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화 서고 대공자-161화 (161/460)

161화. 후공에 대한 복수.

“천화서고…… 대공자…….”

귀신이 아니다. 틀림없다.

선우진의 중얼거림에 철선인도 놀라 눈이 커졌다.

“천, 천화서고라니? 그가 어떻게 이곳에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허공을 딛고 서 있는 걸 보면, 저건 분명…….”

귀신 같은 것이 아니야.

철선인의 말이 멈췄지만 선우진으로선 더 들으나마나였다. 자신도 어떻게 천화서고 대공자가 허공에 떠 있을 수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당했구나.’

그저 깨달았다.

이 장소와 이 시점, 그리고 독이 말해주고 있다. 철저히 농락당했다고. 바보가 아니다. 이쯤 되니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상황이 관통되듯 이해되었다.

반점에서 들려온 목소리.

-아니 그러니까 기루에 웬 서생 놈이 들어오더라고. 천화서고 대공자라나 뭐라나.

-천화서고? 그건 또 뭐야?

-몰라. 아무튼 반반하게 생긴 데다 별 시답잖은 시 한 수 읊었을 뿐인데 기녀들이 아주 환장하고 난리인 거야. 생긴 건 솔직히 내가 더 나아.

-거울 없냐? 호수에라도 한 번씩 얼굴 좀 비추고 살아라.

-닥쳐.

우연히 들은 대화.

운이 좋았던 것이 아니었다.

그 대화는 유인하는 책략이었을 뿐.

그리고 기루에서 만났을 때는,

-선우 형을 이리 보니 반가운 마음이야 금할 길이 없습니다만, 우연이 지나치다 싶군요. 선우 형께선 제가 이곳에 있는 건 어찌 아셨습니까?

위화감없는 속임수.

그가 내게 접근했다.

성숙노괴에게 자신이 접근했던 방식이다.

자신은 스스로 얼굴이 두껍다고 생각했거늘, 천화서고 대공자의 얼굴 두께는 말로 할 수 없다. 기루도 통째로 매수한 것이라고 봐야한다.

거기에 더해 무공 수준은?

음전이 통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마저도 간파당했다고 봐야 했다.

허공에 떠 있기까지 한다.

그럼 흑멸대는?

‘모두 죽었겠구나.’

의문의 여지가 없다. 천화서고는 오래 전부터 칼을 쥐고 있었음인가. 천화서고 대공자가 천화서고의 밤인 걸까. 그도 마공을 익혔을까?

그럴 것이다.

공청석유를 이미 차지하고 독으로 바꿔놓은 다음, 이곳으로 유인한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악독한 인물인지 알 수 있다.

그런가. 서로가 죽음을 예약해 둔 셈인가.

하지만 자신의 것은 취소되었고, 천화서고 대공자는 그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타난 것. 그의 예약은 취소되지 않았다.

‘하하하하하하하!’

우습다. 마음속에서 크게 웃었다.

천재 중의 천재.

나는 누구와 싸우고 있었던 것인가.

천화서고 대공자는 내가 얼마나 같잖아 보였을까.

그때,

“크어억!”

선우진의 상념은 끊어졌다.

복부가 걷어차였다. 동굴 안쪽 벽까지 날아가 부딪혔다가 나뒹굴었다.

날려버린 건 천화서고 대공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친놈 같이 뭘 실실대며 중얼거리는 거냐.”

“네, 네놈은…… 어떻게……. 쿨럭.”

어떻게 살아있을 수 있는 것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선우진은 피를 게워내느라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무엇을 묻는지 짐작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대답은 너구리가 대신했다.

척.

동굴로 내려선 너구리가 선우진에게 다가갔다.

“선우진, 나도 살아있다만. 후후, 이렇게 널 다시 보게 되니 좋구나.”

동굴로 내려선 너구리가 선우진에게 다가갔다.

선우진은 갸웃했다.

‘나도 살아있다고? 누구?’

목소리가 낯익다. 떠올랐다. 말도 안 돼.

‘설마 성숙노괴라고?’

너구리가 가면을 벗었다.

드러난 얼굴은 교릉이 해제된 성숙노괴의 본래 얼굴이었다.

“으으으…….”

경악을 넘어선 탓에 선우진은 완전히 질려버렸다.

죽은 자와 죽은 자의 재회.

먼저 죽었던 자는 아예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성숙노괴가 살아있다는 의미는 너무 거대해, 선우진은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릴 것 같았다. 이는 화공신타까지 천화서고 대공자에게 속한 자라는 뜻이었다.

성숙노괴, 공청석유, 화공신타.

그 중심에 천화서고 대공자.

완벽한 패배다.

아예 상대가 되지 않는다.

‘허허…….’

