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내일 죽이겠습니다.
그 밤.
북교산 북쪽 운교에는 비가 내렸다.
폭우였다. 젊은 남자는 집에 있다가 밤의 빗길로 나섰다. 걸음은 느렸고 우산은 없었다. 비에 조금씩 녹아내리려는 듯 천천히 걸었다.
괴로운 일이 있는 걸까? 틀림없다. 남자의 표정이 말해준다. 남자의 표정은 넋이 나가 있었다. 계속 그런 건 아니었다. 표정은 계속 바뀌었다. 울 것처럼 시무룩했다가, 한순간 웃음을 터뜨렸다가,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쥐고 끙끙 신음소리를 내기도 했다.
비가 더 쏟아졌으면 좋겠어.
빗방울마다 내 머리를 뚫고 지나갔으면 좋겠어.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남자는 그렇게 마음으로 계속 소리쳤다.
그래서 듣지 못했다.
목소리를 들은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이봐요, 이봐요? 괜찮아요?”
남자는 감싸쥔 머리를 풀고 올려다봤다. 여인이었다. 이십 대 후반, 삼십 대 초반? 우산을 쓰고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는 여인은 제법 미인이었다.
“어디가 아픈가요? 아니면 괴로운 일이 있는 건가요?”
친절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남자의 눈에는 의문이 떠올랐다.
여인이 걷기엔 깊은 밤이고, 빗줄기가 거센 밤이다.
낯선 남자에게 말을 걸기엔 적당치 않다.
여인은 알아들었다.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난 비를 좋아해요. 비 오는 날은 걷고 싶어지거든요.”
“맞아요. 그런 사람이 있죠.”
“하지만 당신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군요.”
누가 봐도 그렇다.
“나는…… 머리가 너무 아픕니다. 또 머리가 너무 뜨겁습니다. 비를 맞으면 괜찮을 것 같아 나왔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비를 맞아도 식지 않는군요.”
남자의 목소리는 느리게 흘러나왔다.
잘생긴 외모였는데, 어눌하긴 해도 음색이 부드러워 듣기 좋았다. 그리고 이어졌다.
“가던 길 가십시오. 저는 그리 좋은 남자가 아닙니다.”
어두운 밤이다.
주위엔 아무도 없다.
오직 두 남녀만 세상에 존재하는 듯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렇기에 이 말은 선처일 수도, 추파일 수도 있었다.
덮칠지 모르니까 가라고, 덮치고 싶을 만큼 당신이 마음에 든다고.
여인은 알아들었다.
“다행이네요.”
“무슨 말입니까?”
“제가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뜻이니까요.”
“그, 그럼…….”
남자는 더듬거렸고, 여인은 웃었다.
“당신이 마음에 들어요. 이 밤, 아무 생각도 나지 않게 해줄게요.”
“아무것도?”
“당신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게끔. 같이 가요.”
여인이 손을 내밀었다.
...뜨거운 시간이 지났다.
남자와 여자는 나란히 누웠다.
남자가 말했다.
“미안.”
빨리 끝났다. 여자는 실망했을 것이다.
“…….”
여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여자는 죽어가고 있었다.
실망한 건 남자에게가 아니었다. 자신에게 실망했다.
취정요희(取精妖姬).
여인은 그런 이름으로 불렸다. 여태 얼마나 많은 남자의 양기를 취해 내력을 쌓아올렸는지 모른다. 족히 오백여 명은 넘었다.
오늘 밤 이 남자는 야식이었다.
그리고 ‘미안’이란 대사는 원래 자신의 것이었다.
그런데 남자가 하고 있다.
원래라면 남자는 양기가 모두 빨려 쭈글쭈글 노인이 되어 있어야 했고, 그런 남자를 보며 그녀는 상큼한 미소를 머금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반대다.
모든 음기를 모조리 빨렸다. 임자를 만난 셈이었다.
게다가 남자는 친절하고 상냥하기까지 하다.
미안하다고 사과했으며,
거울까지 가져왔다.
얼굴에 비춰 준다. 거울 속에는 쭈그러든 노파가 힘없이 눈을 감으려 하고 있었다.
“어때? 예쁘지 않아?”
남자가 물었다.
여자는 대답할 수 없었다.
“미안.”
남자는 다시 사과했다. 하지만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할멈이 틀렸어.”
“…….”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게 해준다고 했던 말. 내 근심은 떠나지 않아. 머리가 너무 아파. 머리가 너무 뜨거워.”
남자가 일어났다.
여자는 자신의 시간이 다 되어가는 걸 알 수 있었다.
곧 사라진다.
사라지기 전 묻고 싶었다.
누구냐고?
“흐으으으으……”
물음은 신음소리로 흘러나올 뿐이었지만, 남자는 알아들었다. 다들 그랬으니까. 어차피 물어볼 말은 뻔하니까.
“선우진.”
“…….”
그녀가 웃었다. 들으나 마나였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남자가 바라봤다.
