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155화 (155/460)

155화. 하늘의 별이 되고, 땅이 되고.

“변장을 하실 거면 제대로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굳이 고집을 피우시겠다면 따로따로 움직이도록 하죠. 노조께서 누굴 죽이든, 죽임을 당하든 제 알 바 아닙니다.”

거의 네 맘대로 해보란 식이었기에 성숙노괴가 발끈했다.

“아니, 거 말을 해도……. 이보게, 나 성숙노괴야!”

성숙노괴가 강호의 권위를 내세워 소리쳤지만 통할 리 만무하다. 성숙노괴고 나발이고, 상대는 무림맹주다.

천화서고 대공자가 그저 뚱한 듯, 한심하다는 듯 쳐다볼 뿐이라 성숙노괴가 말을 이었다.

“누가 안 쓴대! 가면이 없어서 그런 거잖아!”

“기다려 보십시오.”

가면이 왜 없겠는가.

후공은 제갈혜를 불러달라 청했다.

곧 제갈혜가 들어오며 나름 변모한 성숙노괴를 힐끗 보고는 너스레를 떨었다.

“대공자, 옆에 계신 분은 처음 뵙는데 누구신가요?”

“끄응.”

성숙노괴가 앓는 소리를 냈다.

후공은 가면이 필요하다는 말을 전했다.

제갈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면도 괜찮겠네요.”

“노조께서 뭘 마음에 들어할지 알 수 없으니, 이것저것 모두 가져와 보십시오.”

“까다롭긴 하죠.”

다시 돌아온 제갈혜는 양손에 여러 가면을 들고 나타났다. 거의 스무 개가 넘었다.

서두른 탓에 가면의 질이 천차만별이었다.

성숙노괴는 그중 하나를 골랐는데, 너구리 가면이었다.

“이게 제일 낫네.”

“저도 하나 골라야겠습니다.”

“대공자께서도요?”

제갈혜가 갸웃했다.

“함께 다니는데 누군 쓰고, 누군 안 쓰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길 겁니다. 같이 쓰면 원래 저런 놈들인가 보다 할 테죠.”

물론 그런 뜻도 있었지만, 다른 뜻도 있었다.

어제 떠오른 지난 추억에 어린 제갈혜가 썼던 여우가면을 다시 보고 싶어졌다.

바로 찾았다.

‘여우임.’이라는 글자가 적힌, 누가 봐도 아이가 적은 듯한 글씨체의 가면이었다.

“이게 좋겠군요.”

“에? 대공자, 다른 가면을 고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이 가면이 마음에 듭니다만. 비싼 겁니까?”

“하하, 그럴 리가요. 조악하잖아요. 다른 걸 골라보세요.”

“조악하긴요. 소저께선 예술을 몰라서 그러는 겁니다. 누구의 솜씨인지 몰라도, 이 가면에는 장인의 기품과 정성이 느껴집니다.”

그렇게 말하곤 후공은 가면을 썼다.

얼굴에 잘 들어맞았다. 어린 장인은 최대한 얼굴을 숨기고 싶었는지 크게 만들었고, 후공으로선 행운이었다.

후공은 여우가 된 채로 제갈혜를 바라봤다.

“소저, 저 어딨을까요? 찾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못 찾을 듯합니다만. 내가 보이는 건 아니겠죠?”

“하하하!”

제갈혜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어릴 때 자신이 했던 말을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후공은 기억하고 있었고,

그래서 이 가면이 마음에 들었다.

보물이었다.

여우의 시선이 성숙노괴 쪽으로 향했다.

“왜 그러나?”

“가면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가면 안쪽, 노조의 얼굴도 바꾸는 게 좋겠습니다.”

“역용 같은 잡기는 내가 모르네만?”

하긴 그렇다.

강한 자는 그냥 죽이면 되는 일.

“제가 그 잡기에 능합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더 강한 자는 거기에 더해 귀계를 부리는 자며, 천변만화하는 자다.