하지만 말이야. 하지만 말이야. 하지만 말이야. 하지만 말이야.

다행이야.

반격의 실마리는 남겨놓았으니.

귀곡자의 과거를 교훈삼아 두 마리의 전서매는 이미 날아올랐으니까.

그 서신에는 이 장소와 천화서고 대공자를 만났던 상황들을 자세히 기록해두었다. 이대로 소식이 끊어지면 천화서고 대공자는 유령곡의 표적이 된다.

그래서 얼굴에 미소가 맺혔다.

그 모습을 후공이 보았다.

후공도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선우진, 네가 웃는 걸 보니 이것 때문인가 보구나.”

펄럭~.

두 장의 서신이 날아와 선우진의 눈앞에 떨어졌다.

어두운 동굴이지만, 종이 질까지 확인 가능한 선우진은 보았다.

각각 자신과 철선인이 작성해 날려보낸 서신이었기에 눈이 커졌으며,

“끼이이이이이이이이이…….”

절망감 속에 숨넘어가는 듯한 기이한 신음을 내고 말았다.

[까르르르르르! 소리가 웃겨. 끼이이이이이이이이이!]

[그윽, 그으윽! 그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 키키킥!]

동굴 밖에서 색관조와 금섬이 선우진을 따라하며 깔깔거렸다.

날아올랐던 두 마리의 전서매는 방향이 달랐지만 색관조에게 납치되었다.

이곳의 일은 철저히 감춰졌다.

천금서고에도, 유령곡에도.

이쪽은 알고, 상대는 모른다.

그리고 이제 후공의 관심은 유령곡이었다.

천금서고 따위.

후공은 철선인 앞에 섰다.

파파팟!

선우진의 점혈은 해혈하고, 새롭게 점혈하고, 이어 교릉까지 잠복시켰다.

철선인이 두려움에 질린 눈으로 침을 삼켰다.

상황을 다 이해한 건 아니다. 하지만 윤곽은 이해하고 있었기에, 눈앞의 상대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는 실감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허공에 떠 있던 자.

“철선인이라고?”

“…….”

철선인은 다시 마른침만 삼켰다.

후공이 달랬다.

“두려워할 것 없다. 난 네가 충실한 심부름꾼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니 그저 물음에 아는 대로 답하면 된다. 할 수 있겠지?”

철선인이 눈을 크게 뜬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후공은 흡족히 여겼다.

“좋다. 먼저 북교산이다. 너희가 파음문이란 곳을 통해 소문을 낸 것은 알고 있다. 난 궁금해졌다. 왜 굳이 강호인들을 불러들인 것인가. 이목을 돌리기 위해서? 아니지. 사람들을 굳이 모아놓고 이목을 돌리는 멍청이가 있을 리가. 그래서 따로 사람들이 모여야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됐다. 한데…….”

“……?”

“네가 말했다. 유령곡은 공청석유보다 북교산의 행사가 더 중요하다고. 화공신타로 인해 어그러졌지만 다시 할 것이라고도 했지. 나는 그 행사가 궁금하다.”

철선인의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후공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심연 같은 고요함으로 응시할 뿐이다.

그 고요함에 철선인은 서서히 잠식되어갔다.

깊은 정적.

그러다 서서히 철선인의 눈동자가 흔들림을 멈췄다. 똑바로 바라본다.

“후공.”

“……?”

갑작스런 부름에 후공은 놀란 나머지 주춤 반 걸음 물러나고 말았다.

‘나인 걸 안다고?’

상상조차 못한 말이었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가격당한 충격이었다.

어떻게? 유령곡이 환혼과 연관된 것인가?

하지만 말이 안 된다.

그랬다면 진작에 찾아왔어야 했다.

놀란 건 후공만이 아니었다.

성숙노괴도 놀라 눈이 커졌다.

언뜻 보기에 유령곡의 철선인이 천화서고 대공자를 향해 ‘후공’이라 칭하는 것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 말에 천화서고 대공자가 격동을 보이기까지.

처음 만남부터 지금까지 여태 곁에서 지켜보았지만, 지금처럼 놀라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여태 늘 여유롭고, 누군가를 상대하던 손가락으로 개미 한 마리 찍어 누르는 식이었거늘.

그때 천화서고 대공자가 묻는다.

“후공이라니?”

확인했다.

“그, 그게…….”

철선인이 더듬거렸다.

어리둥절한 건 그도 마찬가지였던 터.

아직 말도 안 끝났는데 ‘후공’ 한마디에 이렇게 놀라버릴 것이라곤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그 모습만으로 충분했다. 후공은 낚였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을 부른 것이 아니었다. 말이 안 끝난 것뿐이었다. 혼자 낚여 혼자 동요한 것이었지만 괜히 울화가 치밀었다.

“끊지 말고 말해.”