“난 비를 더 맞아야겠어. 머리가 너무 아파. 머리가 너무 뜨거워.”
“…….”
“잘 가.”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여인의 몸이 부서졌다. 모든 생기를 빼앗긴 탓에, 마치 마른 나무가 스러지듯 흩어졌다. 남은 건 뼈와 머리카락뿐이었다.
“무섭네.”
남자는 밖으로 나갔다.
아직 비는 거칠게 쏟아지고 있었다.
선우진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머리가 너무 아프다. 머리가 너무 뜨겁다. 좀처럼 식지 않는다. 제발, 열기가 가라앉길. 그래서 귀곡자가 남긴 암호를 모두 해독해내길 바랐다.
그렇게 되면 공청석유를 차지할 수 있다.
‘공청석유, 공청석유, 공청석유, 공청석유. 공청석유, 공청석유, 시발 공청석유, 공청석유, 공청석유, 공청석유. 공청석유, 공청석유, 공청석유, 공청석유, 공청석유. 공청석유, 공청석유, 시발 알 수가 없어. 해독이 안 돼. 공청석유, 공청석유, 공청석유. 공청석유, 공청석유. 공청석유, 공청석유, 공청석유. 공청석유, 공청석유, 공청석유, 공청석유, 공청석유. 공청석유, 유령곡, 공청석유, 공청석유…….’
빗속을 다시 걸었다.
이젠 어떤 여인이 말을 걸어도 그냥 가라고 해야지.
그냥 머리만 식었으면 좋겠어.
어서 빨리 해독해내면 좋겠어.
성숙노괴가 죽었으면 좋겠어.
‘공공공공공공공공공공공공공공공공공공공공공공공공공공공공공공공공공공공공공공공공공공공공공. 흐흐흐흐.’
**
성숙노괴가 올라온 건 거의 반시진(1시간)이 지난 뒤였다.
기다리는 동안 후공은 천공단의 보고를 받았고, 향후 계획에 대해 말하고 또 지시했다.
성숙노괴가 올라왔을 땐, 천공단은 떠나고 없었다.
대신 술호리병 두 개를 남겨놓고 갔기에, 후공은 성숙노괴에게 그중 한 병을 건넸다.
”잔은 없습니다.“
“고맙네. 오늘 같은 날은 나발이지.”
절벽 끝자락에 나란히 앉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술만 마셨다.
안주는 밤하늘의 별이었다.
한참 후,
먼저 입을 연 건 성숙노괴였다.
“천공단이었나?”
아래쪽에서 인기척도 느꼈고, 없던 술병이 생겼기에 떠오른 건 천공단이었다.
“네.”
“왜 소개시켜주지 않고?”
“기회가 또 있겠죠.”
성숙노괴는 고개만 끄덕였다.
배려로 받아들였다.
말은 그리 했어도, 솔직히 이 밤 여러 사람과 번잡스럽게 인사를 나누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 밤 혼자였다면 그건 그것대로 외로웠으리라.
그런 점에서 천화서고 대공자가 곁을 지켜주어 고마웠다.
“은혜는 잊지 않겠네.”
“당연한 말씀을.”
성숙노괴가 슬쩍 바라봤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제갈세가에서는 사양하더니 대답이 달라졌다.
그때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데, 지금은 이 대답이 또 마음에 들었다. 마치 친한 친구가 곁에서 퉁명스럽게 말하는 것 같았다. 술도 마시고 있겠다, 위로 받는 느낌이었다.
‘묘한 친구야.’
어떻게 된 게 점점 마음에 들었다.
첫인상은 사람이 까다롭고 격식을 따지겠거니 했는데 소탈하기 짝이 없었다. 말이 많지 않으면서도 언행이 적절해,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어린 나이라는 것조차 잊게 된다.
마치 친구 같고, 또 친구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하니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 나이에 천공단의 수장인 건가.
자연스럽게 모두를 아우르고 있음인가.
그럴지도.
“대공자.”
“네.”
“원하는 게 있나? 말해보게. 자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들어줌세.”
“무엇이든 말입니까?”
“그래.”
“평소 허풍이 심하신 편인가 봅니다.”
“하하하!”
성숙노괴는 그만 껄껄 웃고 말았다.
이 밤, 웃을 일이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마음이 벌써 편안해지고 있었다.
“뭐 하늘의 별을 따달라면 곤란하긴 하네.”
“원하는 게 하나 있긴 합니다.”
“말해 보게.”
“제 손에 죽어 주십시오.”
“……?”
생각지도 못한 말에 성숙노괴가 놀라 눈이 커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천화서고 대공자가 그저 앞쪽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을 뿐이었기에 성숙노괴는 부루퉁 입을 내밀었다.
죽인다는 것이 액면 그대로는 아닐 터.
“말을 쉽게 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후후.”
“내 목숨이야 알아서 쓰게. 뭐 대단하다고.”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죽기밖에 더하겠나.”
“그렇긴 합니다. 그럼 내일 죽이겠습니다.”
“빠르구만.”