“오호! 그런 재주가 있었던가.”

“제게 몸을 맡겨주십시오. 통증은 없을 겁니다.”

성숙노괴가 몸을 맡기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후공은 즉시 교릉으로 일부만 적용되게 점혈한 다음, 정첩까지 겸하여 변형이 유지되도록 했다.

고통이 없게 하느라 변형은 천천히 이루어졌다.

두드드…… 드드드득.

천천히 성숙노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광대가 튀어나오고 이마도 튀어나왔으며, 턱이 네모나게 각져지고 코는 비틀려 뭉개졌다.

결과물은 흉측.

그래도 화공신타에 비하면 미남 수준이었다.

게다가 몸은 그대로요, 얼굴만 바뀌었으니 무공을 펼쳐내는 데도 문제는 없을 터.

그런 변모가 후공에겐 별일 아니었지만, 지켜보던 제갈혜에겐 가히 경악스러운 광경이었다.

‘대공자는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제갈혜는 진심으로 탄복했다.

공청석유로 꾸며진 독에도 끄떡없었다고 하니 만독불침을 이룬 듯하고, 난해한 암호 문서는 순식간에 풀어냈으며, 지금은 타인의 얼굴을 변형시키기까지 했으니 놀라움의 연속인 것이다.

천공단이란 이름 아래 강호의 고수들과 후기지수들을 수하로 부리는 것만으로 이미 급이 다를진대, 볼 때마다 새로우니 감춰진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때 성숙노괴의 비명이 터졌다.

거울을 찾아 확인한 뒤였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맘에 드십니까?”

“맘에 안 들어! 이게 되면 괜찮게 뭉개놓을 수도 있을 텐데, 꼭 이래야 했나!”

“제가 남 잘되는 꼴은 못 보는 성격이라 그렇습니다.”

“뭐가 어째!”

“하하하하!”

성숙노괴는 울화통을, 제갈혜는 다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대공자가 여우 가면까지 쓰고 말한 터라 정녕 여우가 얄밉게 말하는 것 같았다.

“가시죠.”

“이대로 간다고?”

“그래서 가면이 있는 겁니다.”

제갈세가를 나서는 길.

가주와 두 장로, 그리고 제갈혜만이 단출하게 배웅했다.

“대공자.”

혜가 부르는 소리에 후공이 시선을 주었다.

여우 가면을 쓰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후공은 마음껏 눈동자에 따스함을 담아 바라볼 수 있었다.

“조심하세요.”

“걱정 마십시오.”

“그래도요.”

다시금 나직이 들려온 혜의 목소리.

여우 가면의 머리가 살짝 기울어졌다.

가면 속에서 후공은 웃었지만, 제갈혜는 볼 수 없었다.

‘또 보자.’

“제가 뛰어난 면모가 많습니다만, 그중 가장 자신있는 것이 도망치는 것입니다. 염려 마십시오.”

제갈혜는 우는 듯 웃는 듯 표정이 바뀌어 바라봤다.

‘또야.’

이 말투. 이 여유.

다시 그런 생각이 든다.

백부를 떠오르게 하는 사람.

이 사람은 백부같이 큰 사람일까.

***

북교산을 지나쳐 운경으로 향했다.

운경은 동쪽으로 북교산을 두고 있고, 서쪽으로는 청우산을 두고 있는 두 산의 중간 지역.

즉 가짜와 진짜의 중간이다.

여우와 너구리는 밤을 맞아 운경에 도착했고, 그곳에서도 태왕객잔을 찾아들어갔다.

“손님, 무얼 도와드릴깝쇼.”

쪼르르 달려온 점소이가 굽신거렸다.

가면을 보고도 놀라는 기색은 없었다. 특이하게 여길 건 아니었다. 최근 공청석유를 찾아 모여든 강호인들 중에는 가면을 쓴 이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던 탓.

일 층은 주점이요, 이 층부터는 객방이다.

점소이의 물음은 둘 중 어느 쪽이냐는 말이었다.

