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159화 (159/460)

159화. 죽음이 예약되다.

사람은 변한다.

환경에 따라, 처지에 따라, 혹은 빠르게, 혹은 더디게.

방향은 좋은 쪽일 수도, 나쁜 쪽일 수도 있다. 아니다. 모두 좋은 쪽이다. 그때는 좋은 쪽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결정을 나쁜 방향이라 믿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최선이라고 생각했다면 더욱 그렇다.

천금서고도 그랬다.

변했다.

이야기는 한참이나 과거로 가야 한다.

이백 년 전쯤이다.

천금서고는 멸문의 위기에 처했다. 그것이 변화를 불러왔다. 칼의 무서움을 보았다. 칼 앞에 지혜와 지식이 소용없다는 자각이 변화의 시작이었다.

그리하여,

천금서고는 가문의 힘을 낮과 밤으로 나누었다.

낮에 속한 이는 책과 붓을, 밤은 칼을 들었다.

형제 중 누군가는 낮이 되어 천재 가문의 위상을 걷고, 또 다른 이는 밤이 되어 어둠을 걸었다.

어둠은 마도의 길에 들어섰다.

당연했다.

천금서고에는 무공에 대한 기반이 없다. 오랜 세월 축적해 나가기엔 시간이 오래 걸린다. 빠르게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정종의 길은 멀다.

하지만 마공이라면 가능했다.

그래, 시작은 마공을 통해서다. 그렇게 다짐했고, 천금서고는 변화를 맞이했다. 좋은 방향이라고, 옳은 방향이라고 여겼다.

또 자신했다.

마공의 문제점은 단지 부작용.

주화입마를 불러오고, 명을 단축시키며, 제약이 따른다.

그 부분을 해소하고 메꿀 수 있다면 그때부터는 더 이상 마공이 아니다. 정공이 된다.

마공은 사악하다고?

그건 방법을 찾지 못한 어리석은 자들의 변명일 뿐이다.

모험심 없은 놈들의 말 따위.

선우진도 그리 생각했다.

그도 마공에 닿았다.

흡음대법(吸陰大法).

음기를 취해 내력을 쌓아올린다.

취하는 건 쉽다. 또 흔하고 많다. 음한 기운을 품은 영물이나 영초를 굳이 찾아다닐 필요가 없다.

세상의 모든 여인이 음기를 지닌 영약이었다. 교합을 통해 채음했다.

이제까지 채음한 여인의 수는 육백 명이 넘었다.

물론 부작용도 있다.

누적된 음기로 양기가 소멸된다. 또 여인화된다. 그것을 해결하는 건 활양초. 오래 전 복용을 마쳤다.

또 하나는 부조화.

사람이 각기 다른 만큼, 음기도 조금씩 다른 성질을 띤다. 불순해짐을 막을 길이 없다. 답은 있다. 천지의 기운이 오랜 세월 쌓여 형성된 공청석유. 비로소 융화시킬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참 우습지 않느냐. 빠른 성취를 위해 요구되는 것이 오랜 세월, 가히 수천 년 동안 쌓이고 쌓인 공청석유라니.’

백부는 그렇게 말했다.

선우진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백부는 찾아주겠다고 했다. 찾았다. 삼 년 전이다. 귀곡자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백부는 돌아오지 않았다.

천금서고의 밤에 속한 자.

가문의 이름을 잊고, 음양노괴라는 별호로만 불렸던 백부의 소식은 끊어졌다.

일이 잘못되었음은 자명했다.

그래서 선우진이 떠올린 건 귀곡자.

귀곡자라면 불의의 상황을 대비해놓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에 이르렀고, 맞았다. 결국 성숙노괴에 접근했고 문서를 획득했건만 풀어낼 수 없었다.

귀곡자는 얼마나 뛰어난 자이었음인가.

하루 하루 미쳐버릴 것 같았는데, 운이 좋다.

천재 중의 천재.

삼대서고 중 최고라는 천화서고 대공자가 나타났다.

하하하하, 마치 해결해주겠다는 듯.

공청석유를 찾는다면, 그래서 음기를 융화해낸다면 단번에 화경을 돌파해 화의 중에 이르게 될 것이다.

저택의 처소.

파라락.

선우진은 장삼을 걸쳤다.

들뜬 안색은 차분해졌고, 눈빛은 맑고 투명해졌다. 슬쩍 미소 지어 표정을 가다듬었다.

거울 속에는 단정한 청년이 있었다.

미소도 정갈하다.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암주, 아무래도 상황이 공교롭습니다.”

수하인 흑멸대주였다. 머리를 조아린다.

선우진은 피식 웃었다.

“넌 설마 그가 의도적으로 내게 접근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냐?”