“후공에 대한 복수입니다.”

“뭐?”

“후공이 지키려던 강호를 피로 물들인다. 저는 그렇게만 알고 있습니다.”

“아…….”

그래서인가.

그래서라면 이해된다.

북교산, 한곳에 모아두고 그 수많은 강호인들을 몰살하려는 것인가. 하지만 어떻게?

“방법은?”

“자세한 건 저는 모릅니다. 으으으으…….”

철선인이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찡그렸다.

‘금제?’

후공도 미간을 좁혔다.

“이런…… 금제인 듯 보이네.”

성숙노괴가 알아봤다.

후공도 이미 인지하고 있었기에 잠시 머뭇거렸다. 금제의 형태가 한두 가지가 아닌 탓이다.

고민도 잠시,

파팟!

목 부위 결분혈과 천정혈을 점혈해 혈류를 차단한 다음, 목 뒤 천주혈까지 타점해 뇌의 발작을 억눌렀다.

“학을 타고 나는 자는 누구냐?”

“멸전…… 존…… 으으으으으으으!”

철선인의 눈이 시뻘겋게 타오르고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되었다. 점혈법으로 억제가 되지 않는다.

이는 ‘암시’ 계열의 금제임을 뜻했다.

자백에 대한 인지가 마음에 떠오르면 금제가 발동되는 형태인듯하다.

달리 말하자면, 섭혼술(攝魂術)이다.

“북교산 다음은?”

“내 머리…… 머리가…… 사, 살려줘…… 으으으으으으으으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철선인의 눈에서 코에서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그러다 한순간 그대로 멈췄다.

눈을 뜬 채로 죽음을 맞았다. 피만 꿈틀꿈틀 흘러나올 뿐이었다.

“하아…… 지독하구만.”

끔찍한 광경에 성숙노괴가 고개를 내저었다.

후공도 동감이었다.

유령곡은 사황천 이상이다.

그동안 음지에서 힘을 비축했음인가.

자신의 사후를 기다렸음인가.

강호를 피로 물들이겠다니.

쉽게 물들 리가.

후공은 색관조를 불렀다.

[네, 주인님!]

“철선인이 날려보낸 전서매를 풀어줘라. 너는 전서매를 따라가 그들의 거처를 알아내고 돌아오면 된다. 지금 바로.”

[까르르르르. 네, 주인님. 가자, 금섬.]

[그윽!]

색관조와 금섬이 동굴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성숙노괴가 멍한 눈이 되어 쳐다봤다.

그러다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대공자, 자네 무슨 일처리를 이런 식으로 하는 건가?”

“무슨 문제라도?”

“너무 빨라. 따라가질 못하겠잖나. 내가 늙은 건가?”

“늙으신 겁니다.”

“어…….”

실상 더 늙은 후공은 선우진에게로 향했다.

“선우진.”

“부, 부디…… 사, 살려줘…….”

이미 중독 상태가 심각함에도 선우진이 삶의 의지를 보였다.

후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살려준다.”

“어?”

파파팟.

놀라는 선우진의 몸에 교릉을 펼쳤다.

교릉의 적용은 최상에, 은외법으로 작용시간을 일다경이 되게 했다.

“살려준다고?”

성숙노괴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물었다.

후공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네, 이곳에서 살게 됩니다. 오래는 못 살겠지만.”

금섬의 독에 중독되었다.

거기에 교릉은 최상.

온몸은 머리 크기로 오그라들 것이다.

“하하하, 그런 뜻인가.”

“동굴을 무너뜨리죠.”

“그러지.”

파앙, 팡!

동굴 입구에서 천장을 향해 장력을 발출했다.

쿠르르 무너져내리면서 차단되었고, 선우진은 그 안쪽에서 울부짖었다.

“안 돼에에에에에에에에에!”

안 돼. 안 돼. 이럴 순 없어. 이렇게 죽을 순 없어.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데.

완전한 어둠 속을 선우진이 기었다. 무너진 돌을 하나하나 힘겹게 치워갔다.

바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공자 자네, 사람이 무르구만.”

“무르다니요?”

“무르지. 놈에게 생기를 빼앗긴 사람이 몇백일 텐데, 적어도 팔 다리 하나씩은 자르고 지혈시킨 다음 무너뜨렸으면 좋았잖나.”

“노조, 지독하십니다.”

“자네가 무른 걸세.”

목소리가 멀어져갔다.

성숙노괴 개새끼.

선우진은 돌을 하나씩 치우면서 욕했다.

하지만 천화서고 대공자는 사람이 괜찮다. 그래도 살길을 열어주었다. 조금만 노력하면, 조금만 노력하면 빠져나갈 수 있다.

힘내자.

그 순간,

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득!

교릉이 발동되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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