죽인다는 사람도, 죽는 사람도 태연히 술을 들이켰다.
“내일 죽고, 한동안은 너구리로 지내십시오. 보름이나, 길면 한 달 정도겠군요.”
“그 정도야 뭐. 소원치곤 싱겁구만.”
벌컥, 벌컥.
술을 들이부은 다음 성숙노괴가 이유를 물었다.
“선우진을 만나려 합니다.”
대답이 뜻밖이어서 성숙노괴가 갸웃했다.
“선우진? 어떻게?”
“선우진이 저를 찾아올 겁니다. 노조께서 살아있으면 머뭇거릴 테지만, 세상에 없다는 걸 알면 편히 움직일 수 있을 테죠.”
“아…….”
성숙노괴는 그제야 이해했다.
많은 말이 생략되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 근처에 공청석유가 있다고 한 말이 단서다.
한데 아직 이곳을 찾는 이가 없다.
그건 곧 선우진이 아직 문서해독을 못했다는 뜻이 된다.
알고 있다면 이곳을 최소한 점유는 하고 있어야 하건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으니, 아예 모르고 있다는 의미.
하루하루 지날수록 선우진은 조급해질 것이다.
더불어 선우진과 뜻을 함께한 이들도.
하지만 선우진 입장에서 ‘성숙노괴’가 죽는다면?
선우진에겐 운신의 폭이 넓어진다.
굳이 숨어 지낼 이유가 없다.
만약 그때,
천재 중의 천재가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도움을 청할 가능성이 높다. 즉 선우진을 굳이 찾아 나설 필요 없이, 찾아오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같은 수법이다.
선우진이 자신에게 접근했던 것처럼, 천화서고 대공자는 같은 방식으로 선우진을 불러들이려는 것이다.
“허허…… 내가 죽을 만하구만.”
성숙노괴는 혀를 내둘렀다.
어디 접근뿐인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선우진이 살아있는 것처럼, 또 죽은 줄로만 알았던 ‘성숙노괴’도 살아있는 셈이 된다.
이 정도면 판박이었다.
“자네, 도대체 누군가?”
이런 발상은 천재라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강호 생리를 꿰뚫어보는 자에 가까운 것이다.
“천화서고 대공자.”
“끄응.”
태연한 대답에 성숙노괴가 앓는 소리를 냈다.
어떻게 된 게 젊은 친구가 어려워하지도 않고 긴장감도 없는 것이다.
“그보단, 왜 묻지 않습니까?”
“뭘 말인가?”
“공청석유의 장소. 이 부근입니다. 확인해보고 싶지 않습니까?”
과연 가짜가 남겨져 있는지.
“됐네. 관심없어. 이제 자넬 믿기도 하고.”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진심이 묻어났다.
후공은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품에서 옥병 하나를 꺼내 건넸다.
“뭔가?”
받아든 성숙노괴가 갸웃했다.
“공청석유입니다.”
“어어?”
“네, 가짜로 바꿔놓은 그 철두철미하고 잔악한 자가 접니다.”
“무, 무슨……?”
성숙노괴의 눈은 이미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우분께서 찾던 것이고, 그 덕분에 찾았습니다. 마땅히 아우분의 유산이기에 드리는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말이야 갖다붙이기 나름이다.
아우인 귀곡자와는 일면식도 없을 터라, 의미를 두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어떻게 믿고 이런단 말인가.
“어차피 내일이면 노조는 죽습니다. 이제 내려가죠.”
천화서고 대공자가 일어나 성큼 걸어갔기에 성숙노괴가 서둘러 뒤따랐다.
“같이 가! 아니, 죽어준다고! 그건 상관없으니까 그 전에 이야기 좀 하세. 궁금한 것이 너무 많단 말이네. 천공단은 이 사실을 알고 있나? 공청석유 말일세. 그리고 혹시 눈치챘나? 아까부터 새가 계속 머리 위를 날아다니네. 새들이 이상해. 한 마리씩 돌아가며 날거든! 하얀 새, 검은 새, 빨간 새. 꼭 감시하는 것 같단 말이지. 이보게, 자네 듣고 있나?”
후공은 그저 웃어보이곤 하늘을 올려다봤다.
지금은 붉은 깃털을 한 색관조가 날고 있었다.
“내려와라.”
낮게 말했다.
성숙노괴가 뭔소린가 하고 새를 바라봤다.
[까르르르르르르르르르!]
색관조는 대화를 들었기에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고 있었다.
내려오며 붉은 새였다가 검은 새가 되었다가, 주인의 어깨에 앉았을 땐 하얀 새가 되었다.
“뭐, 뭐야?”
각각 다른 새인줄 알았는데 한 마리였다.
그리고 새의 주인은 천화서고 대공자.
하지만 놀라움은 끝이 아니었다.
[인사 올려요. 성숙노조!]
색관조가 인사하고,
[그윽.]
색관조 위에 올라탄 금섬도 고개를 까닥하곤 눈웃음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