여우가 말했다.

“방.”

“넵, 안내하겠습니다.”

이내 점소이가 삼층의 한 객방의 문을 열었다. 객방 안으로 먼저 들어가 불을 밝히고 입을 열었다.

“따로 필요하신 것은?”

“태왕객잔의 주인에게 전해주십시오.”

“네?”

난데없는 말에 점소이가 갸웃할 때,

여우가 가면을 벗었다.

“천화서고 대공자가 만나길 청한다고 이야기해 보십시오.”

“네? 누, 누구시라고요?”

점소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충분히 알아들은 모습이었기에 다시 말할 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와아아! 뭐 이런 일이. 정말입니까? 정말 천화서고 대공자이십니까? 아이고, 아이고야. 뭐지, 도대체. 아니다.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함께 가시죠. 모시겠습니다.”

...태왕객잔의 주인도 점소이와 다를 건 없었다.

극진히 맞이했다.

하오문인 탓이다.

소요파의 일로 대운루 루주가 엄청난 금괴와 돈을 분배 받은 이야기는, 이미 하오문 내에서는 전설이 되었다.

발만 살짝 걸쳤을 뿐인 작은 도움이 수만 배로 돌아왔으니 천화서고야말로 진정한 하오문의 친구라며 찬사가 끊이지 않았다.

태왕객잔의 객주 또한 ‘나에겐 안 오나’ 따위를 중얼거렸던 사람 중 한 명.

“하하하, 영광일세. 강호가 소란스러워 혹시 내게도 기회가 오지 않을까 했는데, 이런 영광을 누려 보는구만.”

객주가 껄껄 웃으며 반기니 뚱뚱한 그의 배가 마구 출렁거렸고, 웃느라 눈도 감겼다.

“객주, 눈 뜨십시오.”

“하하하, 제일 크게 뜨고 있는 걸세.”

가볍게 농담을 주고받는 가운데, 객주의 시선이 너구리 쪽으로 향했다.

“그쪽 분, 답답할 텐데 가면은 벗고 계시지 그러오?”

“못생겨서 그래.”

성숙노괴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그 말에 객주가 또 껄껄 웃었다.

“남자가 남자답게 생기면 그만이지. 뭐 그런 걸 신경 쓴단 말이오. 대공자처럼 잘생긴 사람도 있고, 나처럼 푸근하게 생긴 사람도 있고 그러는 거지. 괜찮으니 벗으시구려.”

“뭐 그렇다면야.”

성숙노괴가 가면을 벗었다.

객주가 식겁하며 엉덩걸음으로 물러났다.

“으허헉! 시발 것……. 사람이 뭐 이따구로 생겼어! 당장 가면 쓰시오!”

성숙노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주접을 떠네. 미친 새끼.”

그렇게 한마디 쏘아붙이고 다시 너구리가 되었다.

평소와는 달리 성숙노괴로서는 인내심을 발휘한 상황이었다.

당연하게도 무안해진 객주가 배시시 웃었다.

“못생겼다고 해도 이 정도인 줄은 몰랐지. 미안하오. 내 다시는 가면을 벗으란 말은 안 하리다. 껄껄껄!”

객주가 시선을 옮겼다.

“대공자, 무엇을 도와주면 되겠나? 말만 하게. 성숙노괴를 찾아달라거나, 공청석유를 찾아달라는 것만 아니면 다 하겠네. 그 둘은 찾지도 못하겠지만, 찾다가 골로 가니까. 껄껄껄!”

성숙노괴는 눈앞에 있고, 공청석유도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객주가 알 수는 없는 일.

“그럴 리 있겠습니까. 듣고 싶은 말은 이번 북교산의 소문에 관한 것입니다. 소문이 지나치게 빠르게 퍼졌으니 의도된 것이 분명한데, 하오문을 제외하니 떠오르는 곳이 없습니다.”

“우린 아니네.”

객주가 고개를 저었다.

강조한다고 두 팔을 사선으로 교차시켜 보이기까지 했다.

