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그저 손바닥 위.
선우진은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저녁이었다.
분명 기루에 들어설 땐 석양이 지고 있었는데, 저녁이다.
사방이 어두워진 걸 본 탓에 선우진은 다시금 놀라움이 되살아났다.
‘하하, 이 경이로움이란…….’
말도 안 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절로 웃음이 터진다. 그래서 입밖으로 웃음소리가 나오지 않게 이를 악물어야 했다.
‘천화서고 대공자여, 넌 대체 무엇이냐?’
아침에서 저녁도 아니고, 어젯밤에서 오늘 저녁도 아니다. 방금 전 석양에서 지금 이 저녁에 ‘그’는 끝냈다. 아니다. 말은 바르게 하자. 정확히는 ‘보자마자’ 해독해냈다.
이쯤이면 사람이 아니다.
세상에 다시 없을 재능.
천재 중의 천재.
그 무엇으로 수식한다 해도 부족하다.
저절로 반성하게 된다.
넘볼 수 있는 자가 아니다.
그래, 인정하자.
천화서고 대공자는 그저 경이로움이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대공자, 손님은 가셨나 보군요.”
“네. 방금 가셨습니다.”
“그럼 기녀들을 다시?”
“크흠, 루주 속상합니다. 오고 있는 것 아니었습니까?”
“호호호호호호, 잠시만 기다려봐요.”
대화 소리에 이어 기녀들이 ‘대공자님~~~~’ 아양을 떨며 콧소리를 내는 소리가 들려온다. 선우진은 이미 한참을 걸어왔지만 곁에서 듣는 것처럼 들을 수 있었다.
‘병신 새끼.’
천재 중의 천재.
세상에 다시 없을 재능.
경이로움.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죽음이 예정된 것도 모르는 놈이 천재여 봐야. 곧 죽게 될지도 모르고 기녀들 속에 파묻혀 있다면야.
그래, 즐겨라.
너의 삶은 얼마 남지 않았다.
앞으로 고작 반시진(약 1시간).
음전은 제대로 침투되었다. 반시진이 지나면 다섯 개의 음전은 몸속에서 형태를 갖춘다. 화살촉처럼 바뀌어 경맥을 헤집고 다니면서 갈가리 찢어놓을 것이다.
죽음을 선사한 후 음전의 기운은 감쪽같이 소멸된다.
흡음대법의 공법은 모두 그렇다.
장법이든 암법이든 흔적 없이 다가가고, 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그리고 예정해둘 수 있다.
시간차는 반시진.
이후 발동된다.
이 강호에 기운을 침투시켜 시간차를 두고 죽음을 예정해둘 수 있는 자가 누가 있을까. 물론 과거에는 있다고 들었다. 그래, 이젠 과거다.
천하제일인이자 무림맹주 후공.
사실인지 아닌지, 그가 과연 할 수 있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강호 역사상 가장 강하고, 존재만으로 마도를 억제시킨 위대한 무인이자 괴물은 더 이상 세상에 없으니까.
성숙노괴에게도 음전을 시도해보려 했었다.
하지만 마음을 접었다.
음전을 침투시킬 수는 있어도 그 순간 알아차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성숙노괴는 화경의 중에 이른 자. 그도 죽겠지만, 간파 당한 순간 나도 죽는다.
그래서 실행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잘한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성숙노괴는 화공신타에게 죽었고, 천화서고 대공자를 통해 문서는 해독되었다.
운이 좋다.
하늘이 돕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데 화공신타는 누굴까?
대체 어디에서 튀어나온 자인가?
그 의문 끝에 선우진은 웃었다.
‘하긴, 나도 갑자기 튀어나온 자이긴 하지.’
이 강호에 갑자기 튀어나오는 자가 어디 한둘일까.
그나저나 화공신타는 성숙노괴의 배를 갈랐을까?
위장 속에서 문서는 제대로 형태가 남기는 했을까?
정말 해괴한 자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 암주.
어느 한 지점, 전음이 들려왔다.
흑멸대주였다.
- 보았느냐?
- 네. 천화서고 대공자는 여전히 기녀들과 어울리고 있습니다.
- 반시진이다. 그의 죽음을 확인하라.
- 네? 그게 무슨…….
- 들은 대로.
- 서, 설마……?
죽음의 확인.
이는 음전이 이미 시전되었다는 뜻이다.
또한 문서 해독이 완료된 것임을 의미했기에, 흑멸대주의 전음은 경악 속에 떨려 나왔다.
- 그래, 그가 해냈다. 그는 뛰어난 자. 혹시 모른다. 숨겨놓은 한 수가 있을 수 있다. 가능성은 없지만 중상에 그칠 수 있다. 반드시 목숨을 거둬라. 그의 호위는 너구리. 너구리도 마찬가지로 말끔히 처리하도록.
- 존명! 경하드립니다.
흑멸대주가 그 자리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는 흑멸대원 9인이 아직 남아있는 기루로 향했다.
*저택 안.