흑멸대주의 충정은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스운 건 어쩔 수 없다.

“상대는 천화서고 대공자입니다.”

“그래, 그는 천재요, 최근 강호를 뒤흔들고 있는 자이지. 하지만 그가 성숙노괴를 알겠느냐? 아니면 나를 알겠느냐? 또 내가 공청석유의 비밀에 닿았음을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느냐?”

“하오나…….”

“그만!”

“…….”

“난 살피고 두드려볼 시간이 없다. 그럴 이유도 없고. 그저 천화서고의 천재는 운이 없는 사람이 될 뿐이다. 그가 암호 해독을 마치고 나면 그에게 음전(陰箭)을 남길 것이다. 죽음은 예약될 것이고, 이루어질 것이다. 그뿐이다.”

“존명!”

흑멸대주가 머리를 조아렸다.

음전의 무서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흑멸대주는 더는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때 창가 쪽에서 새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창가에 서 있는 중년 사내였다.

그의 손에는 부채가 들려 있었다.

“그대 생각에 천화서고의 천재는 며칠이나 걸릴 것 같나?”

“빠르면 사나흘. 그랬으면 좋겠군.”

“굉장하군. 행사를 앞당겨도 되겠어.”

그 말에 선우진이 갸웃했다.

“화공신타 때문에 어그러진 것 아니었나?”

“그럴 리가. 본 맥은 공청석유보다 이번 행사를 더 중요시하고 있다네.”

“후후, 재밌겠군. 기대하지.”

“다녀오게.”

**

선우진은 영화루에서 만날 수 있었다.

“천금서고에서 천화서고 대공자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말씀을 전해주십시오.”

“천금서고에서요?”

“그렇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안내는 즉각 이루어졌고, 곧바로 천화서고 대공자의 환대를 받았다.

그리고 일말의 불안도 사라졌다.

선우진은 의심하려 했건만, 도리어 자신이 의심을 산 탓이었다.

“선우 형을 이리 보니 반가운 마음이야 금할 길이 없습니다만, 우연이 지나치다 싶군요. 선우 형께선 제가 이곳에 있는 건 어찌 아셨습니까?”

“기루를 휘어잡고 있다는 한 사내의 이야기가 저잣거리에 파다하니, 모를 수가 있어야지요.”

“하하, 이런…… 그렇게 된 겁니까?”

선우진도 웃음을 머금었다.

가벼운 이야기가 오갔다.

왜 이 지역에 오게 된 건지, 또 최근 휘도는 소문들에 대해서도 말을 나누었다. 화공신타가 거론되고, 성숙노괴며, 공청석유에 대한 말들이었다. 서로의 가문에 대해서도 묻고 답했다.

모두 쓸데없는 이야기들이었다.

후공은 선우진을 작업치고 있음이고, 선우진은 천화서고 대공자를 이용하고 죽일 생각뿐이었다.

조용한 건 천화서고 대공자의 호위의 형태로 한쪽 구석에 석상처럼 서 있는 너구리뿐이었다.

- 놀랍군. 선우진이 맞네.

성숙노괴는 초반에 확인해주었고, 멀쩡히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선우진을 보며 내심 고개를 저어댄 터였다.

이 자리에 찾아온 선우진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자신과 함께 있을 때 불안해하며 안절부절못하던 청년은 어디에도 없었다. 신색이 맑고 몸가짐이 바른 청년의 모습이라니.

그런 느낌은 후공도 마찬가지였다.

선우진은 매우 뛰어난 연기자라 할 만했다. 또한 자신을 감추는 능력이 탁월했다.

무공을 익힌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물론 보이지 않을 뿐이다.

성숙노괴가 왜 눈치채지 못했는지 이해했다.

‘음기.’

음한 기운이 그득한데 어떤 형태로 둘러 드러내지 않고 있다. 가히 음기가 끝이 없는 듯하다. 그리고 불순하다.

알아차린 건 삼악이었다.

정순한 삼악의 기운은 선우진이 들어서기도 전에 발작을 일으켰다. 불쾌감을 드러냈다. 불순함을 당장이라도 정화시키겠다는 태세였다.

독이든 뭐든 집어삼키는 삼악이 아닌가. 게다가 풍열에 이어 공청석유까지 복용한 터라, 그 정순함은 이제 말로 할 수 없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여인에게서 채음한 것이로구나.’

음한 영초나 영물을 통해 이뤄낸 것이 아니다.

그랬다면 정순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만한 음기라니.

대체 얼마나 많은 여인의 생기를 음기를 흡수한 것인가.

공청석유가 필요한 이유도 짐작이 된다.

반드시 얻어야 하는 것일 터.