“아니란 건 제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하하하! 대공자 자넨 정말 말을 듣기 좋게 하는군. 실은 우리도 궁금해서 알아봤다네. 그리고 알아냈지.”

“…….?”

“파음문(波音門)이라네.”

“파음문?”

후공으로선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그건 곧 강호에 이름을 떨친 적이 없다는 뜻이며, 생긴 지 얼마 안 되었다는 뜻이라 할 수 있었다.

“모르는 게 당연하네. 강호엔 잡스러운 조직이 많거든. 하오문이야 잡문의 으뜸이지만, 그 아래로 가면 뭐 개미떼같이 만들어졌다가 사라졌다 많지. 파음문은 소문을 전문적으로 퍼뜨리는 일을 하는 놈들이네.”

돈이 되면 다 하는 놈들이라며 상놈의 새끼들이라는 말이 덧붙여졌다.

“파음문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야 누가 의뢰했는지 알아낼 수 있다.

“시간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중간책 정도여도 괜찮겠나?”

“충분합니다.”

“하하, 그렇게 하겠네. 개놈들 제아무리 점조직이어도 하오문 손바닥 안이지.”

객주의 목소리에 자부심이 가득 했다.

“천공단이 대신 오더라도 놀라지 마시고 이야기를 전해주십시오.”

“당연하지. 하오문에서 천공단 모르는 사람 있을까 봐. 또 필요한 건 없나?”

“고급 목함을 하나 준비해 주십시오. 지금 바로.”

“문제없네.”

**

청우산 만연봉.

밤에 잠긴 산봉우리 그 절벽 끝자락에 두 사람이 나란히 섰다.

“첫 번째 동굴입니다.”

“다녀오겠네.”

“네.”

성숙노괴가 절벽으로 신형을 던졌다.

후공은 그 자리에 선 채로 시선을 멀리 두었다.

밤하늘의 별이 유난히 밝게 빛나는 가운데 귀곡자를 떠올렸다.

오늘 귀곡자는 별이 된다.

돕는 걸 좋아하던 귀곡자였다.

형제여도 형과는 달랐다.

성숙노괴는 제멋대로여서 별호에 ‘괴’가 붙었지만, 귀곡자는 도움을 청하는 손길에 기꺼이 손을 내미는 이었다.

사사로운 일에도 그러했고,

큰일에도 그랬다.

무림맹 내 기관진식에도 귀곡자의 손길은 닿아 있고,

제갈혜의 지식 일부도 귀곡자에게 전수받은 것이었다.

강호를 좋아했고, 친구가 많았으며,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았던 녀석.

천재의 두뇌에 호기심도 많아, 한곳에 오래 머물진 않았다.

“흐흐흑…… 아우야, 이곳에서 얼마나 답답했느냐. 왜 네가 여기 이렇게 있는 것이냐.”

한데 이곳에선 오래 머물렀다.

동생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에 성숙노괴는 그렇게 오열했다.

그 울음이 만연봉을 휘돈다.

“내가 잘못했다. 이 형이 많이 늦었다. 용서해다오.”

동굴 안이 칠흑같이 어두워도 성숙노괴에겐 빛이 필요 없다. 어느 쪽이 아우의 유골인지는 용편린의 흔적으로 구별할 수 있는 일.

이윽고 연기가 피어올랐다.

성숙노괴가 삼매진화를 일으켜 유골을 화장했다.

유골은 가루가 되어 목함에 담겼다.

잠시 후, 형의 흐느낌 속에 귀곡자는 바람에 흩날렸다.

“아우야, 훨훨 날거라. 하늘이 되고 땅이 되어라. 그리하여 다시 보자꾸나.”

후공도 보았다.

뿌연 연기처럼 귀곡자가 하늘의 별이 되고 땅이 되어갔다.

‘먼저 쉬어라. 귀곡자.’

천공단이 어둠 속에서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단주의 등을 바라보며 천공단은 그림자처럼 그 자리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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