경악의 시간이 이어졌다.
중년 사내, 철선인은 묻고 또 물었다가 돌아온 대답이 한결같자 비로소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다음은 찬사.
어찌 그럴 수 있는가부터, 그런 게 가능한 일이냐며 천화서고 대공자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다.
선우진은 담담히 기다려주었다. 이는 당연한 수순일 뿐이다. 심지어 자신도 아직까지 얼떨떨함이 가시지 않는 상태인 것이다.
“죽이기엔 재능이 아깝긴 해.”
“그 재능이 다른 쪽으로 꽃피면 곤란한 일이네.”
“맞는 말이야.”
“이제 끝이로군. 아니, 시작인가.”
그 말과 함께 철선인의 안색이 조금 경직되었다.
그리고 묻는다.
“공청석유의 약속은?”
선우진이 피식 웃었다.
“배신을 걱정하는 건가? 그대답지 않군.”
“무려 우리 사이에 놓여 있는 것이 공청석유이므로…… 그렇게 되고 마네.”
하긴 그렇다.
보물은 없어도 걱정, 있어도 걱정이다.
“철선인. 날 무시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무슨 뜻이지?”
“공청석유는 나에겐 비로소 출발점일 뿐이야. 음양노괴라 불린 백부의 뒤를 잇는 암주로서. 또한 천금서고와 유령곡과의 동맹의 견고함을 상징하는 일이기도 하니까.”
“후후.”
철선인이 비로소 웃음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두 사람은 각기 서신을 작성했다.
세상일이란 모르는 것이다.
웃으며 배신하는 일은 흔하며, 예기치 않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화공신타, 화공신타, 화공신타…….
또한 귀곡자가 남겨놓은 가르침도 영향을 끼쳤다.
그는 불의의 상황에 대비해 표국에 도자기를 맡겼다. 예정된 시간 안에 자신이 찾아가지 않을 시, 그 시일이 지날 시에 표국은 도자기를 미리 내정된 장소로 발송하게 되어 있었다. 공청석유의 위치를 담은 채로. 그렇게 성숙노괴의 손에 도자기가 전달되었다.
둘은 그 가르침을 교훈 삼았다.
선우진은 천금서고로 보낼 서신을,
철선인은 상부로 보낼 서신을 작성했다.
상황설명과 위치를 상세히 기록해두었다.
이윽고 서신은 전서매의 다리에 묶였다. 두 전서매는 함께 솟구쳤다가 밤하늘에서 방향이 나뉘었다.
선우진과 철선인도 저택을 나섰다.
청우산이다.
공청석유를 찾는다.
[그윽.]
어디선가 두꺼비가 소리냈지만, 그딴 건 들리지도 않았다.
**
처음엔 여유로웠다.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러다 차츰 굳어졌다.
‘어떻게 된 거지? 왜?’
반시진이 지났기에, 흑멸대주는 이제 식은땀이 났다.
들려야 할 비명소리 대신 대공자의 웃음소리만 여전하다. 심지어 신음소리조차 없었다.
‘뭔가 잘못되었다.’
주군의 음전이 제대로 시전되지 않았음인가?
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 것일까?
그래, 그럴지도.
사람이 제각각이니 오차 범위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독였지만, 소용없다. 이내 불안이 차올랐다. 시간은 지금 이 순간도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설마 음전이 통하지 않는 자인가?’
그 순간 한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그리고 들려온 목소리.
“무슨 생각 해?”
목소리는 오른쪽이다. 그것도 바로 옆이다. 흑멸대주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우측으로 돌려갔다.
그곳에 보이는 건,
너구리.
즉 천화서고 대공자의 호위다.
“누……구?”
“너구리인데?”
너구리가 갸웃하더니 답했다.
흑멸대주의 안색은 더없이 창백해졌다.
너구리란 건 안다.
문제는 곁에 있는 것만으로 몸이 덜덜 떨려온다는 점이었다. 또한 전신이 결박된 듯 꼼짝도 할 수 없다.
그래서 누구? 였다.
아직 손속이랄 것도 없고, 그저 곁에 있을 뿐인데 그저 기세만으로 옥죌 수 있는 존재.
그런데 그냥 너구리라고?
그런데 고작 천화서고 대공자의 호위라고?
“왜 그래? 너구리 처음 보냐?”
“…….”
“누……누구?”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 피폐함이 더해져가는 가운데, 흑멸대주가 다시 물었다.
너구리가 웃었다.
“정확히 물어야지.”
“어, 어떻게…….”
“됐다.”
너구리가 손으로 흑멸대주의 이마를 가리켰다.
순간 미간이 화끈했다.
흑멸대주의 미간에 좁쌀만 한 구멍이 생겼다.
하지만 성숙노괴의 나환지는 휘돈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 흑멸대주의 뒤통수는 아예 터져나갔다.
허물어지는 흑멸대주를 보며 너구리가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였다.
물음은 이해했다.
