙노조를 만나려 함은 그저 몇 가지 확인을 위한 것에 불과합니다.”
“많은 것을 알아냈다고?”
“네. 귀곡자에 관한 일, 공청석유의 위치, 그리고 천금서고의 선우진이 살아있을 가능성에 대한 것들입니다.”
제갈가주가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것들을 전부 알아냈다는 겐가?”
제갈혜와 두 장로도 놀라긴 마찬가지.
듣고도 믿을 수 없었다.
그들로선 천화서고 대공자가 이제 겨우 출발점에 선 채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고 여겼거늘, 지금 하는 말로 보자면 실상 까마득하게 앞서 있는 것이 아닌가.
사실이라면 어디서부터 설명을 하고 어떻게 이 사태를 수습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것이 하등 쓸데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공청석유의 위치까지 언급하고 있으니, 이곳에 성숙노괴가 있는 걸 어떻게 알았느냐 따위를 궁금해하는 것이 우스워질 지경.
“우선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야겠군요. 성숙노조의 아우인 귀곡자는 이미 오래 전에 명을 달리하였습니다. 그의 유골을 제가 직접 확인하였고, 그의 유품을 가지고 왔습니다.”
“하아…….”
“그럼 그대가 성숙노조를 찾은 이유 중 하나도…….”
천화서고 대공자가 고개를 끄덕였기에 다들 할 말을 잃었다.
“허어……. 이 무슨…….”
“아니 대체…….”
애초에 분란이 날 일이 아니었다. 분란이 뭔가. 도리어 성숙노조가 고마움을 표할 일이다. 잠시 선택을 위해 의논했던 것조차 부끄러워지는 상황이었다.
“가주, 성숙노조를 이 자리로 불러주십시오. 지금부터는 함께 이야기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야지. 아무렴, 당연한 말이네.”
이내 성숙노괴가 합석했다.
어느샌가 그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거렸다.
천화서고 대공자가 건넨 아우의 독문암기인 ‘용편린’을 받아든 다음이었다.
“대공자…… 고맙네.”
살아있다는 기대는 없었다. 정황이 죽음을 가리켰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흔적이라도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문서를 해독하면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용편린이다.
무덤덤할 줄 알았는데, 눈물이 맺히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더불어 고마움도 차올랐다. 천확서고 대공자는 용편린을 건넨 것뿐 아니라 아우의 마지막 장소까지 들려준 것이다.
“고마움은 거둬주십시오. 제가 한 일이 아닙니다. 강호에서 알게 된 제 친구가 알려주어, 저는 확인만 하였습니다.”
“그렇다 해도 어찌 고맙지 않을까. 한데 그 친구는 누구인가?”
“죄송합니다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알겠네. 그에게 대신 고마움을 전해주게.”
“그리하겠습니다.”
그 친구는 다름 아닌 색관조.
그 자체로야 존재를 드러내도 문제될 건 없었지만, 앞으로 말하게 될 내용과 충돌하는 지점이 있어 말을 아낄 필요가 있었다.
후공은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는 공청석유에 대해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저와 제 친구는 그 동굴 아래 쪽에서 공청석유가 있는 곳을 찾아냈습니다.”
“그, 그게 무슨?”
“공청석유를 찾았단 말인가?”
“한데 어찌…….”
놀람도 잠시, 찾았다는 사람의 안색이 무거웠기에 좌중은 아직 남겨진 말이 있음도 알아차렸다.
“네, 아쉽게도 그곳엔 공청석유가 한 방울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다녀갔군?”
“네, 저희가 한발 늦었습니다. 이미 앞서 다녀간 이가 있었습니다.”
굳이 공청석유를 찾았다는 사실을 말할 이유는 없었다.
없던 욕망도 생겨나는 것이 보물이다. 또한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다. 하나씩 나눠준다면 모를까, 그럴 수 없기에 몰라야 한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공청석유는 없고 공청석유와 유사한 형태를 띤 가짜가 남겨져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하아, 기묘한지고. 그냥 물이던가?”
“아닙니다. 독극물이었습니다. 기쁜 마음에 머금었다가 죽음을 맞이할 뻔했습니다. 제가 독에 저항할 수 있는 재주를 지녔기에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곧바로 탄식이 터져나왔다.
“허어…… 철두철미할 뿐 아니라 심히 악독한 자로고.”
“취한 것도 모자라 독으로 바꿔놓다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사람이 어찌 그리도 악랄하단 말인가! 천벌을 받아 마땅한 자가 아닌가!”
금섬을 시켜 비슷한 형태가 되게 하고 그 과정에서 금섬의 독무가 담기도록 한 것은 바로 자신이었지만, 후공은 크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실로 무서운 자입니다.”
“그자가 선우진일 가능성은?”
물은 건 성숙노괴였다.
“선우진은 아닙니다. 제가 그곳을 찾은 건 호열자가 저를 찾아오기 전입니다. 시간을 따져볼 때 그때는 아직 선우진이 문서 해독을 마치지 못한 상태이고, 노조의 곁에 있었을 시기입니다.”
당연히 거짓말이다.
후공으로선 자신이 꾸민 일이므로 선우진이 아님은 자명하여, 그저 말을 지어냄으로서 ‘아님’의 정당성을 부여했다.