그래서,

“선우 형께선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았군요.”

모른 척 판을 깔아주었다.

“네, 저는 그저 학문을 이룸에 있어 최고가 되고 싶을 따름입니다. 오늘 이렇게 찾아뵌 것도, 부끄럽습니다만 대공자를 통해 저를 시험해보고 제 위치를 가늠해보고자 함입니다.”

바로 본론이 튀어나왔다.

“저를 통해서 말입니까?”

“네. 학문과 무공 두 마리 토끼를 쫓고 있는 대공자보다 제가 더 못하다면, 오늘의 만남을 채찍으로 삼으려 합니다.”

“제가 그런 주제가 되겠습니까?”

“되다 말다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짐짓 고민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다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천금서고를 통해 저 또한 부족함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도 있겠군요. 좋습니다. 어떤 방식인지요?”

“제가 문제를 내겠습니다. 암호문을 보시고 해독해 보십시오. 저는 꽤 오래 걸렸습니다.”

바로 지필묵이 준비되었다.

지면에 여러 문양과 도형, 그리고 글자가 섞인 후 붓이 내려졌다.

후공은 바라보며 내심 혀를 찼다.

‘이 녀석, 이 와중에도 잔머리를 굴리는군.’

선우진은 문서 전체를 적지 않았다.

암호 문서의 후반부다.

최종 지점에서 막혔다는 뜻이었다.

하긴 당연한가.

문서의 전반부는 개요. 상황 설명이다. 전반부를 보면 이 문서가 공청석유를 찾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니, 드러낼 수 없는 일이긴 하다.

문서의 중반부터 구체적인 지형에 대한 내용이 이어진다.

그리고 최종 지점은 더 난해해진다.

선우진은 그 지점을 알려달라고 들이밀고 있는 것이다.

한참을 바라만 봤다. 미간도 찡그려주었다.

그러자 선우진이 미소를 머금었다.

“대공자, 바로 답을 알 수는 없을 겁니다. 저는 이 암호를 해독함에 칠 일 정도가 걸렸습니다. 그렇기에 대공자께서 칠일 전에 문서를 해독해내신다면 저는 깨끗이 승복…….”

선우진이 말을 멈췄다.

스윽, 스윽. 슥.

새로운 화선지에 붓이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천화서고 대공자가 이윽고 붓을 가만히 내려놓았다.

선우진은 놀라 멍해지고 말았다.

“이, 이게…… 뭡니까?”

“크흠, 해답입니다만.”

태연한 대답에 선우진은 손이 덜덜 떨려오는 걸 참느라 안간힘을 써야 했다.

- 방위는 북. 푸른 소. 12. 7

그토록 염원하던 마지막 지점이 눈앞에 드러난 것이다.

푸른 소.

‘청우산이구나.’

12는 봉우리의 순서. 북쪽으로부터. 그리고 그 봉우리에서 일곱 번째 동굴,

‘찾았다. 대공자, 너는 스스로 죽음을 앞당기는구나.’

선우진은 심장이 미칠 듯이 뛰어 그 소리가 들리지나 않을까 걱정될 지경이었다.

물론 듣고 있었다.

후공도, 성숙노괴도.

심장 박동이 요동치고 있음이다.

“선우형, 제 답이 맞습니까? 너무 쉬운 문제를 내신 탓에 당황스럽습니다. 혹시 이건 잠시 머리를 푸는 의미일까요?”

“아, 아닙니다. 맞습니다. 솔직히 놀라워 숨을 쉬는 것조차 쉽지 않군요. 제가 대체 누구와 견준 건지……. 하지만 어떤 원리로 풀었는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선우진으로선 마지막 확인이었다.

이내 들려온 말에 선우진은 어쩔 수 없이 입술에 웃음을 매달 수밖에 없었다. 이보다 더 확실할 수가 없다. 하마터면 고맙다는 말을 내뱉을 뻔 했다.

대신 길게 한숨을 내쉬고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과연 명불허전입니다. 천하가 말하길 삼대서고 중 천화서고가 으뜸이라 하더니,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윽고,

선우진이 작별을 고했다.

예를 취하고도 아쉬운 듯 손을 내밀었다.

“대공자,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하하, 영광이란 말은 과하군요.”

서로 손을 맞잡았다.

그 사이, 오갔다.

선우진은 음전을 심었고, 후공은 천향을 남겼다.

맞잡은 손에 서로는 죽음을 예약했다.

후공은 다섯 개의 음유한 기운이 침투한 것을 알아차렸다.

내심 웃음이 났다.

‘재밌군.’

들어선 순간,

삼악이 흉폭하게 일어나 불순함을 집어삼켰다.

음유한 화살촉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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