왜 당신 같은 사람이 고작 천화서고 대공자의 호위로 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늦었지만, 너구리가 답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가 나보다 뛰어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구나. 향후 차이는 더 벌어질 테지. 재수없지만 현실이니 어쩔 도리가 있나. 물론 호위는 임시란다.”
**
청우산 만연봉.
공청석유의 동굴에 두 사람은 내려섰다.
사방은 칠흑같이 어두웠지만, 선우진이든 철선인이든 둘의 눈에는 대낮보다 더 밝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알고 있는 그대로의 공청석유가 눈앞에 있었기에 웃고 또 웃었다. 향이며, 색, 맺혀진 바닥의 옥석까지 공청석유가 확실했다.
감사도 잊지 않았다.
“천화서고 대공자여! 고맙구나.”
“그대는 죽음으로 목숨을 다해 우리에게 보물을 선사하고 떠났구나!”
영광은 돌리고, 실익을 취했다.
먼저 나선 건 철선인이었다.
대략 열 방울 정도, 천지의 기운은 잔잔히 맺혀 있다.
철선인은 그중 절반의 분량을 준비해 온 옥병에 담았다.
그가 돌아서려 할 때,
선우진은 그의 등 뒤에서 미소 짓고 있었다.
파팟!
선우진이 철선인을 점혈했다.
마혈이 점혈되어 몸이 굳은 철선인이 눈을 부릅떴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진정해.”
“네, 네놈이 결국!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이러는 것이냐!”
“뒷감당?”
선우진이 피식 웃으며 철선인을 번쩍 들어올렸다.
철선인의 두 눈이 공포에 질렸다.
이대로 날 던져버리는 것인가?
하지만 아니었다. 선우진은 철선인을 동굴 한쪽 벽에 기대놓았다.
그 앞에서 선우진이 말을 이었다.
“철선인. 내가 뒷감당을 할 일은 일어나지 않아.”
“그럼 왜?”
“나는 힘을 취하는 데 머뭇거리고 싶지 않을 뿐이야. 즉시.”
“젠장……. 넌 제멋대로군.”
철선인은 그제야 이해했다.
즉시.
선우진은 이 자리에서 공청석유를 복용할 생각인 것이다.
연공 중에 화를 당할 것이 두려워 자신을 점혈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안심이 되면서도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양해를 구했다면 순순히 점혈당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는 한편, 기대도 된다.
선우진이 익힌 흡음대법의 완성은 공청석유.
고작 25세…….
화경의 고수가 탄생하는 것을 눈앞에서 지켜보게 되는 것이다. 누구도 걷지 못했던 길을 선우진은 걷는 셈이었다.
선우진이 공청석유 위로 검결지를 맺어 한 바퀴 휘저었다.
한 방울이 딸려와 떠올랐고, 선우진의 입안으로 쏙 들어갔다.
순간 선우진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내 탄성을 터뜨렸다.
“하아…… 향이 놀라워.”
“그래?”
“이 세상에 없는 향이야. 엄청 나.”
“그 정도인가?”
“그래. 그런데…… 그런데…… 왜……?”
“응?”
눈을 감고 있던 선우진이 한순간 눈을 떴다. 눈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동시에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비틀거렸다. 손은 검게 변해 있었다.
이미 목이며 얼굴도 검붉어졌고, 수많은 핏줄이 지렁이처럼 튀어나와 마구 꿈틀거렸다.
‘독?’
“철선인…… 네, 네놈이!”
독은 금섬의 독이었지만 선우진이 알 수는 없는 일.
선우진으로선 철선인이 먼저 담은 후 그사이 교묘히 독을 탄 것이라고밖에는 볼 수 없었다.
“나…… 난 아니다. 내가 그럴 리 없지 않느냐!”
“닥쳐!”
소리치곤 선우진이 풀썩 쓰러졌다. 독에 잠시되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그래도 이대로는 죽을 수 없었다. 죽더라도 놈을 죽이고 간다. 기었다. 그렇게 다가가 철선인의 목을 졸랐다.
둘 다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한 사람은 중독되어 시뻘겋고, 한 사람은 점혈된 상태로 목이 졸려서 시뻘겋게 되었다.
“난…… 아니다. 이건 함정이다. 내가 담은 것도…… 마찬가지…….”
“그래…… 그게 좋겠군.”
선우진이 철선인의 몸을 뒤져 옥병을 꺼냈다.
“자, 잠깐만.”
“왜 이건 진짜라서?”
“그, 그게 아니라…… 저기 동굴 밖에…….”
철선인의 시선은 동굴 입구 쪽으로 향해 있었다.
“귀, 귀신이…… 허공에 떠 있어.”
헛소리다! 그러면서도 선우진은 시선을 따라갔다.
처음엔 못 알아봤다. 아니, 알아봤지만 믿을 수 없어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달라진 건 없었다.
그래서 눈은 점점 커져갔다. 더 커질 수 없을만큼 커졌다.
“네, 네가 어떻게…….”
천화서고 대공자.
그가 동굴 너머 허공에 둥실 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