선우진은 현재 공청석유를 찾고 있을 터.
혹은 어제 오늘 찾았다 해도 놈은 죽은 목숨이다.
“그렇게 된 건가. 돌아가는 모양새가 복잡미묘하군.”
“그럼 대공자, 그대는 이제 무엇을 하고자 함인가?”
성숙노괴가 미간을 좁혔고, 이어 제갈가주가 묻는다.
“먼저는 확인 차원에서 도자기에 남겨졌던 그 문서를 살펴보고 싶습니다. 가능하겠습니까?”
말끝에 천화서고 대공자의 시선이 옮겨졌다. 그 시선에 성숙노괴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네.”
“문서 내용에 특이사항이 없다면, 이후에는 천금서고의 선우진을 쫓고자 합니다. 물론 그와 함께하는 이들도 포함입니다. 그리고 저보다 앞서 공청석유를 차지한 자들도 찾아내 빼앗을 생각입니다.”
단호한 목소리 속에 진실과 거짓이 섞였다.
***
그날 저녁.
제갈혜는 찻잔을 앞에 두고 성숙노괴와 마주 앉았다.
제갈혜로선 천화서고 대공자의 등장으로 할 일이 일순 사라져버린 상황이고, 성숙노괴는 생각이 많아진 터.
“네 생각에 문서 해독에 며칠이나 소요될 것 같으냐?”
“빠르면 열흘. 늦는다면 이십 일은 걸릴 거예요.”
“너라면 열흘인가?”
“네.”
“흐음…….”
성숙노괴의 얼굴엔 조급함이 묻어났다.
그의 마음만은 이미 아우의 마지막 장소로 향하고 있었고, 당장이라도 그곳으로 달려가고 싶은 심정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천화서고 대공자가 문서를 해독하기까지 그 결과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
“여유를 가지세요. 대공자는 이미 여러 부분에서 시간을 아껴주었으니까요.”
“네 말이 맞다. 이미 찾은 셈이지. 한데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다. 너의 생각이 궁금하구나.”
“말씀하세요.”
“공청석유 말이다. 솔직히 나는 미심쩍음을 떨쳐내기 힘들다.”
제갈혜가 갸웃하며 미간을 좁혔다.
“대공자가 공청석유를 취하고 둘러댔다고 보는 거군요.”
“그렇지. 난 그 아이에게 공청석유가 있다고 본다.”
성숙노괴의 눈이 빛났다.
하지만 제갈혜의 얼굴은 서늘해졌고 실망스러움도 가득 떠올랐다.
“노조.”
“……?”
“염치가 없군요.”
“뭐?”
성숙노괴가 발끈했다.
“말이 심하구나! 내가 고마움을 벌써 잊었을까 봐. 단지 의심이 떠오르기에 네 의중을 물은 것뿐이지 않느냐!”
“그게 염치가 없는 거예요. 대공자가 공청석유를 가지고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떤가요? 그에게 받은 것이 넘쳐나는데, 의심을 해서 어디에 쓰시려고요?”
“흐으음…….”
맞는 말이라 대답이 궁해진 성숙노괴가 그저 불편한 기색만 드러냈다.
“착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저와 제갈세가가 노조를 도운 건 아우이신 귀곡선생과의 친분 때문이고, 후공이 귀곡선생을 아꼈기에 기꺼이 나선 것뿐이에요.”
당신 때문이 아니다.
성숙노괴도 물론 알고 있다.
그걸 알기에 제갈세가가 도움을 줄 것이라 여겨 찾아온 것이기도 하고.
하지만 너무 호되게 책망하니 기분이 좋을 수는 없다.
나이가 나이이지 않는가.
게다가 최근 연거푸다.
어린 천재들.
선우진, 제갈혜, 그리고 천화서고 대공자.
하나씩 마주하고 이야기 나누게 된 셈인데, 누구 할 것 없이 빼어나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마구 밀어낸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그로선 씁쓸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 마음을 제갈혜가 헤아렸다.
어조를 부드럽게 바꾸었다.
“노조. 기분 푸세요.”
“풀어지겠냐!”
욱 하고 성질을 내자, 제갈혜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정말이지 이 노인은 백발에 주름이 많고 고약하게 생긴 주제에 문득문득 어린아이 같은 것이다.
갖고 놀기 딱 좋았다.
“노조께서 모르시는 것이 있어요.”
“내가 뭘?”
“천룡대전에서 대공자가 어떠했는지 말이에요. 그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증명했어요. 지나온 길이 말해주고 있어요. 그는 그냥 신뢰하면 되는 사람이에요.”
“알아들었어.”
“그가 공청석유를 이미 취했다면 우리에게 그 위치며 정황을 이야기했을 리가 없겠죠. 괜한 의심만 사게 될…….”
“에잇, 알았들었다고!”
성숙노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가버렸다. 제갈혜는 닫힌 문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거렸다.
“언제 철드나.”
그 말에는 후공도 웃고 말았다.
‘철들기엔 늦었지.’
의식을 넓혀 귀를 기울인 가운데 대화를 듣고 있었던 터.
문서 해독은 이미 마쳤다.
짐작대로였다. 이미 찾아낸 공청석유의 위치를 표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오늘 밤은 함께 거닐어 볼까.’
내일은 떠나야 하기에,
또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